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183
13.
지피지기 백전백승.
굳이 자세한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대부분의 이들은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는 이는 많지 않다.
적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은 많이 한다. 그것조차 하지 않은 채 승리를 자신한다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 자만일 테니까.
문제는 대부분의 이들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저 자기 주제를 파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적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고, 자신의 행동에 적이 어떻게 나올지 파악한 후에 그것을 이용할 때 진정한 의미의 지피지기 백전백승이 이루어질 수 있다.
“모두가 탈삼진 레이스를 기대한다면 역으로 그 점을 이용해서 맞혀 잡는 피칭을 해라. 여기에 분한 표정 연기를 하면 꿀을 빨 수 있을 것이다.”
이진용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진호 선수가 가르쳐준 조언이죠.”
김진호가 현역 시절 컵스를 상대로 3개의 삼진만 잡으면서 90구 만에 완봉승을 거두었을 때를 언급하면서 해준 조언이었으니까.
“무려 똑같은 이야기를 아홉 번이나 하면서 해준 조언.”
한 번도 아니고 아홉 번, 귀에 박히다 못해 뇌리에 박힐 정도로 지겹게 들은 조언이었다.
이진용은 그런 김진호의 가르침을 레드삭스 전에서 기꺼이 응용할 속셈이었다.
크리스 세일, 2017시즌 메이저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한 투수와 현재 리그 최다 탈삼진 투수가 맞붙는 경기, 누가 보더라도 탈삼진 레이스가 예상되는 상황을 역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탈삼진 레이스에 참가하는 척하고, 의도적으로 맞혀 잡는 피칭으로 투구수를 아끼며 아웃카운트를 확실하게 잡아냈다.
거기에 연기를 더했다.
– 빌어먹을.
귀신마저 속아 넘어갈 연기를.
그런 이진용의 연기에 세상 모두가 속았다.
– 젠장, 여덟 번에서 그만둘 걸 괜히 아홉 번이나 말해서······.
당연히 연기에 속은 대가는 컸다.
– 레드삭스 병신들, 그러기에 진작에 좀 치지! 아주 그냥 내가 있을 때랑 달라진 게 없어! 이렇게 상위 타순을 그냥 날리면 어떻게 해!
이진용의 몰락을 바라던 이들과 레드삭스 팬들은 절망감에 흽싸였다.
그리고 레드삭스는 1번부터 3번까지, 팀 내 최고 타자들이 나오는 7회 말을 속절없이 소모했다.
그들이 오늘 경기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찬스를 살리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하긴요.”
더불어 그게 시작이었다.
“속으면 당해야지.”
이진용이 그 말과 함께 글러브를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은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준비를 했다.
자신이 보여준 뛰어난 연기력에 어울리는 상을 받기 위한 준비를.
14.
– 세일이 내려갑니다.
8회 초 홈런을 맞은 크리스 세일은 그대로 교체됐다.
어쩔 수 없었다.
– 8이닝 1실점 17탈삼진, 투구수는 133구. 세일이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피칭을 마쳤습니다.
이미 투구수가 130구를 넘은 시점에서 1대0으로 지고 있는 상황.
결정적으로 크리스 세일을 마운드에 설 수 있게 해주던 팽팽했던 실이 끊어진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더 이상 세일을 마운드에 남기는 것은, 앞으로 절반 이상 남은 시즌 동안 크리스 세일이 보여줄 활약을 담보로 잡고 확률 낮은 도박을 하는 것과 같았다.
레드삭스가 보다 나은 패배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레드삭스의 입장, 메츠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멈출 수도 없었다.
– 메츠가 추가 득점에 성공합니다!
“그렇지!”
“여기서 아주 끝장을 보자고!”
이진용이 만든 드라마는 최근 승리 속에서 감흥과 함께 식어버린 메츠 선수들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뜨겁게 만들었으니까.
폭주하는 기관차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이런 식으로 야구를 하다니!’
‘리, 역시 넌 위대한 또라이다!’
‘그래, 이래야 어메이징 호우맨이지!’
그렇게 메츠는 8회 초 거듭 안타를 쳐내며 스코어를 3대0으로 만든 후에야 레드삭스 타자들에게 반격의 기회를 줬다.
물론 기회만 줄 뿐이었다.
– 리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레드사스의 타순은 4번부터 시작됩니다. 앞으로 여섯 개의 아웃카운트만 잡는다면 리는 메이저리그에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스물네 번 째 선수가 됩니다.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레드삭스에게 반격의 기회를 줄 뿐, 결과마저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 의지를 이진용은 자신의 왼손 피칭으로 보여줬다.
펑!
“스트라이크!”
8회 말 던진 왼손으로 던진 초구, 그 초구의 구속이 전광판에 찍혔다.
102마일.
그 숫자에 펜웨이파크의 레드삭스 팬들이 긴 탄식을 내뱉었다.
펑!
“스트라이크!”
이어진 93마일 슬라이더에는 탄식조차 나오지 않았다.
