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113
4.
이진용.
처음 그가 놀라운 모습을 보였을 때 세상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실력이다, 아니다 운이다.
하지만 이진용이 100이닝 무실점이란 대기록을 달성했을 때 더 이상 그런 종류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 이호우, 그가 최고다!
이진용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운이 아닌 실력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사람 사는 세상에 논쟁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았을 터.
이제는 최고가 된 이진용에 대해서 세상은 새로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졌다.
– 그런데 이호우 특기는 뭐라고 해야 함?
이진용은 최고다, 그렇다면 이진용을 최고로 만들어준 건 무엇일까?
– 투심 아님? 완전 마구잖아?
– 에이, 마구는 스플리터지. 이호우 스플리터는 알아도 못 쳐.
– 포심이지. 이호우 포심은 아예 수준이 다르다니까?
– 또라이라는 거? 그게 가장 큰 무기 아님? 옛말에 미친놈보다 무서운 건 없다잖아?
– 지랄한다. 이진용 최고 무기는 호우지.
ㄴ ㅇㅇ 호우 인정.
ㄴ 정답이네. 호우지.
ㄴ 호우!
이에 대한 논쟁은 이진용이 업적을 새로 세울 때마다 줄어들기는커녕 더 증폭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투심으로 맞혀 잡는 피칭을 하면 75구로 완봉승을 하고, 스플리터로 삼진을 잡는 피칭을 하면 한 경기에 탈삼진 18개를 잡고······.”
“그 모든 기록의 근간에는 언제나 신출귀몰한 포심 패스트볼이 있지.”
“그러다가 간간이 등장하는 체인지업은 귀신이고.”
제아무리 대단한 분석가라고 해도 이진용이 가진 무기들 중에 무엇 하나가 압도적으로 우월하다는 근거 있는 설명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 그들에게 이진용은 새로운 논쟁거리를 보여줬다.
7회 초, 최세정이 여전히 퍼펙트 페이스를 유지한 채 내려온 마운드 위에서 그것을 꺼냈다.
펑!
“저, 저거!”
“슬라이더?”
슬라이더.
7회 말, 이진용이 슬라이더를 꺼냈다.
5.
김진호는 말했다.
–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이 던진 공은 포심 패스트볼이고, 가장 많이 던진 변화구는 슬라이더다.
변화구 중 최고는 슬라이더라고.
– 이렇게 말하면 어느 멍청한 개뽀록 허접 땅딸보 투수는 주둥이를 삐쭉 내밀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입에서 침 질질 흘리면서 반문하겠지. 대체 뭘 근거로 슬라이더가 최고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하겠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 슬라이더가 안 좋은 이유를 세 가지만 대라고. 못 대면 넌 뒈진다고.
슬라이더란 구종에서 꼬집을 만한 단점이 없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슬라이더를 대체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구종은 사실상 없었다.
대부분의 구종들은 상하로 움직이지만, 슬라이더는 좌우로 움직이기에.
– 그러니까 진용아, 슬라이더를 주력으로 삼지 않더라도 슬라이더에 대한 연구는 무조건 해야 해.
때문에 김진호는 거듭 말했다.
– 연습 피칭을 할 때 슬라이더도 던져보면서 슬라이더에 대한 느낌을 충분히 익혀놔. 이미지 트레이닝도 잊지 말고. 슬라이더 잘 던지는 투수들 보면서 슬라이더를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도 공부하고.
슬라이더를 공부하라고.
– 나중에 슬라이더 던져야 할 때 슬라이더 써먹는 방법을 몰라서 으아앙, 왜 슬라이더는 안 가르쳐줬어요, 김진호 시져시져! 이러지 말고.
그리고 당연히 이진용은 공부했다.
매일,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슬라이더를 잘 던지는 투수들, 랜디 존슨이나 김진호의 영상을 보면서 그들을 분석했고, 거듭 슬라이더 구질을 쥐어보며 그 감각을 손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 마스터 랭크의 슬라이더를 쥐여주는 건 운전면허 학원에서 장외 주행을 1천 시간 정도 한 사람에게 끝내주는 스포츠카를 쥐여준 것과 같았다.
잘 탄다는 의미가 아니다.
퍼엉!
‘젠장, 이 새끼 슬라이더만 대체 몇 개째야!’
미쳐 날뛴다는 의미이지.
폭주!
지금 이진용은 슬라이더로 폭주를 즐기고 있었다.
“볼!”
물론 폭주하는 만큼 대가도 있었다.
이제까지 이진용에게 거의 나오지 않았던 볼이 거듭 나오고 있었다.
펑!
“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용은 슬라이더를 멈추지 않고 던졌다.
우타자를 상대로는 스트라이크존에서 점차 멀어지는, 좌타자를 상대로는 스트라이크존의 끄트머리에 걸치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미친 듯이 던지기 시작했다.
