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178
9.
3회 말이 끝나고 시작된 4회 초, 마운드 위에 오타니 쇼헤이가 섰다.
일본에서 온 보물이며, 신의 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는 선수.
– 4회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그 오타니 쇼헤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는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 이번 이닝이 끝나는 잠시 후, 리가 새로운 역사에 도전합니다.
지금 세간의 관심은 오로지 4회 초가 끝난 다음, 이진용이 등장할 때만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 무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오타니 쇼헤이의 피칭은 위력적이었다.
제구가 불안해진 탓에 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지만, 그럼에도 그는 실점 없이 자신의 마운드를 지켜냈다.
메츠 타자들의 탓도 있었다.
‘다음 이닝은 무조건 막아야 해.’
메츠 타자들에게는 4회 초에 집중력을 쓸 여유가 없었다.
‘실책은 죽어도 하면 안 돼.’
‘실책 때문에 실점이 깨지면 더 이상 메츠 유니폼 입고는 메이저리그에서 못 뛴다.’
이제 메츠 타자들이 수비수가 되어 맞이할 4회 말의 아웃카운트 하나는 퍼펙트게임의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잡아야 할 아웃카운트만큼이나 부담스러웠으니까.
물론 야수들 중에서 그 부담감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순간 리가 느끼는 부담감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느끼는 부담감은 리가 느끼는 부담감에 비할 바가 못 되겠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앞에 둔 이진용이 느끼게 될 부담감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당연히 모두가 이진용의 낌새를 살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그리고 4회 초가 끝났을 때, 이제는 이진용이 마운드에 올라야 할 때 세상 모든 이들이 이진용을 주목했다.
다저스타디움을 채운 선수와 관중은 물론 모든 카메라들이 이진용만을 바라봤다.
그 앞에서 이진용이 자신을 바라보는 카메라를 향해 왼손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호우! 호우! 호우!”
그 광경에 메이저리그 야구팬들은 혼란에 빠졌다.
– 저게 뭐야?
– 무슨 의미지?
– 암호 같은 건가?
ㄴ 그냥 장난친 거 찍힌 거 아니야?
물론 한국 야구팬들은 달랐다.
한국 야구팬들은 이진용의 저것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 선호우 나왔다!
– 호우 예보 나왔다!
– 이호우 님이 미리 호우하셨어!
그렇게 이진용의 예고와 함께 4회 말이 시작됐다.
10.
4회 말, 이진용은 글러브를 옆구리에 낀 채 마운드로 향하고 있었다.
그건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었다.
투수들이 글러브를 손에 끼고 마운드에 오르든, 옆구리에 끼고 오르든, 가랑이에 끼고 오르든 그건 규정상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젠장.’
그러나 이진용을 마주한 1번 타자 크리스 테일러에게 있어 이진용의 그 모습은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다.
‘대체 어느 손으로 던질 셈이지?’
어린 아이에게 아빠가 싫어, 엄마가 싫어, 그것을 물어보는 것과 비슷한 고문.
그런 크리스 테일러 앞에서 마운드에 드디어 올라선 이진용이 글러브를 옆구리에 낀 채 마운드 뒤편에 있는 로진백을 손에 쥐었다.
‘왼손인가?’
로진백으로 왼손을 하얗게 적셨다.
‘왼손이다!’
그 순간 크리스 테일러의 머릿속으로 이진용의 왼손에 대한 정보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동안은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
‘차라리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 테일러는 이진용의 왼손을 반겼다.
‘힘 대 힘, 100마일짜리 공만 칠 수 있으면 돼.’
악마 같이 농간을 부리는 오른손에 비하면 이진용의 왼손은 위력적이지만 정직했으니까.
‘난 칠 수 있어. 할 수 있어.’
아직 신인에 가까운 크리스 테일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훨씬 더 쉬운 상대였다.
‘어?’
그런 크리스 테일러 앞에서 이진용이 글러브를 꼈다.
로진백을 적신 왼손에.
“어!”
그 사실에 크리스 테일러가 허파가 튀어나올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기겁으로 물든 눈빛으로 주심을 바라봤다.
주심을 향해 눈빛으로 말했다.
저거 규칙 위반 아니냐고.
그러나 주심은 그런 크리스 테일러의 눈빛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마운드 위에서 투수가 로진백으로 손을 적시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게 로진백으로 적신 손에 글러브를 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아······.’
주심의 그 모습을 확인한 크리스 테일러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진용의 왼손에 대한 정보로 과부하에 걸렸던 머릿속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겼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신호를 파악한 김진호가 한 마디했다.
– 악마 같은 새끼.
그 말에 이진용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게 김진호 스타일 아닙니까?”
대답하는 이진용의 눈빛은 여전히 크리스 테일러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이제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은 맹수의 눈빛과 비슷했다.
