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126
1.
어느 때보다 무더웠던 8월이 끝나고 9월이 시작됐다.
그리고 한국프로야구 정규시즌의 마무리 질주도 시작됐다.
[독스, 고춧가루 투척 시작!] [타이탄스, 이 기세로 포스트시즌을 노리다!] [돌핀스와 엔젤스, 1위 경쟁 시작!]사실상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된 팀들은 유종의 미라는 이름의 고춧가루를 뿌리기 시작했고,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시권인 팀들은 어떻게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 위한 필사의 질주를 시작했으며, 포스트시즌 진출권인 팀들은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인 도망자가 되었다.
치열한 전쟁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전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두가 주목하는 건 오로지 하나, 그야말로 원맨쇼를 펼치고 있는 이진용의 활약뿐.
말 그대로 원맨쇼였다.
선발로 등판하는 날에는 여지없이 완봉승을 챙기는 선봉장이 되었고, 마무리투수로 마운드에 서는 날이면 팀의 승리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그렇게 이진용은 자신이 세운 기록을 통해 모두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 이호우가 어떻게든 엔젤스 우승시키려고 하네.
– 엔젤스 우승시키려고 작심한 듯.
– 엔젤스 우승하면 잠실구장에 이호우 동상 세워야 함.
ㄴ 동상 같은 소리하네, 종교 만들어야지. 호우교.
어떻게든 팀을 우승시키겠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실에 불타오르지 않을 엔젤스 팬은 없었다.
“엔젤스 파이팅!”
“나 벌써 유광잠바 입었다!”
엔젤스 팬들은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심지어 여전히 기온이 30도를 넘는 와중에도 두터운 엔젤스의 유광 점퍼를 입고 땀을 줄줄 흘리며 응원을 하는 모습마저 보여주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페넌트레이스 1위! 한국시리즈 직행까지 가는 거다. 알았지?”
“호우!”
20년이 넘도록 이룩하지 못한 숙원, 우승이란 달콤한 숙원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사실 앞에서,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믿을 수 있는 에이스와 함께 한다는 사실 앞에서 엔젤스의 모든 선수들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불태울 준비를 마쳤다.
결국 9월 10일, 엔젤스는 해냈다.
– 게임 끝! 엔젤스가 오늘 경기 승리로 드디어 돌핀스를 제치고 리그 1위를 차지합니다.
– 대단하네요. 엔젤스, 정말 대단하네요.
엔젤스, 그들이 리그 1위를 달성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곳에 올랐다.
“드디어 1위다!”
“정규시즌 첫 1위다!”
그 모습에 엔젤스 선수단이 모두가 기쁨에 몸부림을 쳤다.
– 싸하다.
단 한 명만 빼고.
– 느낌이 싸해.
김진호, 그가 엔젤스로부터 위기의 냄새를 맡았다.
2.
[구속이 증가합니다.]
“흠.”
1만 포인트를 소모해 돌린 골드 룰렛에서 구속이 나오는 순간 이진용은 조금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능력치 창을 활성화했다.
– 최대 구속 : 141
– 보유 구종 : 포심 패스트볼(S), 투심 패스트볼(S), 스플릿 핑거 패스트볼(S), 컷 패스트볼(B), 체인지업(B), 슬라이더(S), 커브(B).
– 보유 스킬 : 심기일전(D), 일일특급(D), 라이징 패스트볼(A), 마법의 1이닝, 무쇠팔(C), 리볼버, 컨트롤 마스터(A), 철인, 에이스, 철마(A), 전력투구, 마구(E), 스위칭(B), 수호신
자신의 능력치를 보는 이진용의 머릿속으로 자신이 첫 세이브를 거두던 날, 그날 랜덤 보너스로 얻은 다이아몬드 룰렛이 힘차게 돌아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얻은 볼 마스터가 있어도 쓸 수가 없네.’
그날 다이아몬드 룰렛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니라 볼 마스터였다.
당연히 대박이었다.
“A랭크 구질이 있어야 볼 마스터를 써먹을 수 있는데 어떻게 하나가 안 나오냐.”
그러나 현재 A랭크 구질이 없는 이진용 입장에서는 볼 마스터로 구질 랭크를 마스터 랭크로 만들 수가 없었다.
“에휴,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이진용이 볼멘소리를 내뱉는 이유였다.
물론 배부른 소리였다.
김진호가 이 배부른 또라이 새끼가! 그리 호통을 쳐야 마땅한 소리.
당연히 이진용은 기다렸다. 김진호의 그 푸념이 나오기를.
‘왜 이렇게 조용해?’