꼴깍!
그리고 그 사실에 타이탄스 팬들은 침을 삼켰다.
“점마, 저거!”
“와, 이거 완전히 그거네.”
타이탄스 팬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최동원 대 선동렬 재림이잖아!”
1986년 8월 19일, 사직구장에서 일어났던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경기!
폭포수와 같은 커브를 던지던 최동원과 칼과 같던 슬라이더를 던지던 선동렬의 경기가 지금 이 순간, 이곳 사직구장에서 재림했다는 것을.
침이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야구팬이라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이유였다.
“오늘 그냥 외치다 죽자!”
“씨발, 그래 전쟁이다! 다들 외쳐!”
이진용, 그가 7회 말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는 순간 이제까지 숨죽인 채 경기를 보던 엔젤스 팬들은 기어코 토해냈다.
“하나, 둘, 셋!”
호우!
엔젤스 팬들이 타이탄스 팬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참았던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호, 호우?”
“새끼들, 오냐 한 번 해보자 이거지?”
“호우는 니미, 진짜 소리가 뭔지 보여주자!”
그리고 그 환호성에 타이탄스 팬들도 기꺼이 소리쳤다.
마!
사직구장의 명물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함성 대 함성의 대결이 시작됐다.
“미치겠네.”
“으아······.”
그 사실에 엔젤스와 타이탄스 선수 그리고 코치들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거 지면 죽는다.’
‘어떻게든 이겨야 해. 최소한 무승부는 거둬야 해.’
팬들이 죽기 살기로 악을 쓰는 게임, 이런 게임에서 졌을 경우 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경기, 팬들의 처절한 각오로 물든 경기에서 진다면 그것은 팬이 존재하기에 존재할 수 있는 프로에게는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
최세정, 그 역시 사직구장을 가득 채우는 이 함성들 앞에서 질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더욱이 최세정은 오늘 자신이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한계, 그 이상임을 알고 있었다.
정말 끝내주는 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언제 신기루처럼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음도 알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있어.’
이 넘치는 응원과 격려 앞에서 어느 순간 부응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앞에서 담담한 표정 위로 옅은 미소를 짓기에 최세정은 아직 어렸다.
그리고 그건 이진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진용 역시 이 상황에서 담담한 표정이나, 옅은 미소를 짓지 못했다.
“우와, 반응 끝내주네. 아, 어릴 적 생각난다! 아버지 따라서 사직 오면 막 삼겹살도 구워 먹고 소주도 병째로 마시고 양주도 마시고 그랬는데. 그때 아버지가 노래 부르라고 하면, 난 저기 외야에서 부산 갈매기 막 부르고, 그러면 아저씨들이 귀엽다고 용돈 줬었는데.”
즐거움에 몸부림을 칠 듯한 표정 위로 만연하다 못해 입가가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부산 갈매기∽ 부우산 가아알매기∽!”
그리고 그 미소 사이로 흥겨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모습에 엔젤스 선수단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진짜 또라이다.’
‘와, 세상에 이런 또라이가 있을 줄이야?’
이진용, 그가 정말 위대한 또라이라는 것을.
오직 한 명, 김진호만이 이진용이 짓는 즐거움과 만연한 미소의 배경을 알고 있었다.
– 야비한 새끼.
이진용, 그가 슬라이더를 고른 이유가 단순히 과거의 재림을 위함이 아님을, 오히려 이진용이 최세정을 단숨에 흔들기 위해 고른 자객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 그때 그냥 건너가는 식으로 말해준 건데, 용케 기억하다니.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준 건 그 누구도 아닌 본인이었으니까.
때문에 김진호는 확신했다.
– 최세정은 8회에 흔들리고, 9회에 무너지겠군.
이진용이 휘저어놓은 판 위에서 최세정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런 김진호의 말에 이진용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김진호가 말했다.
– 웃지 마, 정들어.
그 말을 하는 김진호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어져 있었다.
6.
7회 말 이진용의 슬라이더가 만들어낸 열기는 사직구장을 용광로로 만들었다.
“최세정 파이팅! 마, 네가 타이탄스의 에이스다!”
“무! 적! 호! 우!”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뿜는 열정과 환호와 기대가 녹아 마운드 위로 흘러들어왔다.
그런 마운드 위로 올라간 최세정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건 그가 엔젤스의 4번 타자인 박준형을 상대로 3구째에 커브를 던지는 순간이었다.
“볼!”
‘어?’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왜 볼이지?’
조금 전 최세정이 던진 커브가 그린 궤적은 이제까지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잡아주던 코스였으니까.
그 사실을 눈치챈 건 비단 최세정만이 아니었다.
‘어? 저걸 이제 안 잡아주네?’
‘판정이 갑자기 짜졌네?’