사냥에 성공했음을 확신하는 눈빛.
실제로 이미 승기는 이진용에게 넘어온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점수를 낼 생각은 없지. 땅볼은 두려우니 낮은 공에는 배트가 안 나오고, 애매하게 먼 공에는 볼넷을 기대하며 스윙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 크리스 테일러가 할 수 있는 건 지극히 제한되며, 그 모든 걸 이진용은 꿰뚫어 보고 있었으니까.
‘확실하게 죽여주지.’
남은 건 이제 확실하게 목숨을 끊는 것뿐!
11.
“스트라이크, 아우우웃!”
이진용, 그가 메이저리그 역사에 유일무이하게 될 최다 무실점 이닝 기록의 달성을 알린 건 삼구삼진이었다.
아······!
다저스타디움은 깊은 탄식으로 새로운 기록의 탄생을 알려줬다.
그리고 베이스볼 매니저는 달콤한 보상으로 신기록의 탄생을 알려줬다.
하지만 마운드에 있는 이진용은 조용했다.
– 뭐야? 왜 호우 안 해?
– 호우맨 무슨 일 생김?
– 호우맨이 호우를 왜 안 함?
이진용이 이제까지 했던 그 어떤 환호성보다 큰 환호성을 내지르라 생각했던 이들은 그 사실에 의구심을 품었다.
개중 몇 명은 생각했다.
– 호우맨이 그래도 예의가 있네. 신기록을 달성한 것에 대해 매너를 보여주는 거야.
– 그렇지. 매너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지.
– 호우맨에게 이런 매너가 있을 줄이야?
이진용이 지금 신기록 달성에 대한 매너를 보이고 있다고.
물론 그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 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지랄하네, 애초에 매너가 있으면 호우를 안 했겠지.
– 그래, 매너가 넘쳐서 그런지 아까 배트 플립 끝내주더라. 이미 유튜브 조회수가 1백만을 넘겼다!
– 그때 던진 배트가 뉴욕까지 날아가는 중이라던데?
무엇보다 이미 몇몇 이들이 말해줬다.
– 호우는 아까 했잖아.
– 방송 카메라에 미리 호우했잖아.
– 호우예보 모름? 아, 메이저리그 촌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이진용이 이미 앞서서 환호성을 미리 내질렀다는 것을.
당연히 이진용은 제 말을 지키기 위해 이렇다 할 세레모니도, 감정 표현도 하지 않은 채 다음 타자를 잡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 모습으로 다저스를 향해 분명하게 말했다.
악몽은 아직 진행 중이라고.
12.
메이저리그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써낸 이진용의 피칭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미 신기록을 내주었다는 사실에 다저스의 전의는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이었으니까.
반면 신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못한 이진용은 조금도 기세가 줄어들지 않았다.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단숨에 2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이진용은 자신의 무실점 이닝을 60이닝으로 만든 후에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시작된 5회 초 오타니 쇼헤이는 다시 선두타자로 이진용을 만나게 됐다.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
물론 오타니 쇼헤이는 다시 만난 이진용을 향해 앞서서보다 훨씬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 아주 이를 가는데?
이번에는 어떻게든 널 잡겠다는 의지를.
그저 단순히 힘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과 힘을 쓰겠다는 의지를.
그 사실에 이진용은 긴장감을 품는 대신 미소를 품었다.
그때 이진용의 귓속으로 베이스볼 매니저의 알림이 들렸다.
‘오케이.’
자신감의 미소였고, 그 미소의 근거를 이진용은 곧바로 타석에서 보여줬다.
빠악!
이진용, 그가 5회 초 오타니 쇼헤이로부터 홈런을 때려냈다.
연타석 홈런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13.
5회 초 나온 이진용의 선두타자 홈런은 죽어가는 짐승의 가슴에 쇠말뚝을 박은 것과 같았다.
치명적인 상처.
그 상처의 여파는 곧바로 드러났다.
– 연속 안타! 메츠가 다시 한 번 도망가는 추가점을 냅니다!
5회 초 메츠가 이제 본격적으로 오타니 쇼헤이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한 번 기세가 오른 메츠는 이진용의 솔로 홈런 이후 오타니 쇼헤이로부터 2점을 더 뽑아냈다.
4대0!
팽팽하던 경기가 이제는 분명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다저스의 탑처럼 놓게 솟아오른 의지와 각오도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메츠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에 확실하게 갚아주자고!”
“아주 박살을 내자고!”
다저스의 앞에 설 때마다 고양이 앞의 생쥐 꼴이었던 메츠의 분위기가 처음으로 제대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메츠의 더그아웃 어디에도 다저스 공포증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메츠 놈들 아주 신이 났군.”
“빌어먹을, 앞선 경기에서는 찍소리도 못 내던 것들이.”