그러나 예의 나왔어야 할 김진호의 호통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이진용이 김진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자세를 잡은 채 고민하는 김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김진호 선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응? 아, 별거 아니야.
“벌거 아닌 것치고 표정은 진지하던데요? 그렇게 진지한 표정 짓는 거 처음 봤어요.”
– 나 원래 진지한데? 내 메이저리그 별명이 하드 보일드였는데?
그 말에 이진용이 콧방귀를 뀐 후에 대답했다.
“예, 그러시겠죠.”
– 너 내 말 못 믿어?
“믿습니다. 믿는다고 합시다. 그래서 무슨 생각하신 거예요?”
– 느낌 싸해서 말이야.
“느낌이 싸하시다고요?”
– 응, 그래서 엔젤스에 안 좋은 일이 터진다면 어떤 일이 터질까, 그거 생각해봤어.
그제야 이진용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아주 그냥 저주를 퍼부으시네요.”
– 내가 언제 저주를 퍼부었어?
“리그 1위를 한 팀보고 안 좋은 일 터질 것 같다고 하는 게 저주이지, 그럼 뭡니까?”
– 아니, 느낌이 싸하다니까. 야! 그리고 내가 저주를 걸 수 있었으면 넌 이미 트럭에 치인 후에 이세계에서 호빗으로 환생한 후에 금반지 하나 부수려고 목숨 걸고 용암으로 가는 주인공 옆에 있는 부하로 뒈지게 고생하고 있었어!
“예, 김진호 선수는 골룸이 되어서 절 괴롭히겠고요. 그러고 보니 생긴 것도 비슷하네요.”
– 야! 난 레골라스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오크 캐릭터 중에 레골라스라는 이름 가진 캐릭터는 없는데요? 아, 그러고 보니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트롤 중에 레골라스 비슷한 이름은 있었던 것 같네요!”
– 에이, 진짜! 야, 나 미국에서는 미남이거든? 하긴, 할리우드는커녕 충무로도 가본 적 없는 놈이 뭘 알겠어.
“어쨌거나 한국에서는 미남이 아니라는 거죠?”
– 닥쳐!
그 주제에 대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 여하튼 1위 했다고 마음 놓지 마.
김진호 역시 안 좋은 느낌을 굳이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이제 엔젤스에게 남은 건 내려가는 일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김진호가 이진용에게 진심 어린 경고를 끝으로 화두를 바꾸었다.
– 그보다 진용아, 볼 마스터 어떻게 하냐? A랭크 구질이 없으면 쓸 수가 없는데? 응?
“에이, 진짜.”
– 아이고, 아깝다! 너무 아까워서 눈물이 나오네.
3.
그럴 때가 있다.
경기 도중에 갑자기 등골이 싸늘하게 식을 때가.
그리고 그런 느낌을 받을 때면 언제나 그라운드에서 사고가 일어나고는 한다.
– 아.
‘아.’
이진용과 김진호가 그 싸늘함을 동시에 느낀 건 9월 12일, 이제는 2연전 단위로 치러지는 잔여경기 위해 대구구장을 찾은 날, 5회 말 오늘 레이번스 전의 선발투수로 나온 벤자민이 타자의 배트를 쪼개고도 남을 정도로 묵직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빠각!
그 순간 타자의 배트가 쪼개졌다.
그리고 그렇게 쪼개진 배트 조각이 그대로 마운드를 향해 물수제비처럼 날아갔다.
“Oops!”
벤자민이 기겁하며 마운드 위에서 펄쩍 뛰며 배트 조각을 간신히 피해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쿵!
누가 보더라도 묵직한 소리와 함께 벤자민이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그렇게 벤자민이 넘어지는 순간, 그 무렵에는 경기를 보는 대부분의 이들이 느낄 수 있었다.
‘좆됐다.’
벤자민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박 코치!”
“예!”
곧바로 코치들과 통역사가 마운드를 향해 전력을 다해 뛰어갔다. 그와 동시에 대기 중인 의료반도 언제든 그라운드로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를 시작했다.
그 모습에 대구구장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벤자민 부상이야?”
“아니, 여기서 벤자민 부상이면 어떻게 해?”
“미치겠네.”
그 어수선함 속에서 엔젤스 팬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점차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선수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벤자민이 부상?’
‘아니, 어떻게 이렇게 부상이 나오나?’
현재 엔젤스의 2선발로 후반기 들어 호투를 펼치는 벤자민이 부상으로 이탈한다는 것은 단순히 선수 한 명이 빠지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더욱이 지금 엔젤스는 2위인 돌핀스와 간신히 1게임 차 리드한 1위를 지키는 중이었다.
