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161
5.
쿠어스 필드.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인 이곳에 대한 설명은 하나로 충분하다.
투수들의 무덤!
당연한 말이지만 쿠어스 필드에 그런 악명이 붙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일단 쿠어스 필드에서는 다른 구장에서는 홈런이 되지 않는 공이 홈런이 됐다.
그건 쉽게 비유하자면 학교에서는 정답이라고 배운 것이 수능에서는 오답 처리가 되는 것과 비슷했다.
어찌할 방법도 없다.
그저 미치는 수밖에.
더욱이 이건 앞서 말했듯이 악명이 붙은 이유 중 하나에 불과했다.
– 다저스타디움에서 개박살이 난 상태에서 쿠어스 필드 원정이라니, 지옥이 따로 없군.
– 그런데 왜 쿠어스 필드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홈런이 많이 나와서?
ㄴ 홈런이 많이 나오는 건 오히려 별거 아닐 수도 있지. 정말 무서운 건 호흡이 쉽지 않다는 거야.
쿠어스 필드가 투수들의 무덤인 또 다른 이유는 다름 아니라 호흡.
고지대에 위치한 쿠어스 필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저지대에 있을 때보다 호흡이 힘들었다.
당연히 쿠어스 필드는 다른 구장보다 체력 소모는 빨랐고, 반대로 회복은 느려졌다.
다른 구장에서는 신경조차 안 쓰는 산소 호흡기를 쿠어스 필드에서는 서로 쓰기 위해 순번을 정해야 할 정도이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 그리고 패스트볼이 밋밋해지지.
ㄴ 그렇지. 회전수가 감소하니까.
또한 쿠어스 필드에서는 투수들의 시작이자,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패스트볼의 회전수가 감소하면서 구위와 무브먼트가 약해졌다.
타자의 비거리는 늘어나는 상황에서 구위는 약해진다?
악몽과도 같은 일.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그리고 쿠어스 필드는 외야가 엄청 넓다고. 쿠어스 필드가 무서운 건 홈런이 많은 게 아니라, 홈런도 많기 때문이야. 쿠어스 필드에서는 2루타, 3루타 가리지 않고 쏟아지니까.
이런 쿠어스 필드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 당시부터 외야를 넓게 만든 탓에 쿠어스 필드는 외야 수비가 가장 힘든 야구장 중 한 곳이 되어버렸다.
고지대에 위치한 탓에 빠르게 소모되는 체력과 집중력, 다른 구장보다 더 쭉쭉 날아가는 타구 그리고 드넓은 외야.
제대로 된 외야수의 활약을 기대할 수 없는 쿠어스 필드에서는 홈런은 물론 2루타와 3루타가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 선발투수들이 시즌 일정 받으면 가장 먼저 로키스 원정 날짜부터 계산한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지.
– 로키스 투수들은 시즌 일정 받으면 가장 먼저 원정 경기 몇 번 뛰는지부터 계산하고.
그야말로 투수들의 무덤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곳.
– 이 지옥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1회 말, 이진용이 그 무덤 위에 올라섰다.
6.
– 이 지옥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마운드에 올라선 이진용의 귀로 김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 특히 빠른 공 무기로 쓰는 투수들에게는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지. 생지옥이랄까? 물론 구속이 느린 투수들이 유리하다는 건 아니야. 160킬로미터짜리 공을 던지는 놈들이 맞아나가는데, 140짜리 던지는 애들이 무사할 리가 없잖아?
거듭된 김진호의 목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 괜히 투수들의 무덤이 아니야. 아무렴, 무덤이지. 예의상 홈런이라도 맞아줘야 하는 무덤.
하나만 맞아달라고.
– 아! 홈런 보고 싶다!
제발 하나만.
– 진용아, 나 홈런 너무 보고 싶다.
그 간절한 김진호의 기도 앞에서 이진용은 비릿한 미소 사이로 매몰찬 한 마디를 뱉었다.
“존.”
그 말과 함께 이진용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이진용이 이제는 타석에 선 타자를 그리고 포수와 주심을 바라봤다.
그런 이진용의 눈동자 속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기대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보일까?’
이제부터 자신이 보게 될 신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플레이볼!”
그때 주심의 목소리가 이진용의 귓가를 맴돌았다.
베이스볼 매니저의 알림도 들렸다.
이제는 게임을 시작해야 할 때.
‘어?’
– 응?
그러나 이진용이 보는 세상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존? 존? 존!”
이진용의 거듭된 나지막한 외침에도 이진용이 보는 세상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그 사실에 김진호가 양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 버그다! 버그야! 그래,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으하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어느 신이 들어준 거지? 알라? 시바? 누구지? 아무렴 어때.
“어, 이게 아닌데······.”