반면 다저스의 분위기는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앞서 거둔 3연승이, 이번 시즌 메츠를 상대로 거둔 6연승이 무색할 정도로 착잡한 얼굴을 한 채, 그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 듯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젠장.”
“퍼킹 호우맨.”
다저스 선수단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표정이었다.
실제로도 다저스는 오늘 경기에서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보였다.
팀의 전설이 남겼던 기록에 대한 도전자를 막지 못했고, 심지어 이제는 다저스의 새로운 에이스가 되어줄 투수가 그 도전자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맞았다.
지갑과 휴대폰과 중요한 서류가 담긴 가방을 통째로 강도에게 빼앗긴 듯한 심정.
‘오늘 경기는 여기서 끝이군.’
그리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선수들만이 아니라 코칭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이기긴 힘들겠어.’
다저스의 코칭스태프 역시 오늘 경기에서 역전을 꾀하기란 불가능함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준비했다.
“불펜에 준비된 투수가 누가 있지?”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오타니는 6회까지 올리고, 7회부터 추격조를 올리도록.”
보다 나은 패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그리고 대타자들도 준비시키고.”
“예.”
그 준비를 위해 벤치 코치가 불펜과의 통화를 시작했고 타격 코치가 타자들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으며, 감독이 이제 남은 교체 명단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저스 벤치의 광경을 본 이진용과 김진호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것은 승리를 예감한 이의 미소 같은 건 절대 아니었다.
– 진용아, 다저스 애들 표정이 모든 걸 잃을 표정이다. 어떻게 생각해?
“저런, 안 됐네요.”
– 그렇지? 안 됐지?
“예, 아직 잃을 게 더 있는데.”
–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잃을 게 더 있다는 걸 알려줘야죠.”
가방을 훔쳐간 것만으로도 모자라 신발과 옷, 심지어 금니마저 강탈할 속셈인 악질적인 강도의 미소였다.
14.
5회 말을 맞이한 다저스에게 반전의 기회는 없었다.
삼자범퇴, 이진용이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시작된 6회 초 마운드 위에 올라온 오타니 쇼헤이는 역투를 펼쳤다.
– 삼진!
– 멋지군요.
여전히 최고 102마일까지 나오는 패스트볼을 뿌려대며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건 반전의 불씨가 아니라 마지막 불씨였다.
8번 타자부터 타순이 시작되는 다저스의 6회 말, 대기 타석에는 오타니 쇼헤이 대신 대타자가 서 있었다.
– 오타니 어디 감?
– 오타니 나갔네.
– 결국 타석에도 안 서네.
– 호우맨 상대로 서봤자 아웃만 당할 테니까.
다저스가 오타니 쇼헤이가 물러났음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선언했다.
동시에 그것은 다저스가 메츠를 향해······ 정확히는 이진용을 향해 보내는 항복 선언이기도 했다.
오늘 경기에서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다.
이진용, 네가 무슨 또라이 짓을 하든 알 바 없다.
물론 이진용은 그런 다저스를 향해 조금의 자비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우우우웃!”
오히려 양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며, 다저스로부터 아웃카운트를 더 빠르게 뜯어냈다.
6회 말, 이진용의 피칭에 거칠 것은 없었다.
– 리! 그가 자신의 무실점 이닝 기록을 거듭 갱신합니다!
압도적인 경기 내용이었고, 그 사실에 만원 관중으로 가득 차 있었던 다저스타디움은 지독한 스트레스성 원형탈모에 걸린 듯 듬성듬성 빈 좌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발목을 잡은 건 다름 아니라 7회 초였다.
이번에도 이진용, 그가 선두타자가 되어 타석에 섰다.
15.
어느 리그든 똑같다.
보다 나은 패배를 준비하는 팀의 감독들은 이제는 패전처리 역할을 담당한 투수에게 똑같은 주문을 한다.
“점수를 내주는 건 상관없다. 볼넷만 피해라. 모든 공을 스트라이크존에만 집어넣어.”
어차피 진 경기, 몇 점을 줘도 상관없으니 볼넷으로 경기가 늘어지는 것만큼은 피하라고.
사실 그건 모든 투수가 당연히 마운드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전략적인 피칭에서 볼넷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도망가는 피칭을 하다가 볼넷이 거듭 나오며 주자가 쌓이는 건 투수가 무조건 피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런 주문을 거듭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주문을 굳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굳이 그런 주문 없이도 알아서 볼넷을 주지 않고 공격적인 피칭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을 줄 아는 투수였다면 패전처리 역할이 아니라 필승조 혹은 선발투수로 활약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진용의 경우에는 여기서 주문이 끝이 아니었다. 불펜 코치의 추가 주문이 있었다.
– 홈런만은 줘서는 안 된다, 지금 저 녀석이 마운드 위에서 그렇게 말했어.
이진용에게 세 번째 홈런을, 3연타석 홈런을 주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추가 주문이.
