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108
8.
흔히 말한다, 희망이 클수록 절망도 크다고.
독스,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그러했다.
‘아.’
1회부터 7회까지, 7이닝 동안 독스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달렸다.
타석에 서기 전부터 독기로 가득 차 있었고, 타석에 설 때면 자신들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집중력을 칼처럼 날카롭게 세웠다.
그 상태로 투수의 공 하나하나를 상대했다.
그건 달리기로 따지면 전력질주를 하고, 하고, 거듭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골인지점 따위는 보지 않는 미친개처럼.
그러나 7회까지 독스 선수들에게 피로감은 없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친 모든 게······.’
보상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전력질주를 할 때마다 그들에게는 무언가가 주어졌으니까.
그렇기에 그 누구도 전력질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저 새끼 좋은 일 시키는 것이었다니?’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오히려 미친 듯이 달리는 동안 어느새 그들이 늪과 같은 덫에 걸렸음을 깨닫는 순간 독스 선수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분노 그리고 혼란, 짙은 피로감 그리고 어쩌면 오늘 말도 안 되는 대기록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다들 정신 차려!”
그런 그들을 움직이게 한 건 팀 오더였다.
“어차피 9회 말까지 가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최대한 공을 봐라! 막말로 삼진을 당해도 투구수는 3개다!”
사실 독스의 코칭스태프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진용의 투구수가 굉장히 적다는 사실을 코치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투수의 투구수를 체크하는 건 코치들이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 중 하나였으니까.
‘젠장, 너무 늦었어.’
하지만 그 사실을 코치들은 굳이 선수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니, 알릴 수가 없었다.
‘젠장······.’
안타가 나오는 상황.
그것도 그냥 안타가 아니라 선두타자 안타가 나오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타자들에게 지금 이진용의 투구수가 적으니 놈의 투구수가 늘어날 수 있도록 좋은 공이 와도, 칠 수 있을 것 같아도 확실하지 않은 공은 참고 기다리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대체 왜?’
그렇다고 오늘 이진용의 공이 무언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굉장히 특별한 공에 당했다면 결코 이런 식으로 경기를 운영하진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안타가 나왔을 때 독스 코칭스태프들은 그것이 기적이라기보다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예상한 그대로의 공인데 대체 왜?’
이진용의 공에 이제는 한국프로야구선수들이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고.
이진용이 등장한 지 두 달 가까이 됐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이진용은 150킬로미터가 넘는 공을 던지는 강속구 투수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중요한 순간 이진용의 공 앞에서 타자들이 무너졌다.
특별할 것 없고 다를 것 없는 공에 무너졌다.
병살타 다섯 개······ 말도 안 되는 꼴을 당했다.
‘이진용의 투심은 본격적으로 분석했다. 그런데도 대체 왜 이런 일이······.’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됐다.
이진용의 투심이 마구와도 같은 공인 건 맞지만, 그래도 충분히 분석이 된 공이었으니까.
‘젠장,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거나 그건 이미 지나간 일.
이제부터 독스가 해야 하는 건, 이진용을 이 이상 쉽게 마운드를 내려가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지웅아!”
그렇기에 독스 코칭스태프는 8회 말 선두타자로 나오게 될 4번 타자 박지웅에게 말했다.
“최대한 공을 봐라! 길게 봐라! 참고 보는 거다! 삼진을 당하더라도 좋으니까!”
그 말에 박지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8회 말이 시작됐다.
9.
김진호는 말했다.
– 내 공을 두고 보려는 놈을 두고 보지 말 것. 그런 놈들에게는 한가운데 공을 꽂아버려.
공 하나를 던질 때 상대에게 가장 치명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던지라고.
때문에 이진용은 4번 타자 박지웅이 타석에 올라왔을 때, 4번 타자임에도 배트를 짧게 쥐고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은 채 굳은 모습을 보였을 때, 그의 스트라이크존에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었다.
131킬로미터.
132킬로미터.
그리고 128킬로미터.
전력투구도 아닌 그저 포심 패스트볼인 공을 찔러 넣었다.
“스트라이크, 아우우우웃!”
그렇게 세 개의 포심 패스트볼만으로 삼진을 뜯어냈다.
‘빌어먹을!’
그건 박지웅 입장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
4번 타자.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온 공이라면 헛스윙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력을 다해 배트를 휘둘러야 하는 자리.