‘이것 봐라?’
엔젤스 그리고 타이탄스, 모두가 그 사실을 파악하고는 눈빛을 빛내기 시작했다.
반면 김진호는 눈빛을 빛내는 대신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 주심에게 있어서 주무기로 커브를 던지는 투수와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를 동시에 판정하는 것만큼 지랄 맞은 건 없지.
김진호,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으니까.
– 그래서 둘이 붙으면 둘 중 하나지.
사실 오늘 주심은 최세정의 커브에 후한 판정을 줬다.
물론 노골적일 정도로 편파 판정은 아니었다.
원래 커브는 주심이 판정하기 쉽지 않은 공이다.
스트라이크존 낮은 곳에 떨어지는 공에다가 심지어 주심은 포수를 앞에 두고 그 공을 봐야 한다.
그리고 포수는 그런 주심의 처지를 이용한다.
공을 잡을 때 포수 글러브를 움직이는 프레이밍, 소위 미트질이란 걸 해서 주심의 판정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어쨌거나 7회 초까지 최세정의 커브는 후한 판정을 받았다.
그런 상황을 바꾼 건 다름 아니라 7회 말 이진용이 꺼낸 슬라이더였다.
– 시너지 효과로 서로 득을 보거나 아니면 마이너스 효과로 서로 엿을 먹거나.
이진용이 7회 말에 이르러서 예리하다 못해 완벽함에 가까운 마스터 랭크의 슬라이더를 꺼낸 건 타자 입장에서 미칠 노릇이지만, 주심 입장에서도 미칠 일이었다.
7이닝 내내 슬라이더라고는 거의 보지 못한 주심 입장에서 7회 말부터 갑자기 스트라이크존 경계면을 넘나드는 예리한 슬라이더를 두고 정말 칼 같은 판정을 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여기서 주심의 선택지는 두 가지.
에라 모르겠다, 그냥 후하게 다 잡아주거나.
에라 모르겠다, 그냥 짜게 안 잡아주거나.
– 오늘은 마이너스 효과가 일어났고.
그리고 오늘 주심은 후자를 택했다.
정확히 말하면 선택을 강요당했다.
만약 거기서 이진용에게 유리한 판정을 줬다면 타이탄스 팬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사실 고민할 문제도 아니다.
이진용에게만 노골적으로 짠 판정을 할 수는 없다.
– 그래, 제아무리 한국프로야구계가 이진용이가 마음에 안 들어도 노골적으로 너만 엿 먹일 순 없지.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 이제까지 최세정에게 후했던 판정을 짜게 바꾸는 수밖에.
그게 지금 8회 초에 올라온 최세정의 커브가 더 이상 좋은 판정을 받지 못한 이유였다.
물론 이 정도까지 자세한 배경을 아는 이는 지금 이 경기를 보는 이들 중에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굳이 이런 세세한 배경 같은 걸 알 필요도 없었다.
‘저 커브가 안 잡아주면 이야기는 끝이지.’
중요한 건 이제까지 잡아주던 커브를 더 이상 주심이 잡아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이제는 최세정 입장에서 커브를 던지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최세정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세정아, 어차피 오늘 네 최고 무기는 패스트볼이었다. 괜히 커브로 힘 빼지 말고 패스트볼로 가자.’
제구가 되는 150짜리 패스트볼로 밀어붙이는 것!
‘예.’
그런 포수의 요구에 최세정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더그아웃에서 바라보던 김진호가 비릿한 미소를 씨익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이진용도 똑같이 지었다.
심지어 그 둘은 마치 약속했다는 듯이 동시에 나지막이 말했다.
– 신나게 악셀 밟으면 기름통은 더 빨리 바닥이 나는 법.
“신나게 악셀 밟으면 기름통은 더 빨리 바닥이 나는 법.”
그 순간 이진용과 김진호가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김진호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이진용이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유치하게 찌찌뽕, 그런 건 안 하시겠죠?”
– 찌······ 야! 내가 유치하게 그런 걸 왜 하냐?
그때였다.
따악!
경쾌한 소리가 그라운드를 가로질렀다.
“나왔다!”
“선두타자 안타다!”
박준현, 그가 오늘 엔젤스 타자들 중에 첫 안타를 신고하는 소리였다.
7.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타자가 친 타구가 외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렇게 날아가는 공은 사직구장이 자랑하는 드높은 녹색의 벽을 넘기에는 부족했고, 펜스 근처까지 이동한 우익수가 그대로 높게 점프하며 그 공을 잡아냈다.
그렇게 공이 우익수의 글러브에 들어가고, 우익수가 펜스에 몸을 부딪치고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그 우익수가 공을 잡은 글러브를 높게 드는 순간.
그 순간 사직구장에 있던 타이탄스 팬들이 소리쳤다.
마!