언제든 따라잡혀도 이상할 것 없는 게임 차.
‘벤자민 빠지면 골치 아픈데······.’
‘아니, 하필이면 이제 10경기 좀 넘게 남긴 상황에서 부상이라니······.’
그때 대기하던 의료반이 들어왔다.
‘아!’
‘이런······.’
구급차와 함께.
그렇게 그라운드를 가로지르며 등장한 구급차를 보는 순간 엔젤스 선수들은 물론 돌핀스 선수들조차 침을 삼켰다.
‘큰 부상인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네?’
‘어휴, 몸조심해야지. 남 일이 아니야, 남 일이.’
부상.
그 단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프로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기에.
– 공포가 번지는군.
그 사실에 김진호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이진용이 그런 김진호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보다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 말 그대로야. 부상에 대한 공포가 번지고 있어.
말을 하는 김진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지금 김진호의 눈에 비친 현 상황이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다는 증거였다.
– 위험해. 이대로 부상에 대한 공포가 번지면 모두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잖아? 여기서 4주짜리 부상당하면 사실상 시즌 아웃이야. 아니, 4주가 뭐야? 3주짜리만 나와도 끝. 너도 알겠지만 그냥 살짝 발목만 삐어도 3주다.
삐끗만 해도 시즌 아웃.
그 사실에 이진용은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거 위험하다.’
지금 엔젤스는 한국시리즈 직행도 가능한 상황, 2위를 하더라도 플레이오프 진출은 확정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즌 아웃을 당한다?
그건 곧 한국시리즈 무대에 갈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의미.
어쩌면 프로 생활 동안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를 고작 발목 삐끗한 것으로 그냥 병상에서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몸을 사리지 않을 리가 없다.
‘위험해.’
그렇기에 이진용은 김진호가 한 말의 의미를, 이것이 위험하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몸 사릴 때가 아니야.’
그런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을 만큼 1위라는 것은, 우승이란 것은 가소로운 게 아니었으니까.
당장 지금 돌핀스 선수들은 1위를 다시 쟁탈하기 위해 거의 미쳐 날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순간 무언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 최악이지. 여기서 선수들한테 부상 입어도 되니까 허슬 플레이하라는 말을 누가 할 수 있겠어? 네가 할래? 아무도 못 해. 감독도 못 해. 심지어 구단주도 못 해.
그렇기에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는 엔젤스를 수십 년간 괴롭혔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 벤자민 부상? 어 이거?
– 킁킁, 냄새가 난다.
– 드디어 왔구나.
– 떨어질!
ㄴ 팀은!
ㄴ 떨어진다!
떨어질 팀은 떨어진다.
엔젤스를 20년 넘게 괴롭히던 악몽이 시작됐다.
4.
야구란 오묘하다.
기적과도 같은, 거의 8할을 넘는 승률을 거두는 팀도 막상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7할은커녕 6할대의 승률을 간신히 유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마저도 대단한 일이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들 중 대부분은 5할 중반의 승률을 기록한다.
달리 말하면 8할 승률을 기록한 팀은 필연적으로 더 낮은 승률을 기록하는 구간이 있다는 것.
– 이도섭 선수가 결국 무너집니다.
엔젤스의 9월은 그랬다.
– 경기 끝! 엔젤스가 오늘 패배를 추가하며 4연패에 빠집니다!
그칠 줄 모르는 연승 행진을 거듭하던 엔젤스가 4연패란 뼈저린 패배를 경험했다.
패인은 간단했다.
– 엔젤스는 어떻게 약팀이 되었는가?
ㄴ 떨어질 팀은 떨어진다.
투타의 붕괴.
그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문제점은 없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아니, 어떻게 할 때가 아니었다.
– 그보다 이도섭 어떻게 해야 함?
ㄴ 어떻게 하긴, 그냥 데리고 가야지.
ㄴ 후반기 내내 잘 던진 투수를 고작 한 경기 부진했는데 2군 보내는 게 웃긴 일이지.
앞선 후반기 동안 놀라운 피칭을 보인 선발투수들을 고작 한 경기 부진했다고 2군으로 보낸다?
후반기 동안 맹타를 휘두른 주전 타자들을 대여섯 경기 부진했다고 2군으로 보내거나,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특타 훈련을 시킨다?
그것도 체력이 한계에 다다라, 이제는 정신력 싸움이 되어버린 시즌 후반에?
