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12
4화. 입단 (2).
4.
승부의 세계에는 오묘하며, 기묘하다.
단순히 이론과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이 사실은 모두가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승부를 앞두고 자신의 상대를 보는 순간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아, 오늘 이 녀석 상대로 이기기 힘들겠다.
오, 왠지 쉽게 끝날 것 같은데?
그런 종류의 느낌.
처음 만나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에 대한 그 어떤 정보와 접촉도 없었음에도, 제대로 승부를 보기도 전임에도 이미 승패가 분명하게 가늠되는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이 현실이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야구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 투수가 누구든 간에, 상대 타자가 누구든 간에 서로 마주하는 순간 어느 한쪽이 이미 우세한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압도적인 성적을 내는 이들에게는 이런 싸움에서 언제나 이기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때 나오는 단어 중 대표적인 단어가 이거다.
아우라.
대단한 선수를 두고, 그 선수는 아우라부터가 달라! 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 아우라가 달라졌어.
김진호가 이진용으로부터 그 아우라를 느낀 건, 8번 타자가 이진용이 던진 그냥 평범한 패스트볼을, 어찌 보면 실투나 다름없는 공을 제멋대로 건드린 후에 내야 플라이로 타석에서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25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1구로 타자를 잡았습니다. 보너스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2.2이닝 무실점 피칭 중입니다.] [9타자 연속 범퇴까지 1명 남았습니다.]“아우라? 운빨이 아니고요?”
– 운빨도 계속되면 아우라가 되거든. 그리고 사실 제일 끝장나는 게 운빨이야. 운빨 좋은 놈은 더 운이 좋은 놈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못 이겨.
그 사실에 이진용은 훗! 짧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이진용의 눈에 머리 위에 22포인트를 단 채 타석에 서는 9번 타자가 보였다.
그뿐이었다.
이 순간 이진용에게 주변의 시선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김진호에게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김진호 역시 더 이상 이진용을 향해 괜한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마운드의 지배자는 그 누구도 아닌 이진용이었으니까.
5.
120킬로미터짜리 직구는 절대 느리지 않다.
상식적으로 120킬로미터로 움직이는 물체 자체가 느릴 리가 없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주먹 크기의 하얀 물체를 길쭉한 막대기로 쳐낸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비상식적인 일.
즉, 120킬로미터짜리 패스트볼을 치는 행위는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이가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만약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건 수행이라기보다는 요행에 가깝다는 의미.
‘젠장!’
백팀의 9번 타자 이석천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요행이란 놈이 따르지 않았다.
그는 이진용의 패스트볼을 노렸고, 패스트볼이 날아오는 순간 배트를 휘둘렀다.
노리던 공이 왔고, 노리던 공을 노렸다.
그러나 긴장으로 인해 이미 리듬이 무너진 그의 몸뚱이는 고장난 기계와 다를 게 없었다.
빡!
거기서 이미 상황은 끝.
그가 친 공은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유격수 앞으로 빨려 들어갔고, 오늘 이런 땅볼 수비를 무려 여섯 차례나 하게 된 유격수는 이제 너무나도 쉽게 땅볼 처리로 3회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24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최초로 9타자 연속 범타 처리에 성공했습니다. 실버 룰렛 이용권이 지급됩니다.] [9타자 연속 범타 처리에 성공했습니다. 4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3이닝 연속 무실점 이닝에 성공했습니다. 3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누적 포인트는 2,892포인트입니다.]“예압!”
그리고 이진용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아냈다.
6.
겨울의 해는 짧았다.
중천에서 한없이 놀 것 같던 해는 잽싸게 가라앉을 준비를 했고, 야구장에는 태양빛 대신 조명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보유하신 룰렛 이용권은 실버 룰렛 1회, 브론즈 룰렛 2회입니다.] [현재 보유하신 포인트는 2,892포인트입니다.]그 조명빛 아래에서 자신의 수확을 확인하는 이진용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 그만 좀 봐라. 벌써 몇 번째냐?
그런 이진용 옆에는 김진호가 조명빛이 그대로 통과하는 반투명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런 김진호에게 이진용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정말 이러다가 올해 프로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 어느 팀으로 가게 될까? 김진호 선수는 어디가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무조건 부산 타이탄스를 원하실 것 같은데?”
– 글쎄, 난 딱히 팀에 대한 애정은 없어서. 하지만 기왕 가는 곳이라면 우승할 수 있는 팀이 좋지.
“우승이요? 아, 김진호 선수는 월드시리즈 우승이······.”
우승.