그런데 그런 그가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모든 패스트볼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봐야 했다.
그게 팀 오더였으니까.
섣불리 타격을 하지 말라고 명령을 받았으니까.
‘미치겠다.’
그 상황에서 그는 터지려는 분노를 참았다.
이 순간 자신이 미쳐 날뛰는 것이 도리어 이진용의 수작에 넘어가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이 코칭스태프가 박지웅에게 원하는 건 단순히 투구수를 늘리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박지웅의 모습을 보고 다른 선수들도 각오를 다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런 상황에서 박지웅이 분노한다면 오히려 정말 최악의 사태가 터질 것이 분명했다.
‘참자, 참아.’
때문에 삼진을 당하는 순간 박지웅은 오히려 대비했다.
‘놈이 개지랄을 해도 참는 거다.’
이진용, 그가 자신을 향해 내지를 호우! 그 소리 앞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그런 박지웅의 눈에 이진용이 들어왔다.
이진용이 호우, 그 소리를 내지르는 대신 박지웅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뭘 하든 참자.’
정확히 말하면 박지웅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참아······.’
이호찬, 이진용은 자신의 포수를 지목하며 그에게 요구했다.
그러자 상황을 파악한 이호찬이 외쳤다.
“호우!”
10.
흔히 타자들을 괴롭히는 건 투수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타자가 상대하는 건 투수이니까.
하지만 만약 타자들에게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상대팀 선수를 꼽으라면 그들 중 상당수는 투수 대신에 포수를 꼽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투수는 멀리 있지만, 포수는 가까이 있다는 것.
투수가 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지만, 포수가 하는 말은 귀에 아주 쏙쏙 잘 들어온다는 것.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포수가 작심하고 타자를 괴롭히면, 타자를 미쳐버리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엔젤스의 포수인 이호찬이 본격적으로 독스의 타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가 이진용을 대신해 호우를 외치고 있었다.
심지어 이호찬의 호우는 이진용의 호우와 달랐다.
펑!
“호우!”
공이 제 미트에 꽂힐 때마다 이호찬은 정확히 타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호우를 외쳤다.
“씨발, 작작합시다, 작작!”
그 사실에 독스의 6번 타자 양인섭이 기어코 폭발했다.
폭발한 그를 향해 이호찬이 말했다.
“그럼 치든가.”
“씨발, 좆같네.”
“말이 험하네. 욕은 자제하자. 요즘 프로야구는 애들이 본다, 애들이. 너 애들 앞에서 식빵 굽는 거 풀HD로 보여줄래?”
“그럼 좆같이 하지 마시든가요.”
“좆같다니, 난 그냥 공 잡을 때 기합 좀 하는 거야. 그럼 너도 공 보고 참을 때 기합 좀 넣어.”
“씨발 진짜······!”
“둘 다 조용히 해.”
그런 그 둘의 대화는 이어진 주심의 경고와 함께 멈췄다.
‘젠장 이거 우리팀 후배였으면 그냥 뒤통수를······.’
하지만 양인섭의 분노는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활활, 미친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분노로 가득 찬 양인섭에게 벤치 오더를 볼 여유나, 벤치 오더를 다시 한 번 떠올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씨발, 좆같은 새끼들.’
그저 이 좆같은 포수와 투수를 상대로 아주 제대로 엿을 먹이고 싶은 생각만 가득할 뿐.
‘오냐, 씨발 하나만 던져봐. 그냥 때려줄 테니까.’
그런 그에게 이진용이 2구째를 던졌을 때, 그 공이 존에 들어온다고 생각했을 때, 양인섭의 몸은 저절로 움직였다.
빡!
그렇게 배트에 공이 닿는 순간에야 양인섭은 깨달았다.
‘아차!’
이 공은 투심 패스트볼이고, 자신이 친 공은 유격수 앞으로 갈 것이며, 자신이 우사인 볼트가 아닌 이상 아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호우!”
그리고 이진용의 저 환호성을 등진 채로 1루쪽 더그아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더그아웃에 들어가는 순간 팀 오더를 무시한 대가로 코치들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이진용의 8회 말이 끝났다.
투구수는 68구였다.
10.
9회 초, 엔젤스의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이 났다.
그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삼자범퇴를 당한 당사자들조차 그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배트 대신 글러브를, 헬멧 대신 모자를 챙긴 채 그라운드로 나가면서 생각할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
‘삼구삼진으로 전부 잡으면 투구수는 77구다.’