펑!
“스트라이크, 아우우웃!”
그 후에 나온 97마일짜리 패스트볼에 타자의 배트가 돌아가며 헛스윙 삼진이 나왔다.
그뿐이었다.
레드삭스 팬들은 그 사실에 소리 없이 고개만 숙이고, 이진용은 미소를 지은 채 그 광경을 봤다.
– 처형장이군.
펜웨이파크의 고요함 속에서 이진용의 처형이 시작됐다.
15.
8회 말, 기적은 없었다.
4번부터 시작된 레드삭스의 타순은 6번에서 끝이 났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양의 탈을 벗어 던지고 늑대의 얼굴을 드러낸 이진용은 삼진이라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시작된 9회 초 역시 특별한 일은 없었다.
굳이 새로운 점수가 필요 없는 상황 그리고 새로운 투수가 나올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특별한 무언가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9회 초가 끝나고 9회 말이 시작됐다.
이제는 고요하다 못해 싸늘한 분위기가 되어버린 펜웨이파크 위가 듬성듬성 선수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후우.”
메츠의 야수들, 이제는 실책조차도 용납되지 않은 상황을 맞이한 그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일까?
그라운드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느렸다.
대화도 많았다.
“여기서 실책하면 죽일 놈이 되겠군.”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마. 여기서 실책이 나오면 레드삭스 팬들에게는 사랑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긴, 여기서 실책하면 최소한 보스턴에서 맥주 값 계산할 필요는 없겠지.”
“대신 시티필드 근처에 있는 펍에서 술 마시려면 변장을 해야겠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기 위한 대화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이들은 이 순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신에게 기도하듯 말했다.
“호우.”
“야, 지금 뭐한 거야?”
“응?”
“조금 전 호우라고 했잖아?”
“어, 했지.”
“왜?”
“이렇게 하면 왠지 잘 될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주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 호우해야지.”
“호우!”
“여기도 호우다!”
호우!
그 외침이 펜웨이파크의 그라운드 곳곳에서 순차적으로, 봉화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진용이 등장한 건 그 무렵이었다.
“호우!”
“호우!”
그의 등장에 메츠 선수들은 보다 큰 목소리로 에이스의 등장을 반기고, 응원했다.
그 응원 소리에 김진호가 굳은 표정으로, 이진용 옆으로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 역시 내 가설이 맞았다.
또 무슨 개소리를 하시려는 겁니까? 그 질문을 남은 이진용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
– 네 또라이 병이 전염병이라는 가설 말이야. 그게 아니고서는 문화도, 인종도 다른 이들이 너처럼 또라이가 되는 걸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
김진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어갔다.
– 그래,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언젠가 세상에 좀비 바이러스 같은 게 퍼져서 종말이 올 것 같았지. 설마 그게 좀비가 아니라 또라이로 변하는 바이러스 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 차라리 그 전에 죽어서 다행이야. 또라이 병에 걸려 또라이가 될 바에는 그냥 곱게 죽는 게 낫지.
그 말에 이진용은 그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김진호가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 순간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지금 그가 이진용의 퍼펙트게임 달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증거라는 의미라는 것을.
‘더 이상 변수는 없군.’
그 사실에 이진용은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마운드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말했다.
“원하는 손 있어요?”
그 말에 김진호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난 오른손만으로 이곳을 지배했었어.
그 대답에 이진용은 굳이 글러브를 바꿔 끼지 않았다. 이미 그의 글러브는 왼손에 있었기에, 그렇기에 이진용은 대답만 했다.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 대답과 함께 이진용이 피칭을 시작했다.
16.
퍼펙트게임 기록이 걸린 9회, 가장 큰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야수들이다.
실책조차 용납하지 않는 상황에서 야수들의 긴장감은 없던 실책도 만들 정도로 절정에 도달한다.
하물며 퍼펙트게임 같은 중요한 기록이 걸린 무대를 경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에 실책이 나올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츠 선수단은 달랐다.
9회 말을 맞이한 메츠 선수단은 긴장하되, 그 긴장감이 어색하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익숙했고 또한 당연했으니까.
‘리가 퍼펙트게임을 못하면, 그게 이상한 일일 테니까.’
이진용이 무실점 상황에서 9회에 마운드에 오르는 건 일상처럼 익숙한 일이었고, 이진용이 언젠가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게 되리란 것 역시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적당한 긴장감이 메츠 선수단의 기량을 100퍼센트 이상으로 만들었다.
그런 메츠 야수들 사이에 틈은 없었다.
그리고 이진용은 기꺼이 그런 수비들을 믿고 공을 던졌다.
– 나이스 캐치!
– 멋진 수비네요!
맞혀 잡는 피칭으로 단숨에 2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이진용이 그 사실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넘으니, 알아서 넘는군.’
김진호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기에 지어진 미소였다.
– 이제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입니다.
이제 대기록까지 하나의 아웃카운트만이 남은 상황.