그 단어가 나오자 김진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 내 하나 남은 숙원이었지. 98년부터 7시즌 동안 카디널스에서 봉사한 다음에 우승 좀 하겠다고 2004시즌 우승팀인 레드삭스 가니까, 그다음 해에 카디널스가 우승하더라. 빌어먹을.
메이저리그의 지배자라고 불리며 사이영상과 리그 MVP를 비롯해 투수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받은 김진호였지만,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만큼은 가지지 못했다.
이진용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진호가 얼마나 월드시리즈 우승과 거리가 먼 사나이였는지.
“그리고 레드삭스가 2007시즌에 또 한 번 월드시리즈 우승했죠.”
– 응? 뭐? 그게 무슨 소리야? 2007시즌 월드시리즈 우승을 레드삭스가 했다고?
“예. 거기서 월드시리즈 우승하고 김진호 선수 추모식도 짧게 나마 했었죠.”
– 와, 미치겠네. 야, 그걸 왜 말 안 해줘?
“안 해주긴요? 김진호 선수 죽고 난 후에 월드시리즈 우승팀 목록 보여줬잖아요?”
그 말에 기억을 떠올린 김진호가 분노하듯 소리쳤다.
– 컵스가 작년에 우승한 걸 봤는데 그딴 게 기억에 남겠냐? 그런 충격적인 걸 보고 다른 걸 기억하는 게 말이 돼? 젠장, 설마 컵스가 나보다 먼저 우승을 할 줄이야.
“아니, 이미 돌아가신 분이······.”
– 난 내 사후에도 백 년 동안은 컵스가 우승 못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사후 백 년이라니, 그럼 컵스가 22세기까지 우승을 못한다는 말인데 그게 말이 됩니까?”
– 야, 생각해 봐. 1세기 동안 우승을 못한 팀이 남은 1세기 동안 우승을 할 가능성이 높은지, 못 할 가능성이 높은지. 내가 엡스타인 단장 능력을 인정하고, 그래서 레드삭스 트레이드를 받아들인······.
“쉿.”
그때 이진용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이진용과 김진호를 향해 한 사내가 다가왔다.
– 어? 범석이 형이네.
그 사내의 정체를 가장 먼저 파악한 건 김진호였다.
“정범석 감독이요?”
그 사실에 놀란 이진용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그런 이진용의 모습에 도리어 다가오던 고양 스타즈의 감독, 정범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그대로 정범석 감독이 이진용 앞에서 멈췄다.
“날 알고 있나?”
“아, 그게······.”
옆에 김진호 선수 유령이 친절하게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구면이신 거 같은데 인사하실래요?
이진용은 당연히 그런 대답 따윈 하지 않았다.
“제가 입단하려고 하는 구단의 감독님인데, 당연히 알고 있어야죠.”
– 범석이 형이 독립구단 감독이라니, 참 세월의 흐름이 무섭구나. 진용아, 대단한 분이다. 이래 보여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따신 분이다.
김진호의 거듭된 말에 이진용이 표정으로 좀 닥쳐요! 라고 말했다.
“음.”
물론 그 표정에 대답한 건 김진호가 아니라 정범석 감독이었다.
정범석 감독이 이진용의 표정을 보고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눈치 빠른 이진용이 잽싸게 말했다.
“아으, 오랜만에 무리해서 던졌더니 몸이 뻐근하네요.”
찌푸린 표정의 원인을 근육통으로 잽싸게 바꿨다.
“고생했네.”
“하하, 아닙니다. 이 정도는 해야죠. 그래도 프로를 노리고 야구를 하는데요. 아, 그렇다고 해서 제가 체력이 약한 게 아닙니다. 제가 체격은 작아도 스태미나는 끝장납니다. 제 별명이 마운드의 메시입니다, 메시.”
– 지랄하네.
이진용의 표정이 다시금 살짝 일그러졌다. 그 표정 그대로 이진용이 어깨를 풀었다.
“이 정도는 스트레칭하면 금방 낫습니다. 조금 뻐근한 것뿐이니까요.”
“체인지업이 멋지더군.”
정범석 감독이 화두를 바꾸었다.
“감사합니다.”
“혹시 알고 있나? 체인지업에 몇 가지 단계가 있는지?”
그 순간 툭 내뱉은 질문과 함께 정범석 감독은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 눈빛 앞에서 김진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이진용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세 단계 아닙니까?”
“세 단계?”
“예.”
‘분명 김진호 선수는 체인지업에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했지.’
이진용의 대답에 정범석 감독은 짧게 웃은 후에 이진용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아는군. 설명은 필요 없겠어.”
“예?”
놀라는 이진용을 향해 정범석 감독은 재차 어깨를 두드리며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봤으면 좋겠군. 만약 좋은 결과가 없더라도, 언제든 찾아와도 좋네.”