그리고 마운드에 있던 최세정도 소리쳤다.
“마!”
최세정, 그가 8회 초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엔젤스 더그아웃은 참담한 표정을 짓는 대신 오히려 눈빛을 빛냈다.
‘보인다.’
이제까지 난공불락이었던 최세정을 무너뜨릴 수 있는 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드디어 틈이 보여.’
8회 초, 최세정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기 전 그라운드에는 엔젤스의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두 명 있었다.
7회까지 최세정을 상대로 단 하나의 안타도 얻어내지 못한 엔젤스가 8회에만 두 개의 안타를 얻어낸 것이다.
‘이제부터 최세정은 커브 쉽게 못 던져. 아니, 던져도 무시하면 돼.’
‘9회 타순은 9번부터 시작. 상위타순 나오면 해볼 만하지.’
엔젤스가 자신감을 가지기에 충분한 근거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타이탄스 역시 알고 있었다.
“세정이 상태는?”
“더 던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쉽진 않을 겁니다. 지금 세정이 투구수가 119구입니다. 아시다시피 세정이는 120구 이상 던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있어서도 안 되지.”
지금 이대로 최세정을 계속 마운드에 올리는 것은 엔젤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물론 최세정이 9회에 마운드에 올라갈 수도 있었다.
“이진용을 상대로 8회 말에 3점 정도를 뽑아낼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나?”
만약 8회 말에 타이탄스가 3득점 정도를 뽑아낸다면 최세정에게 오늘 경기의 완투를 맡길 수 있을 터.
그런 감독의 주문에 타이탄스의 타격코치는 안 된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열심히, 그리 말할 뿐.
당연한 말이지만 질문을 던진 타이탄스 감독 역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타이탄스 감독은 준비했다.
“불펜은?”
“전부 대기 중입니다. 언제든 누구든 투입 가능합니다.”
“일단 총력전을 준비하도록.”
모든 불펜을 투자해서라도, 최소한 무승부라도 얻어내기 위한 준비를.
물론 말 그대로 준비였다.
‘가장 베스트 시나리오는 8회 말에 이진용이 실점을 하고, 9회에 클로저를 투입하는 거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8회 말에 이진용에게 점수를 얻고, 9회 초에 마무리투수가 올라와 깔끔하게 1대0 승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기대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8회 말, 마운드에 올라온 이진용이 슬라이더 3구만으로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잡는 순간 타이탄스 감독은 더 이상 기대감을 품지 않았다.
“오늘 끝까지 간다. 동훈이 대기시켜.”
8.
내야 뜬공.
그 공이 8회 말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되는 순간 3루쪽 관중석에 소수 부족처럼 모여 있던 엔젤스 팬들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 그 모든 것을 토해냈다.
호우!
그러자 곧바로 사직구장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던 타이탄스 팬들이 소리쳤다
마!
그 두 개의 이어진 함성 속에서 막상 자신이 환호를 내지를 틈을 찾지 못한 이진용은 실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김진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진짜 살다살다 이런 광경을 볼 줄이야. 아, 나 죽었지. 내가 뒈지니까 별 신기한 일이 다 생기네. 이러다가 갑자기 막 세상에 몬스터 나오고 초능력자들도 나와서 몬스터 잡는 거 아닌지 몰라.
투수가 아웃카운트를 잡는 순간 관중들이 함성을 내지르고, 그 함성에 상대팀의 팬들이 함성으로 대응하는 건 메이저리그의 야구 역사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 응?
그런 김진호의 눈에 마운드를 내려가다 멈춘 이진용의 모습이 보였다.
– 진용아, 뭐해? 설마?
그 순간 김진호가 놀라며 소리쳤다.
– 너 여기서 설마 바지 벗고 호우! 외치려고? 야, 인마 아무리 관심을 못 받는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관심받으면 외설죄로 잡혀가!
그 외침에 이진용이 개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글러브로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불펜 열렸어요.”
그 말에 김진호가 이진용이 바라보는 곳을, 1루쪽 더그아웃이 아니라 그 옆에 붙은 불펜을 바라봤다.
그러자 불펜의 문이 열리고, 그 속에서 우람한 덩치를 가진 턱수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쟤 이름이······.
“염동훈 선수요.”
– 그래, 염동훈. 셋업맨이었지?
드러낸 이의 정체는 타이탄스의 셋업맨 염동훈!
현재까지 2.00의 방어율을 유지하며 14개의 홀드를 기록하면서 수준급 불펜으로 활약 중인 투수였다.
그런 그가 마운드에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0대0 상황에서 9회에 셋업맨을 올린다······ 이야, 타이탄스 아주 작정했네, 작정했어.
그 모습에 이진용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드루와라, 드루와. 어디 몇 명까지 들어오나 보자.”
그렇게 9회가 시작됐다.
아무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9회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