‘그렉 매덕스가 76구 완투승이었지?’
과연 이 순간 이진용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투구수를 극한까지 줄일 것인지.
‘독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진용을 상대로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올 이유가 없어.’
‘어차피 진 게임, 굳이 더 처참하게 질 필요는 없지.’
이진용, 그가 누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난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할지.
말 그대로였다.
지금 이진용의 기록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독스였다.
독스, 그들은 하고자 한다면 이진용을 상대로 최소한 9구를 던지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진용의 투구수를 최소 77구까지 만들 수 있었다.
방법도 간단했다.
타석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냥 타석에 서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
그런 그들을 상대로 만약 이진용이 76구 이하로 투구수를 기록한다면 파격, 그 이상의 일일 터.
때문에 누군가는 생각했다.
– 이진용이 몸에 맞는 공으로 만루 만든 후에 삼중살이나, 병살 노리면 되지 않을까?
이진용이 의도적으로 타자의 몸에 공을 맞추는 방식으로, 그런 방식으로 만루를 채운 후에 타자를 상대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 하긴, 만루가 됐는데 그냥 삼구삼진 당하는 건 좀 그렇긴 하겠다. 그렇게 되면 타격해야지.
ㄴ 야, 그건 좀 그러지 않냐?
ㄴ 뭐 어때? 기록이 걸렸는데?
무사 만루 상황이라면 제아무리 독스라고 해도 멀뚱히 삼진을 당할 수는 없을 거라고.
– 야, 이호우야, 이호우.
ㄴ 하긴 이호우네.
ㄴ 그래 이호우지.
무엇보다 이진용이란 투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였다.
적어도 세상이 알고 있는 이진용은 그랬다.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또라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9회 말, 이제는 마지막 이닝이 될 그 무대에 이진용이 등장했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을 품은 채.
그런 그의 등장에 좌중은 침묵했다.
모두가 긴장한 채 이진용이 이 상황에서 내놓은 해법이 무엇일지, 그 해법의 첫 단추인 초구가 무엇일지 주목했다.
‘몸에 맞는 공?’
‘아니면 이퓨스 볼을 던져서 도발하려나?’
그 관심 속에서 이진용이 초구를 던졌다.
“어?”
“어!”
타자의 몸쪽 낮은 코스를 제대로 파고드는 145킬로미터짜리 패스트볼을.
11.
김진호는 이진용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마운드 위의 투수가 공을 던지는 무수히 많은 방법들을,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하지만 그런 김진호는 단 한 번도 이유 없이 타자의 몸에 공을 던지라고 한 적은 없었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야구가 아니니까.
투수가 타자의 몸에 일부러 공을 맞출 수 있는 건 그 타자가 그걸 맞아야 할 짓을 했을 때뿐이니까.
그 사실은 9회 말이 됐을 때, 중요한 기록이 걸렸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진용, 그는 타자의 몸에 맞을 정도로 깊숙한 몸쪽 공을 던질지언정 타자의 몸에 공을 맞출 생각은 없었다.
동시에 9회 말을 어설프게 보낼 생각도 없었다.
퍼엉!
145킬로미터짜리 몸쪽 꽉 찬, 완벽하게 제구가 된 포심 패스트볼은 그 의지의 표현이었다.
“스트라이크!”
전심전력을 다해서 독스를 상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그런 이진용의 초구에 담긴 의미를 독스의 선수들은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아.’
그 순간 독스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조금 전 어떻게든 도망치기 바쁘던 겁쟁이의 눈빛에 전의가 감돌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전력을 다할 속셈이야.’
‘최고의 공을 던질 속셈이다.’
지금 리그 최고의 투수가 전심전력을 다해서 자신들을 상대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도망치기만 하는 건 그들의 자존심과 자긍심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 전의는 감돌기만 할 뿐이었다.
신기록의 제물이 되는 것 역시 그들의 자존심과 자긍심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동시에 지금 독스의 타자들은 팀 오더에 움직이고 있었으며, 8회 말에는 선수들이 이호찬의 도발에 넘어가는 바람에 팀 오더를 따르지 않아 불상사가 일어난 상황이었다.
이미 잘못해서 혼이 난 상황에서 똑같은 잘못을 일부러 저지를 순 없는 노릇.
그렇게 잠시 동안, 정말 잠시 동안 독스의 더그아웃에는 완전한 침묵이 깔렸다.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완벽한 침묵!
