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128
12.
9월 30일.
호우우!
잠실구장으로 이제는 팬들이 호울링이라고 부른 엔젤스만의 승리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오늘 승리로 엔젤스가 자신들의 매직 넘버를 제로로 만들었습니다. 예, 이번 한국프로야구 2017시즌 페넌트레이스의 1위는 엔젤스입니다!
엔젤스가 남은 잔여 경기의 승패와 상관없이 정규시즌 1위를 찍은 것에 대한 환호성이었다.
“드디어 1위다!”
“한국시리즈 직행이다!”
20년 넘게 쌓아왔던 울분의 분출이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울분이 그저 함성 몇 번 내지르는 것으로 끝날 리 만무했다.
잠실구장을 가득 채운 2만 명의 엔젤스 팬들.
검고 붉은 엔젤스의 유광 점퍼를 입고 있는 그들이 모두가 소리 내어 내뱉었다.
“승리의 함성을 다 함께 외쳐라!”
엔젤스의 응원가를 힘차게 토해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날을 선물해준 이의 이름을, 이제는 영웅을 넘어 전설이 되어 마땅한 이름을 부르짖었다.
“호! 우! 호! 우!”
그 무렵이었다.
이제까지 더그아웃에서 잠자코 있던 자그마한 체격의 사내가 그라운드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쌀쌀해진 날씨, 가을 날씨에 어울리는 두꺼운 유광 점퍼를 입고, 엔젤스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등장한 사내는 느릿한 걸음 속도에 자신을 덮고 있는 것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점퍼의 지퍼를 내리는데 세 걸음, 점퍼를 벗는데 네 걸음 그리고 모자를 벗는데 두 걸음.
마치 패션쇼를 하는 듯한 그 모습에, 그 패션쇼 끝에 얼굴을 드러낸 이진용을 향해 엔젤스 팬들은 소리쳤다.
“호우!”
그리고 이진용은 그러한 팬들의 환호에 미소를 지은 채, 모자를 쥔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김진호는 말했다.
– 쇼를 한다, 쇼를 해.
명백한 비아냥거림.
그러나 그 비아냥거림을 내뱉는 김진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뭐, 그래도 이 느낌은 좋네. 심장이 벅차오르는 이 느낌.
그 미소를 지은 채 김진호는 기나긴 전쟁의 승자가 된 이들을 바라봤다. 뛸 리 없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김진호 선수 덕분입니다.”
그런 김진호의 귀로 이진용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김진호는 피식 웃었다.
– 그래, 내 덕이지.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 해 인마.
이진용은 대답 대신 씨익 미소를 지었다.
– 그래서 준비는?
그리고 이어진 김진호의 질문에 이진용은 미소를 지은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
“당연히 끝났죠.”
– 좋아, 그럼 10월 3일 개천절에 한 번 날뛰어보자.
“예.”
이진용, 그의 정규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3.
김진호는 말했다.
– 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언제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 출전시켜달라고 했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후반기 시작 전에 감독을 찾아가서 분명하게 말했어. 로테이션을 어떻게 짜든 알 바 아닌데, 포스트시즌 일정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이면 무조건 마지막 경기에는 날 출전시켜달라고.
페넌트레이스, 그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 경기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으로 그리고 존재로 장식하고 싶었다고.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인 일이었다.
– 유종의 미?
페넌트레이스의 마지막 무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만약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면 그해에 팬들 앞에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무대를 자신의 이름과 투구로 수놓을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유종의 미라는 표현이 그 무엇보다 어울리는 일이었다.
– 야, 진용아. 넌 내가 유종의 미 같은 거 좋아하는 놈으로 보이냐? 응?
물론 김진호는 그런 이유로 마지막 경기에 나오는 게 아니었다.
– 내가 말했지? 이 바닥에서는 이미지가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그렇잖아? 동네 지나가는 똥차에도 벤츠 마크 박히면 특별해 보이는 것처럼, 야구도 마찬가지야. 처음과 끝에 남는 인상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지. 그래서 마지막에 나오는 거야.
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 그리고 말이야 생각해 봐. 시즌 최후의 경기가 어떨 것 같아? 응? 정말 온몸을 불사르다 못해 이번 시즌 끝나고 그냥 시즌 아웃될 기세로 뛸까? 포스트시즌 진출이 걸려 있다면 그러겠지. 하지만 시즌 최후의 경기에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지우지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잖아? 그래, 다들 대충 뛴단 말이야.
그리고 꿀을 빨기 위해서.
말 그대로였다.
– 엔트리도 그래. 확장 로스터 시행되면서 마이너에서 데려온 애송이들만으로 엔트리를 짜는 경우가 다반사지. 날 상대해본 적 없는 마이너 애송이들이 1번부터 9번까지 있는 거야. 최소한 삼진 열다섯 개는 챙길 수 있지. 방어율도 떨어뜨리고 완봉은 보너스이고.