당황하는 이진용, 그런 그에게 주심이 이제는 피칭을 하라는 사인을 줬고, 결국 이진용이 입술을 깨문 채 투구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게임이 시작됐다.
7.
쿠어스 필드에서는 빠른 패스트볼을 주무기로 쓰는 투수들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달리 말하면 빠른 패스트볼보다는 정교한 컨트롤과 완급조절, 다양한 변화구를 이용하는 피칭은 나름 효과적이라는 의미.
당연히 이진용은 그 쿠어스 필드 무대에서 오른손을 주무기로 이용한 피칭을 준비했다.
타자의 스트라이크존 경계면, 그곳도 그냥 경계면이 아니라 타자 입장에서는 악질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석진 곳만을 노렸고, 그런 이진용의 피칭에 로키스의 타자들은 땅볼로 아웃카운트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아웃!”
– 리! 그가 2회 말에도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으로 여섯 타자 연속 범타에 성공합니다!
– 대단하네요, 정말 아티스트란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컨트롤이네요.
그렇게 2회까지 단 한 명의 출루도 허락하지 않은 채 마운드를 내려오는 이진용의 모습에 로키스 타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예 작정하고 땅볼 잡는 피칭만 하네.”
“컨트롤이 장난이 아니야. 까다로운 코스에만 아주 제대로 찔러 넣고 있어.”
“투심하고 체인지업, 스플리터를 절묘하게 섞어 쓰고 있어. 볼배합이 예측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물론 로키스 타자들의 눈빛에 겁에 질린 기색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뭐, 그래봤자 하나만 걸리면 끝이지.”
“그렇지. 배트에 맞는다는 사실이 지옥인 곳이니까.”
오히려 반대, 로키스 타자들에게는 지금 상황은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쿠어스 필드를 찾아오는 투수들은 투수들의 무덤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대개 비슷한 선택을 했다.
삼진을 잡는 피칭을 하거나, 땅볼을 유도하는 피칭을 하거나.
어떻게든 뜬공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피칭을 했고, 당연히 로키스 타자들은 그런 투수들을 상대로 점수를 얻어내고, 승리를 뜯어내는 방법을 그 어느 구단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공이 눈에 익으면 그때부터는 끝이다.’
‘오늘 리의 구속은 80마일대 후반. 안타도 필요 없다. 적당히만 맞아도 홈런이다.’
그렇기에 로키스 타자들은 서두르지 않은 채 확실하게 사냥을 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좋은 피칭이지만, 로키스 타선은 이런 피칭으로 잡을 수 있는 타선이 아니다.’
‘고작 피칭 스타일 하나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쿠어스 필드가 투수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일은 없었겠지.’
그 사실은 메츠 선수단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진용도 알고 있었다.
“리의 표정이 좋지 못하군.”
“쿠어스 필드잖아?”
“하긴, 쿠어스 필드에서 웃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
그렇기에 이진용이 평소와 다르게 굳은 표정으로 더그아웃으로 오는 모습에 큰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제아무리 이진용이라고 해도 쿠어스 필드에서는 모든 것을 쏟아내고, 모든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매 순간마다 고뇌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실제로 이진용은 고뇌하고 있었다.
‘진짜 버그인가?’
그 고뇌 속에서 이진용이 자신의 상태창을 활성화했다.
– 최대 구속 : 148
– 보유 구종 : 포심 패스트볼(S), 투심 패스트볼(S), 스플릿 핑거 패스트볼(S), 컷 패스트볼(B), 체인지업(S), 슬라이더(S), 커브(A).
– 보유 스킬 : 심기일전(C), 일일특급(C), 라이징 패스트볼(A), 마법의 1이닝, 무쇠팔(B), 리볼버, 컨트롤 마스터(S), 철인, 에이스, 철마(A), 전력투구, 마구(E), 스위칭(B), 수호신
그렇게 활성화한 스킬 어디에도 이진용이 새롭게 습득한 존 스킬은 보이지 않았다.
– 몇 번을 봐도 똑같다니까. 버그야, 버그. 원래 게임하다보면 그러잖아? 버그 좀 걸리고, 그러다가 계정 정지되고······.
그런 이진용의 심정에 김진호가 염장을 질렀다.
그러나 이진용은 그런 김진호에게 짜증조차 내지 못한 채 능력치 창을 말없이 바라만 봤다.
실제로 지금 이진용이 처한 상황은 꽤 심각한 상황이었다.
룰렛을 통해 습득한 스킬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의미.
더 나아가 정말 이것이 버그 같은 문제로 생긴 일이라면 다른 스킬들도 쓰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 진용아.
그런 이진용의 표정에 김진호 역시 더 이상 이진용을 자극하지 않았다.
– 너무 걱정하지 마. 응? 별 문제 아닐 거다. 날 믿어.
오히려 이진용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 위로 속에서 툭 말을 던졌다.