“후우, 졌다, 졌어.”
그 침묵을 깬 건 다름 아니라 안해민이었다.
오늘 1번 타자로 출전했으며, 독스 최고의 타자인 그가 감독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감독님, 그냥 붙어보게 해주십시오.”
펑!
그렇게 안해민이 말을 마치는 순간 곧바로 이진용이 2구째를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타자의 스트라이크존 바깥쪽 낮은 코스, 그곳을 찌르는 143짜리 패스트볼이었다.
“볼!”
그러나 그 공에 주심은 볼을 선언했다.
오늘 내내 볼을 선언했던 코스였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진용이 모를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진용은 그곳에 공을 던졌다.
실투? 당연히 아니었다.
때로는 주심의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짜더라도 투수는 고집해야하는 코스가 있으며 이진용은 그 코스에 공을 던진 것뿐이었다.
즉, 그것은 이진용의 의지였다.
볼을 주는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어떻게든 타자를 완벽하게 잡기 위한 공을 던지겠다.
그 공에 안해민은 다시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죽어도 득점 못합니다. 마지막 득점 찬스 아닙니까?”
그 순간 독스 선수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감독님 그냥 강공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점수 내겠습니다!”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 아닙니까? 까짓것 10점 차 한 번에 역전하겠습니다.”
“이진용 상대로 만루홈런 하나 때려보겠습니다!”
“제가 그냥 커트해서 투구수 10개 늘리고 오겠습니다!”
뜨거운 목소리가 독스 더그아웃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 앞에서 감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감독은 그대로 타임을 부른 채 자신을 바라보는 타자를 향해 사인을 줬다.
그 사인을 보는 순간 모든 타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공격적으로 타격에 임할 것.’
그들이 원하는 사인이 나왔으니까.
그 사인이 나오는 순간 독스의 타자들은 모든 신경을 이진용에게 집중했다.
12.
딱!
둔한 소리와 함께 공이 높게 떴다.
누가 보더라도 내야 뜬공.
“마이 볼!”
곧바로 투수가 공을 포착하고 마이볼을 외칠 정도로 뻔한 궤적을 보이는 공이었다.
그러나 내야 뜬공을 친 타자는 전력을 다해 1루로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까.
투수가 공을 놓치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지는 실책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야말로 실낱같은 희망, 그러나 분명 실재하는 희망에 타자는 기꺼이 자신의 전력을 투자했다.
펑!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타자의 희망은 투수의 글러브 속에서 그대로 사그라지고 말았다.
9회 말, 오늘 경기의 54번째 아웃카운트가 투수의 글러브에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진용, 그가 75구 완봉승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해냈다.’
그렉 매덕스가 이룩한 76구 완투승을 뛰어넘는 순간이었다.
‘신기록이다!’
그 순간 이진용은 기다렸다.
‘아!’
베이스볼 매니저의 알림.
‘다이아 룰렛!’
이진용, 그는 베이스볼 매니저가 자신이 기록한 이 신기록에 다이아몬드 룰렛 이용권을 주기를 기다렸다.
‘호우는 그다음이다.’
당장 터져 나오려는 환호성마저 참고 기다렸다.
‘자, 와라!’
하지만 베이스볼 매니저는 그런 이진용의 기다림과 달리 그가 듣고 싶어하는 것을 내뱉지 않았다.
‘응? 렉 걸렸나?’
그 사실에 이진용이 살짝 주변을 바라봤다.
그런 이진용의 주변으로는 자신의 75구 완봉승을 축하하며 다가오는 동료들이 보였다.
‘야, 질러!’
‘호우해! 호우!’
더불어 그들 역시 이진용이 호우를 내지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용의 시선이 곧바로 3루쪽 관중석을 향했다.
팬들이 보였다.
‘호우 나와라, 호우!’
‘호우 질러라, 질러!’
그들 역시 이진용이 호우를 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이진용의 환호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그 걸렸나? 왜 안 줘? 신기록 세웠잖아?’
그러나 베이스볼 매니저는 여전히 침묵했고, 이진용의 눈동자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 진용아, 한국프로야구 최소 투구수 완봉 기록은 73구다.
김진호의 목소리가.
– 내가 이럴 줄 알고 말 안 했지롱.
그 말과 함께 김진호, 그가 이진용을 대신해 소리쳤다.
– 호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