최후의 경기는 승패의 값어치가 어느 때보다 무가치한 그 경기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 그렇게 마지막 경기에서 탈삼진 17개 정도 잡고 완봉승으로 시즌 마쳐봐. 시즌이 끝난 겨울 동안 선수들이 모이면 십중팔구는 내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온몸을 떨 테니까.
그런 김진호의 조언을 들은 이진용은 당연한 말이지만 일찌감치 감독을 찾아가 말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 출전시켜달라고.
물론 즉답을 받은 건 아니었다.
미스터 제로,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다시는 나오지 않을 방어율 0점의 투수를 굳이 최후의 시험대에 올릴 이유가 없다는 것.
그 리스크를 엔젤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엔젤스의 홈경기가 아닌 샤크스의 홈경기에서 짊어질 이유가 없다는 것.
엔젤스 코칭스태프는 물론 구단 전체가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답변이 나왔다.
10월 3일 개천절.
이진용, 그가 엔젤스의 정규 시즌 마지막 무대에 올라섰다.
14.
10월 3일.
이제는 날씨가 제법 쌀쌀한 가을이 온 듯, 해가 꺼진 문학구장은 무척 추웠다.
“어휴 춥다. 이제 진짜 가을이네.”
“며칠 지나면 바로 겨울이지.”
“이렇게 추운데도 거의 만원 관중이라니.”
그러나 그렇게 추운 문학구장은 오히려 평소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관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 솔직히 말해서 티켓 판매량이 많을 순 없는 경기였다.
더욱이 오늘 경기의 승패는 이제 정해진 정규시즌 순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현재 리그 5위인 샤크스는 승패와 상관없이 4위인 타이탄스와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앞두고 있었고, 리그 1위인 엔젤스는 당연히 한국시리즈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좀 더 들어가면 이미 한국시리즈가 확정된 엔젤스는 무리할 필요가 없는 경기였고, 샤크스 입장에서도 와일드카드 전을 앞두고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전력을 추스르는 것이 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양 팀 다 투수 자원은 최대한 아끼면서, 타자들 역시 컨디션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경기.
그 증거로 오늘 샤크스의 선발이 이번 시즌 선발로는 단 2경기만 던진 루키, 김진호라는 것이 증거였다.
“김진호가 선발이라······ 참 재미있어.”
“벌써 김진호가 죽은 지 십 년이 넘었네.”
물론 그 김진호는 메이저리그의 지배자였던 그 김진호가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의 지배자라 불리었던 김진호와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이었다.
“지금 샤크스 김진호가 딱 김진호 키드이지. 지금 고졸로 막 들어온 1,2년 차 애들이 태어났을 때가 김진호가 메이저리그를 막 폭격하기 시작할 때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러면 저기 김진호는 막상 김진호 경기는 못 봤겠네?”
“김진호가 죽기 전에 초등학생이었을 텐데 뭘 알았겠어? 그냥 아버지가 김진호 경기보다가 김진호 이름 말하면, 깜짝 놀라서 거실로 나오고 그랬겠지.”
“세월 참 빠르다.”
어쨌거나 그런 경기임에도, 결과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경기임에도 문학구장은 꽤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당연히 샤크스의 김진호를 보기 위해 온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이진용하고 김진호하고, 과연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지.”
이진용.
오늘 엔젤스 선발로 출전하는 그가 문학구장을 채운 관중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한 장본인이었다.
“당연히 김진호가 이기지. 규격이 다르잖아? 김진호는 9회에도 160짜리 공을 던지던 괴물이라고.”
“야, 이번 정규시즌 무실점으로 마친 괴물이 당연히 더한 괴물이지. 김진호도 방어율 0점으로 시즌은 못 끝내.”
기어코 무실점으로 정규시즌을 마칠 듯한,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다시는 없을 방어율 0점 투수가 된 이진용의 정규시즌 마지막 피칭을 본다는 것은 전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그렇기에 문학구장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진용의 마지막을 기사로 쓰기 위해서.
“그보다 왜 굳이 이진용을 내보낸 걸까? 경기 감각을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오늘 경기랑 한국시리즈 1차전까지 텀이 너무 길잖아? 나오나 안 나오나 별 차이는 없을 텐데?”
“여기서 실점하면 그것도 나름 대단한 일이겠지. 미스터 제로가 미스터 영점일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의문이지. 그런 리스크를 부담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역사적인 기록을 기사로 쓰기 위해서.
그런 이유로 모인 무리 속에는 당연히 이번 시즌 누구보다 이진용의 경기를 많이 봤던 황선우도 있었다.
“마지막 경기에 나온다······ 그가 떠오르는군.”
“그렇지?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데.”
더불어 변형채 전력분석팀장 역시 문학구장에 있었다.
“김진호가 저랬지. 포스트시즌 일정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면 로테이션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경기에는 무조건 나왔지.”