페넌트레이스를 2주 남긴 상황에서, 2주 후에는 포스트시즌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당연한 말이지만 엔젤스는 여기서 무모한 비상식 대신 합리적인 상식을 택했다.
“가장 중요한 건 부상을 피하는 거다. 최선을 다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말도록.”
1위를 노리되, 부상을 최대한 조심하면서 포스트시즌을 준비하는 것.
그 사실은 곧바로 코칭스태프를 통해 선수단에 전달됐고 선수들은 받아들였다.
“다들 명심해! 정규시즌도 중요하지만 포스트시즌이 더 중요해! 괜히 무리해서 몸 다치지 말고!”
“아픈 곳 있으면 바로 말해! 참고 뛰지 말고!”
당장 전력으로 질주하기보다는 잠시 자리에 앉아서 신발끈을 고치고 스트레칭을 하는 것을 택했다.
오직 한 명.
– 진용아, 내가 뭐라고 했지?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가는 건 드라마라고 하셨죠.”
– 너 드라마 찍고 싶어?
이진용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 그럼?
당연히 이진용은 이대로 상황이 돌아가도록 놔둘 생각도 없었다.
“고질라가 등장해서 전부 때려 부수는 블록버스터를 찍어야죠.”
5.
9월 16일 토요일.
잠시 가을이 오나 싶었으나, 갑자기 오르기 시작한 기온 탓에 바깥 외출이 탐탁지 않은 날.
그러나 잠실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럴 때 이렇게 두 팀이 붙네.”
“이번이 이번 시즌 마지막 매치지?”
“그렇지. 이번 시리즈가 이번 시즌 마지막 천당지옥 매치지.”
엔젤스 대 데블스, 데블스 대 엔젤스.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프로야구 라이벌 매치, 그것도 이번 2017년 한국프로야구 정규시즌의 마지막 라이벌 매치를 앞두고 야구장을 찾아오지 않을 팬은 없었으니까.
없다면 그건 팬이 아닐 터.
더욱이 현재 두 팀은 나란히 리그 2위와 3위를 기록 중이었다.
게임 차는 4게임 차로, 엔젤스가 충분히 여유 있는 리그 2위를 지키는 중이지만 이번 주말 2연전을 데블스가 전부 가져간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결정적으로 오늘 매치는 단순한 매치가 아니었다.
“드디어 이호우 경기를 예매했다!”
“이제 나도 호우 좀 지르겠구나.”
이진용의 선발등판 경기!
그의 등판을, 전설의 한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뜨거운 9월 토요일의 밤을 잠실구장에서 보낼 가치는 충분했다.
물론 데블스 팬들 역시 나름 기대감을 품었다.
“뭔가 나오면 이럴 때 나오겠지.”
“요즘 데블스 타자들 타격감도 좋으니까. 반대로 엔젤스 애들 맛탱이가 갔잖아?”
“뭔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여기서 이진용 상대로 이기진 못하더라도 1점만 뜯어내도 대박이지.”
“아무렴, 져도 본전. 오히려 이런 경기가 기대될 수밖에 없다니까.”
최근 기세가 떨어지다 못해 추락하는 엔젤스, 그런 엔젤스의 이진용을 공략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밖에 없다고.
언론도 그 사실을 부추겼다.
그동안 잠잠했던 언론들이 이진용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언론은 데블스를 보다 필사적으로 만들었다.
이대로 순위가 굳어진다면 3위인 데블스는 준플레이오프부터 포스트시즌을 치르게 되며, 준플레이오프에서 승자가 되면 플레이오프에서 2위인 엔젤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5판 3선승제인 플레이오프에서 이진용을 데리고 있는 엔젤스를 상대로 데블스가 이진용을 넘지 못한다면 사실상 한국시리즈 진출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데블스 입장에서는 지더라도 최소한 이진용을 공략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야 할 때.
“전력으로 붙어라!”
“죽어도 뭐든 알아내고 죽어!”
데블스 입장에서는 어느 때보다 필사적인 각오를 품은 상황이었다.
그 각오가 선수들을 취재하러 나온 기자들 눈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어휴, 장난 아닌데요?”
후배 기자의 말에 황선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황선우는 속으로 감탄했다.
‘작년 우승팀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나올 줄이야.’
사실 이번 시즌 황선우는 데블스를 작년만 못하다고 평가했다.
우승을 했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감이 구단 전체에 팽배한 탓이었다.
구단 자체도 이미 우승이란 업적을 세운 선수들에게 무리를 강요하지 않았다.
데블스의 이번 시즌 목표가 포스트시즌 진출 정도였다는 건 기자들이면 다 아는 이야기.