– 어쩌면 타자 스킬이었을 수도 있잖아? 응? 안 그래? 뭐, 안 그럴 수도 있지만.
그 말에 이진용이 놀란 표정을 지은 채 김진호를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이진용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태창을 바꾸었다.
“리! 뭐해? 타격 준비해야지!”
그리고 곧바로 3회 초의 시작을 알리는 타격코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진용의 귀에는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밸런스 : 58
– 선구안 : 78
– 보유 스킬 : 매의 눈(A), 핀치 히터, 클러치 히터, 라스트 찬스(F), 존
“오, 마이 존.”
자신의 상태창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스킬만이 보일 뿐.
8.
3회 초 메츠의 공격은 8번 타순부터 시작됐다.
당연히 9번 타자인 이진용은 3회 초가 시작됨과 동시에 더그아웃이 아닌 대기 타석에서 경기를 봤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선두타자로 나온 8번 타자는 큼지막한 한 방을 노리다가 헛스윙으로 삼진을 헌납했고, 짜증 섞인 눈빛으로 마운드 위의 투수를 노려본 후에 혀를 차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앞서 말했듯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투수가 타자로 나오는 내셔널리그에서는 투수를 뒤에 둔 8번 타자가 큰 것 한 방을 노리는 건 매우 상식적인 일이었으니까.
하물며 쿠어스 필드라면 어느 정도 장타력이 있는 8번 타자가 충분히 홈런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스윙은 좋았다. 타이밍만 맞추면 되겠어.”
때문에 메츠의 벤치 역시 삼진으로 물러나는 타자를 향해 오히려 격려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쿠어스 필드에 만연했던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 역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선두 타자 잡았으니 됐다.”
“호우맨 잡으면 2아웃······ 3회는 쉽게 가겠군.”
1사 상황에서 올라오는 9번 타자가 투수인 상황에서 긴장감이 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터.
더욱이 이진용이 타격에 재능이 있는 건 맞지만, 말 그대로 재능이 있을 뿐이었다.
그저 재능만 있을 뿐 쌓아온 결과가 없는 타자를 두려워할 정도로 메이저리그는 수준 낮은 곳이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장타력이 없는 이진용을 로키스가 두려워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기에 로키스의 배터리는 이진용을 앞에 두고 딱히 특별한 사인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이진용이 타석에 서기만을 기다렸고, 주심 역시 자신의 볼주머니에 볼이 가득한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렇게 포수와 주심이 모인 곳을 향해 이진용이 걸음을 내디뎠다.
특별할 것 없는 광경.
“우와······.”
– 우와······.
그러나 이진용이 타석에 서는 순간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신세계였다.
9.
3회 초 1사 상황.
“스트라이크, 아우우웃!”
그 상황에서 타석에 선 이진용의 성적표는 루킹 삼진이었다.
투수가 던진 투구수는 5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9번 타자로 나온 투수가 최고 94마일까지 나온 패스트볼을 멀뚱히 지켜보다가 삼진을 당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을 메이저리그 팬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까.
– 야, 뭐하는 거야?
하지만 김진호의 시점에서는 달랐다.
– 왜 멀뚱히 공을 보기만 해?
그가 아는 이진용은 어떤 식으로든 내야로 공을 굴리기 위해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였으니까.
그 누구도 아닌 김진호 본인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으니까.
그렇기에 김진호가 아는 이진용은 헛스윙 삼진을 당할지언정 루킹 삼진을 당하지는 않는 타자였다.
– 존도 보이는데?
심지어 조금 전 이진용이 본 풍경은 신세계라는 표현이 부족함이 없는 풍경이었다.
스트라이크존, 야구를 존재케 하는 그 세상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솔직히 말해서 김진호조차 그 광경에 전율을 하느라, 이진용이 루킹 삼진을 당하는 것은 물론 이진용의 볼카운트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주심의 삼진 아웃 콜을 들은 후에야 이진용이 삼진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정도.
그런 김진호의 물음에 이진용은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잖아요?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바로 로또 가지고 은행에 가는 거 보셨어요?”
– 무슨 소리야? 당연히 로또에 당첨되면 당첨금 받으러 은행에 가야지, 뭘 하는데?
“뭘 하긴요, 일단 진짜 이 로또가 당첨된 게 맞는지 확인부터 해야지.”
나지막이 말하던 이진용이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자신이 있던 타석을 바라봤다.
‘확인은 끝났다. 내가 본 건······ 진짜다.’
그러자 이진용의 입가에 어렴풋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배트맨 영화 속에 나오는 조커처럼.
기쁨을 넘어 광기마저 풍기는 미소.
그 미소 사이로 이진용이 말했다.
“아무래도 준비 좀 해둬야겠네요.”
– 무슨 준비?
“인터뷰 준비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