“이유도 대단했지. 마지막 경기에 나와서 아주 그냥 상대를 짓뭉개는 인상을 남기려고.”
“김진호다운 이유였지. 그 어떤 이유보다 합리적이고 효과적이고 위력적인 결과물을 원했으니까.”
그런 그 둘은 아득했던 날의 기억을 추억했다.
“아마 이진용이 올라온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맞아, 이진용은 김진호와 비슷한 야구를 하니까.”
그 추억 덕분이었다.
“재미있겠군.”
“글쎄, 재미있다기보다는 아주 잔인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1.5군을 내보낸 샤크스. 반대로 그런 샤크스 앞에 등장한 건 오늘 작정하고 학살을 하려고 선발을 자처한 이진용.”
그 둘은 오늘 경기가 어느 때보다 일방적인 경기가 되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한 건 이진용이 마운드에 올라올 때 미소를 지으리란 거겠지.”
“아무렴. 아마 그 어느 때보다 큰 함박웃음을 지을 거야.”
그리고 그 예상대로였다.
1회 초, 샤크스의 선발로 나온 김진호가 이미 2실점을 한 채 마운드를 내려갔을 때, 마운드에 올라오는 이진용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풉.”
심지어 그는 웃음소리마저 흘리고 있었다.
“김진호라니······ 풉!”
– 야! 김진호라는 이름이 어때서! 아주 그냥 남자답고 위대한 영웅 같은 이름이네!
“풉.”
– 웃어? 지금 웃어?
“풉풉.”
– 지금 웃음이 나오냐?
“예, 너무 웃음이 나와서 공 못 던질 정도입니다.”
– 너 이 새끼, 못 던지기만 해봐!
김진호의 그 경고에 이진용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김진호한테는 못 지죠. 아무렴, 김진호한테 지면 나가 뒈져야지.”
그 말과 함께 마운드에 선 이진용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전력투구.”
초전박살.
그 의지를 품은 그 말에 김진호가 샤크스 더그아웃에 고개를 푹 숙인 김진호를 향해 소리쳤다.
– 젠장, 김진호 파이팅!
그렇게 이진용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다.
15.
리그 1위 팀.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는 무조건 넘어야 하는 팀.
당연한 말이지만 그 팀의 에이스가 나오는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모든 구단의 전력분석관들이 모였다.
홈경기를 치르는 샤크스는 물론 4위 타이탄스는 당장 와일드카드 상대인 샤크스 탐색을 위해서 평소의 곱절이 되는 인력을 파견했고, 3위인 데블스 역시 라이벌 팀의 에이스를 탐색하기 위해 보낼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보냈으며, 2위 돌핀스 스카우트들은 그 어느 팀보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그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이진용의 피칭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여기서 이진용에 대한 모든 걸 기록해야 해.’
‘이진용의 숨소리조차 기록으로 남긴다.’
‘이진용이 마운드에서 하는 발짓조차 기록한다.’
이진용.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는 기필코 넘어야 하는 그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모든 전력분석관들이 이진용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그의 숨소리마저 귀를 기울였다.
그런 그들 앞에서 이진용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주저함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줬다.
말 그대로였다.
두 손.
그리고 그 두 손으로 부릴 수 있는 모든 구종.
더 나아가 그 두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스타일의 야구를 보여줬다.
그렉 매덕스처럼 오른손을 이용해 타자를 완벽하게 잡아내는 피칭은 물론 톰 글래빈처럼 스트라이크존의 바깥쪽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피칭과 함께 랜디 존슨을 떠올리게 하는 좌완 강속구와 슬라이더를 던져냈다.
그 피칭을 통해 이진용은 분명하게 말했다.
– 이진용 선수의 피칭을 보니, 이제 더 이상 이 선수와 비교할 수 있는 투수는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 이제는 고인이 된, 한국야구 역사상 그리고 메이저리그 역사에도 길이 남을 김진호 선수만이 이제 이진용 선수의 유일한 비교 대상이라 생각됩니다.
날 상대하고 싶으면 지옥에 있는 김진호라도 데려오라고!
그 호통과도 같은 피칭 앞에서 문학구장에 모인 전력분석팀들이 내린 결론을 하나였다.
‘괴물 새끼.’
‘이 새끼는 답이 없다. 누군가가 이진용의 부모님을 납치해서 실점하라고 협박을 당하지 않는 이상 실점할 일은 없다.’
‘답은 하나, 이진용이 안 나오는 경기를 이기는 수밖에.’
이진용이 나오지 않는 경기에서 승수를 챙기는 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게 한국프로야구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가 끝이 났다.
“오예, 김진호 이겼다! 김진호 별거 아니네. 그렇죠?”
– 닥쳐!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아니, 김진호 별거 아니라니까요?”
– 셧업!
“아, 사실을 말해도 화를 내시네.”
승리투수는 이진용.
패전투수는 김진호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