그 말을 끝으로 정범석 감독이 사라졌다.
7.
“무슨 일이십니까?”
김정호 투수코치, 그는 갑자기 이진용을 만나고 오는 정범석 감독에게 곧바로 다가와 질문했다.
“말해줄 게 있어서 갔네.”
그 대답은 놀라운 대답이었다.
정범석 감독은 고양 스타즈의 감독이다.
그리고 현재 그라운드에서 마무리 운동을 하는 이들은 그 고양 스타즈의 일원이 되기 위해 트라이아웃에 도전한 자들이고.
그런 상황에서 감독이 지원자 중 한 명을 만나서 이야기한다는 건 여러모로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
“무슨 이야기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체인지업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지 아나?”
그 질문에 김정호 투수코치는 곧장 대답했다.
“감독님 지론대로라면 세 가지 단계가 있죠.”
정범석 감독, 그의 야구론에 따르면 체인지업에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그냥 느리기만 한 공.”
1단계는 그냥 느린 공.
말 그대로 패스트볼과 비슷한 투구폼에서 나오되, 패스트볼보다 느린 공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느린 공을 던진다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매우 좋다.
애초에 체인지업은 오프스피드 피치, 속도를 줄임으로써 타자의 타이밍을 어긋나게 만드는 공이니까.
“두 번째는 느려지는 공.”
2단계는 느려지는 공이다.
어느 기준까지는 패스트볼처럼 날아오지만,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은 듯 느려지는 단계.
프로야구리그에서 체인지업 고수 소리를 듣는 이들 대부분은 이 단계에 있다.
이쯤 되면 체인지업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어느 순간에나 믿을 수 있는 결정구가 된다.
“세 번째는 갑자기 느려지며 떨어지는 공.”
마지막 3단계는 갑자기 느려지면서 동시에 뚝 떨어지는 공이다.
말 그대로 마구다.
야구의 신에게 선택 받은 자들만이 던질 수 있는 공이며, 그렇기에 야구 역사 속에서 이런 공을 던진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체인지업 같은 공이죠.”
메이저리그의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인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체인지업이 그러했다.
본래 체인지업의 목적이 타자의 타이밍을 어긋나게 해서 히팅 포인트를 빗나가게 함으로써 땅볼을 유도하는 것이었지만,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그 수준을 넘어 타자의 배트를 피해감으로써 헛스윙을 유도해 삼진을 잡아냈다.
“이진용 선수의 체인지업은 2단계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죠.”
이진용의 체인지업은 이 세 단계 중 2단계였다.
결과가 증명해줬다.
이진용의 체인지업 앞에서 타자들의 배트는 전부 땅볼만을 만드는 부지깽이가 되었다.
“내가 이걸 누구에게 가장 먼저 들었는지 아나?”
이런 정범석 감독의 체인지업에 대한 지론은 사실 그가 처음 만든 게 아니었다.
“누구입니까?”
“김진호.”
“아.”
김진호.
메이저리그의 지배자라 불렸던 한국 역사상 그리고 메이저리그 역사 속에서도 길이 남을 위대한 투수.
“그가 내게 이것을 말해줬지. 그리고 나는 그를 대신해 다른 이들에게 말해주는 중이고.”
“대단한 지론이군요.”
김정호 투수코치는 짧게 감탄했다.
그 감탄과 함께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진용 선수와 체인지업에 대해 이야기하신 겁니까?”
정범석 감독은 대답 대신 눈을 살짝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김정호 투수코치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럼 이진용 선수를 선발하실 생각이십니까?”
고양 스타즈의 선수 선발 권한은 오롯하게 정범석 감독에게 있는 상황.
그가 뽑고자 한다면 누구든 고양 스타즈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고, 그가 원치 않는다면 그 누구도 고양 스타즈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일단 다시 한 번 오늘 테스트 결과를 점검해야지. 그리고 내일 2차 테스트도 결과도 봐야 하고.”
때문에 정범석 감독은 확답을 뱉지 않았다.
선수 선출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이런 둘 뿐인 자리에서 나눌 것이 아니라 트라이아웃이 끝난 이후 모든 코칭스태프가 모인 자리에서 해야 마땅한 이야기였으니까.
“분명한 건 우리가 선수를 뽑을 때 추구해야 하는 건 두 가지라는 점이지.”
대신 명심해야 할 말만 뱉었다.
“프로에 갈 수 있는 선수를 프로로 가게 하는 것과 프로에 갈 수 없는 선수에게 더 이상 프로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못하게 못을 박는 것.”
“그렇지요.”
그 말을 끝으로 정범석 감독과 김정호 투수코치가 그라운드의 지원자들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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