– 진용아, 삼진으로 잡을 거냐?
당연히 이 순간 경기를 보는 모든 이들은 이진용이 이 상황에서 삼진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으리라 생각했다.
– 리의 피칭 스타일을 본다면 여기서 삼진을 노릴 것 같군요.
삼진이야말로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자, 이진용 같은 투수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진용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모두가 예상하는 것을 도리어 미끼로 두고 사냥을 하는 것이 이진용이 김진호로부터 배운 사냥방법이기에.
그렇기에 이진용은 던졌다.
자신의 눈앞에 둔 타자의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공을 집어넣었다.
타자에게 그 무엇보다 치기 좋은 속도로 날아가는 공을.
그리고 타자의 앞에서 사악할 정도로 급브레이크를 밟고는 추락하는 공을.
체인지업!
딱!
그 공 앞에서 타자의 배트는 탄식을 토해냈다.
“아······.”
타자 본인도 탄식을 토해냈다.
“아!”
다가오는 공을 글러브로 잡은 2루수는 탄성을 토해냈다.
그 탄식과 탄성 사이로 투수의 손끝을 떠나 타자의 배트를 맞고 그라운드를 튕긴 후에 2루수의 글러브를 떠난 공이 1루수의 글러브로 들어왔다.
펑!
이진용의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2루수 앞 땅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호우!”
그리고 이진용이 메이저리그 역사의 스물네 번째 퍼펙트게임 달성자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17.
별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빛나긴 하지만 그 빛이 별 볼 일 없는 별이 있는 반면 북극성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 있다.
그런 별의 범위를 좀 더 크게 잡는다면 유성도 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용, 그는 유성이었다.
별들의 세계인 메이저리그에 갑자기 등장한 유성!
그리고 현재 지구를 당해 다가오는 유성.
때문에 세상 모든 이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별.
당연한 말이지만 메이저리그의 모든 기자들, 관계자들은 그런 이진용과의 인터뷰를 하나라도 더 따내려고 안달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이진용과 인터뷰를 하는 건 그 어떤 선수보다 힘들었다.
“드디어 인터뷰가 잡히는군.”
“완봉을 해도 인터뷰를 못하는 선수라니, 골 때리는군.”
이진용이 완봉승 정도로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이미 선을 그은 탓이었다.
그 탓에 이진용은 다저스 전 이후 경기 후 인터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에서 레드삭스를 상대로 거둔 이진용이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뒤 마련된 인터뷰 자리에는 당연히 기자들로 가득했다.
더불어 그렇게 모인 기자들의 눈빛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어떻게든 이진용으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한 기자들의 눈빛에는 독기마저 번들거리고 있었다.
‘왔다.’
그런 그들 앞에 이진용이 등장했다.
‘응? 왜 저래?’
‘뭐야? 왜 이렇게 흥분한 상태야?’
그 어느 때보다 흥분된 상태로 등장한 이진용의 눈빛에는 독기를 넘어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등장한 이진용이 기자들을 훑는 순간 기자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순간 모두가 직감했다.
오늘 인터뷰가 제대로 진행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직감은 곧바로 현실이 됐다.
“그럼 질문을 받겠습니다.”
이영예의 말과 함께 맨 앞에 있던 기자 한 명이 통상적이 질문을 하나를 던졌다.
“오늘 경기 소감 부탁드립니다.”
그 질문에 이영예는 이진용을 바라봤고, 이진용은 질문을 받는 순간 대답했다.
“호우.”
그 짧은 대답에 이영예가 곧바로 통역했다.
“아주 좋았습니다.”
그 순간 기자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 미치겠다. 아니, 저 새끼 미쳤어!’
‘미친 또라이 새끼.’
지금 이진용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해주는 대목이었으니까.
당연히 제대로 된 인터뷰 진행은 불가능했다.
“오늘 경기 전에 준비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이진용의 대답은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호우.”
“······최선을 다하고자 했답니다.”
“경기 중간에 화를 참는 듯한 모습은 연기였습니까?”
“호우.”
“······연기를 노리고 한 건 아닙니다.”
“경기 전 퍼펙트게임을 직감하셨습니까?”
“호우!”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공을 던졌습니다.”
이영예가 아니었으면 아수라장이 되었을 상황.
물론 이영예의 통역 덕분에 기자들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젠장, 이거 뒤집어엎을 수도 없고······.’
‘통역이 무서워서 욕을 할 수도 없고······.’
기자들의 분노조절을 가능케 하는 건 이영예의 통역 능력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더 빠른 공을 던지실 수 있습니까?”
그 상황에서 질문 하나가 툭 나왔다.
말 그대로 툭 나온 질문.
무슨 대답을 해도 별로 의미가 없는 질문.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이진용이 대답하는 순간 모든 기자들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소란스럽던 무대가 삽시간에 적막의 무대로 바뀌었다.
그 적막의 무대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
– 이 빌어먹을 쓰레기 게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