당연히 데블스 선수단은 시즌 내내 무리한 경기 운영보다는 합리적인 운영을 꾀했다.
‘시즌 초반부터 이랬으면 1위는 데블스 차지였겠지.’
그것이 작년 우승을 한 전력을 그대로 보존한 채로 이번 시즌 3위, 4위 경쟁을 하는 이유였다.
‘어쨌거나 지금 데블스는 정말 강하다.’
그런데 지금 데블스가 한국시리즈 때처럼,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엔젤스 입장에서는 최악의 위기로군.’
반면 엔젤스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연패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원래 엔젤스는 이번 시즌 전반기에만 해도 연패를 밥 먹듯이 하는 팀 중 하나였다.
‘엔젤스는 무리할 생각이 없다.’
문제는 연패를 당한 후의 마음가짐.
그전의 엔젤스는 연패를 당하면 어쨌거나 몸부림을 쳤다.
‘무리할 이유도 없고.’
그러나 지금 엔젤스 입장에서는 고작해야 열 경기 조금 넘게 남은 현 상황에서 데블스를 상대로 무리하게 싸울 필요가 없었다.
‘하물며 이진용 경기라면 더더욱.’
결정적으로 이진용에 대한 엔젤스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당연히 엔젤스의 모든 이들은 이진용이 1승을 거둘 것이고, 그 후에 1패를 거둔다면, 데블스와의 2연전을 1승 1패로 거둔다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고역도 없지.’
하지만 기적이 언제나 엔젤스의 것이란 보장은 없는 법.
‘여기서 만약 정말 데블스가 이진용을 무너뜨린다면······ 장담컨대 엔젤스는 절대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지 못한다.’
더욱이 데블스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작년 시즌 한국시리즈 우승팀이었다.
엔젤스, 우승을 맛본 지 20년이 훌쩍 넘은 그들과 다르게 우승을 뜯어먹을 줄 아는 팀이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 황선우는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진용이 정말 엔젤스를 우승시키고 싶다면, 오늘 어떻게든 반전을 꾀해야 한다. 여기서 그냥 평범한 1승을 거둔다면, 그 후에는 이진용이 무슨 짓을 해도 반등은 없다.’
오늘 경기가 이진용이 엔젤스를 반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그리고 정말 그 이야기대로, 구은서 운영팀장이 엔젤스 우승을 조건으로 이진용에게 무조건 방출을 약속했다면······ 여기서 이진용이 어떻게든 움직이겠지.’
그렇게 엔젤스의 운명이 걸린 경기가 시작됐다.
6.
1회 초.
아무도 밟지 않은 마운드, 그 위로 한 사내가 걸음을 내디뎠다.
자그마한 체격 그러나 그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아우라를 만들어낸 투수.
이진용, 그가 마운드에 올라섰다.
옆구리에 글러브를 낀 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왼쪽 타석을 향해 타자가 슬금슬금 몸을 풀며 걸어갔다.
데블스의 1번 타자 최정훈.
이진용의 왼손을 최초로 상대했으며, 최초의 제물이 되었던 그는 타석에서 이진용이 오른손에 글러브를 끼는 순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냐, 오늘 사생결단을 내자.’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 이 경기에서 최정훈은 순순히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벼랑 끝, 그곳으로 자신을 몰아세웠다.
그리고 그것은 이진용을 바라보는 데블스 선수단 모두의 심정이기도 했다.
오늘 데블스 타자들은 이진용을 상대로 벼랑 끝 승부를 할 생각이었다.
이기지 못한다면 그대로 그냥 벼랑 너머로 자신들의 몸을 내던질 속셈이었다.
사즉생 생즉사!
그 각오를 품은 데블스 선수단의 눈빛은 서슬이 퍼렇기 그지없었다.
“플레이 볼!”
그 서슬 퍼런 살기 속에서 드디어 게임이 시작됐다.
이진용, 그가 초구를 던질 준비를 했다.
‘응?’
그 무렵이었다.
‘저거?’
데블스 더그아웃에 있던 눈 좋은 선수들이 이진용으로부터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건.
펑!
그렇게 이진용이 왼손으로 던진 초구가 그대로 포수의 미트에 꽂혔다.
구속은 147킬로미터.
그러나 데블스 더그아웃의 선수들의 눈은 그런 이진용의 구속이 찍힌 전광판을 향하지 않았다.
“저거 그거지?”
“맞아. 좌완투수용 글러브야. 양손 글러브가 아니야.”
이진용, 그가 오늘 경기에 임하는 각오만을 바라볼 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