– 분명하게 봤어. 저 개뽀록 허접쓰레기 투수한테 홈런을 줘서는 안 된다고 녀석이 부산 사투리로 말하는 걸 내가 봤어. 진짜 부산 사투리로 말했어. 내 목숨을 걸고 장담해.
당연히 이진용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이진용은 다른 것도 알고 있었다.
‘홈런을 치고 싶으면 투수로 하여금 홈런을 의식하게 만들어라.’
김진호가 말해준 홈런을 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기에 당연히 이진용은 준비했다.
‘존은 적당하고.’
자신의 스트라이크존을 확인했고, 마운드 위에 있는 투수의 낌새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홈런 맞기 싫어서 괜히 애매하게 코너워크 공략하다가 실투 나오는 일 없게 해. 오늘 난 최고의 슬러거이니까.”
말과 함께 툭툭, 홈플레이트 위로 흙을 찼다.
그 도발에 포수의 눈매가 싸늘하게 식었다.
물론 이 순간 포수는 이진용의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마운드 위 투수에게 합리적인 주문을 했다.
‘볼넷이 나와도 좋아. 굳이 존에 넣을 필요 없어. 공 한 개 정도는 빠져도 된다.’
합리적인 주문.
그러나 마운드 위 투수에게는 달랐다.
‘젠장.’
감독은 점수를 내줘도 좋지만 볼넷만은 내주지 말고 스트라이크존에 넣으라는 주문을 했고, 불펜 코치는 안타가 나와도 좋으니 홈런만은 맞지 말라는 주문을 했다.
그런데 이제 포수가 스트라이크존에서 빠지는 공을 요구했다?
모순된 상황.
그 상황 속에서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공은 하나였다.
‘오케이.’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 몰리는 실투.
그 공에 이진용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담아 배트를 휘둘렀다.
빠악!
그 순간 듣는 모든 이가 홈런임을 직감할 수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이진용은 이것이 홈런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호우!”
그 외침과 함께 이진용이 배트를 내던지며 머리 위로 양손을 번쩍 들었다.
이진용, 그가 3연타석 홈런을 치는 순간이었다.
16.
– 넘어갑니다! 또 넘어갑니다! 리! 그가 선두타자로만 세 번째 홈런을 칩니다!
이진용의 세 번째 홈런이 나오는 순간 경기를 보던 이들은 실소를 지었다.
– 투수가 3연타석 홈런 치네?
– 저 새끼 투수 맞아?
– 알투베가 분장한 거 아님? 저 몸에서 무슨 저런 타격이 나옴?
3연타석 홈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들조차 보여주기 힘든 기록을 투수가 기록했다는 사실에 대한 실소였다.
하지만 그 실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 가만 이러다 다음에 호우맨이 또 호움런 치면 어떻게 됨?
– 4연타석 홈런인가? 4연타석 홈런이면 메이저리그 타이기록 아님?
– 지금 7회 초이니까 다저스가 남은 2이닝 제대로 못 막으면 호우맨 네 번째 타석 가능할 거 같은데?
– 지금 호우맨 기세면 4연타석 홈런도 나오겠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다저스가 이진용에게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또 하나 헌납할 지도 몰랐으니까.
– 이거 진짜 필승조 올려야 하는 거 아님?
– 젠슨 몸 안 풀고 뭐하냐!
– 씨발 오렐 허샤이저 기록도 깨졌는데 투수한테 4연타석 홈런까지 맞을 거면 그냥 야구하지 마!
그 사실에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던 다저스 팬들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밑바닥인 줄 알았던 곳 아래에 지하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심지어 그 지하실은 한 층이 아니었다.
– 그보다 호우맨 안타는 아예 치지도 않네. 안타는 쓰레기다, 이건가?
– 노히트 피처인듯 ㅋㅋ
ㄴ 노히트 맞는데?
ㄴ 그건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홈런도 안타이니까.
ㄴ 아니, 노히트 게임 중이라고. 호우맨 오늘 안타 하나도 안 맞았어.
ㄴ 뭐?
바닥 아래 수십 층의 지하가 존재함을 알려줬다.
– 진짜네? 호우맨 노히트 게임 중이네?
– 미친, 한 시즌에 노히트 게임 두 번이 말이 됨?
그제야 다저스는 깨달았다.
“미친, 이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4연타석 홈런? 투수가?”
“노히트 게임이라고?”
이진용, 그가 다저스에게 보다 나은 패배 따위를 용납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안 돼. 그렇게 지면 끝장이야.”
“젠장, 어떻게든 막아야 해.”
자칫 잘못하면 이진용에게 가장 처참한 패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상황 속에서 7회 초, 홈런을 치고 마운드에 들어온 이진용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호우, 호우, 호우.”
다시 한 번 호우예보가 나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