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25
8화. 네가 맞다 (3).
8.
8회 초는 없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고양 스타즈의 타자들이 타석에 섰지만, 그들은 그 어떤 존재감도 드러내지 못한 채 아웃카운트를 적립했다.
마치 경기가 빨리 끝나기를 고양 스타즈의 타자들이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무기력한 모습.
아이러니한 건 그런 타자들의 무기력한 모습이 도리어 이진용에게 기회가 됐다는 점이었다.
“뭐야, 벌써 공수교대야?”
“미치겠네, 머릿속을 정리할 틈이 없어.”
엔젤스의 타자들에게 7회 말 이진용의 공에 대해 심사숙고할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코칭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이진용이란 투수를 어떻게 공략해야하지?’
‘특이한 공이다. 그냥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해서는 안 돼.’
코칭스태프 역시 이진용의 공에 대해 이렇다 할 답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너무나도 이르게 8회 말, 이진용을 상대하게 됐을 때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제성아, 보는 거다. 그냥 지켜봐.”
공을 지켜보는 것.
그 주문을 받은 1번 타자 김제성은 반문했다.
“패스트볼도요?”
“그래.”
처음 이진용에 대한 대처법으로 코칭스태프는 패스트볼을 공략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고작 1이닝 만에 그와는 정반대로 패스트볼을 지켜보라는 주문이 나온 상황.
1번 타자로 출전하게 된 김제성은 그 사실에 당연히 혼란을 느끼고는 했다.
‘젠장, 뭐 좀 하려니까 이 지랄이야?’
김제성.
이미 점수 차가 크게 난 6회 말 1번 타자의 대타로 오늘 경기를 시작한 그는 현재까지 출루가 없었다.
득점쇼가 펼쳐지는 상황에서 아무런 공적이 없다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고 동시에 좋은 일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위험한 일.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당연히 그는 어느 때보다 출루를 하고 싶었다.
특히 직구 구속이 120킬로미터에 불과한 투수를 상대로 펜스에 맞는 3루타 하나를 나름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 중계도 하는데······.’
자신의 빠른 발을 통한 주루 능력을 높으신 분들 그리고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패스트볼을 그냥 보라는 말이 좋게 들린다면 그게 이상한 일.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반발하는 일은 없었다.
그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2군.
그것도 2군에서 주전으로 나오기보다는 대타로 나오는 일이 더 많은 상황이다.
그런 그가 코칭스태프의 작전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위험함을 넘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벤치의 사인을 되새김질하며 타석에 섰다.
“플레이 볼!”
그리고 주심의 선언과 함께 그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분명하게 강조했다.
‘그냥 본다. 패스트볼이 오면 참는다. 존에 들어와도 무조건 참는다. 초구는 무조건 본다.’
그른 그의 눈앞에서 이진용이 피칭을 준비했다.
이진용이 자신의 몸을 꽈배기처럼 만들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풀어내며 공을 던지는 그 모습은 토네이도처럼 역동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역동적인 투구폼에서 나온 공은 느린 패스트볼이었다.
스트라이크존을 향해 무척 정직하게 그리고 정말 너무나도 느리게 날아오는 공.
도리어 너무나도 치기 좋은 공이라서 김제성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게 만들 정도의 공.
팡!
마지막으로 귀여운 소리를 내며 포수 미트로 공이 파고든 그 공에 주심은 분명하게 소리쳤다.
“스뚜라이꾸!”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김제성은 가장 먼저 전광판을 향해 자신의 눈을 집중했다.
그리고 봤다.
‘110?’
110킬로미터.
요즘은 충남 계룡에 있는 여고생도 던진다는 그 구속의 패스트볼 앞에서 김제성은 얼빠진 표정으로 벤치를 바라봤다.
김제성이 언제든 볼 수 있는 곳에 서있던 타격코치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둘은 잠시 동안 마음의 대화를 나누었다.
‘진짜 이걸 치지 말고 봐야합니까? 이 말도 안 되는 공을?’
‘참아. 일단 참아. 아까 그 덜 가라앉은 공이 올지도 모르니까 참아.’
그 대화를 끝으로 타격코치가 재차 패스트볼을 건드리지 말고 보라는 신호를 줬다.
“후우, 후우.”
그 신호에 김제성이 폭발하려는 자신의 심정을 심호흡으로 진정시켰다.
그렇게 심호흡으로 스스로를 다스린 김제성이 다시금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참자. 패스트볼이라도 참는 거다.’
벤치 사인이 왔으니 벤치 사인을 따르자!
누누이 듣던 그 조언을 김제성은 다시금 되새김질했다.
그리고 다시 그가 마운드 위의 투수를 바라봤다.
마운드 위에 있는 이진용은 그런 김제성을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는 수준을 넘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김제성은 느꼈다.
‘그래, 승부수를 던지겠다, 이거지?’
저 눈빛!
저 각오!
결사의 의지를 품은 그 눈빛에 김제성은 이진용이 결코 자신을 놀릴 생각이 없음을, 자신을 상대로 전력으로 피칭을 할 생각이라는 것을, 앞서 타자들을 상대로 뜬공을 잡아냈던 그 신비하면서도 기괴한 결정구를 던지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 이상한 패스트볼을 던져 봐. 어떻게든 파악해서, 어떻게든 때려주마.’
당연히 이 순간 김제성은 다시 한 번 배트를 꽉 쥐었다.
혹여 저도 모르게 배트가 움직이는 일이 없도록, 감히 조금 전처럼 움찔하는 일이 없도록.
그런 김제성을 향해 이진용이 2구째를 던졌다.
팡!
조금 전과 비슷한 코스 그리고 비슷한 구속의 공.
그냥 아주 느린 패스트볼이었다.
“헉!”
그 공 앞에서 김제성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음과 동시에 잽싸게 배터 박스에서 물러난 후에 벤치를 봤다.
그리고 타격코치를 바라봤다.
‘코치님!’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런 김제성의 눈빛을 바라본 타격코치는 이 순간 이진용의 그 이상한 패스트볼 대신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벤치 사인 그리고 제성이 심리를 완벽하게 읽고 일부러 평범한 패스트볼을 던지고 있어.’
이진용이 지금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
이대로 그냥 지켜만 보다가는 루킹 삼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
‘타격이다. 적극적으로.’
투 스트라이크 상황, 여기서 루킹 삼진을 당할 순 없는 노릇.
그 상황에서 나온 타격코치의 사인에 김제성은 이를 꽉 물었다.
그리고 각오를 다졌다.
‘오냐, 뭐든 와라.’
당연히 김제성은 더 이상 참을 생각이 없었다. 패스트볼이든 뭐든 간에 존에 들어오는 공이라면 무슨 공이든 때릴 생각이었다.
‘아주 박살을 내주마.’
그런 그를 향해 이진용이 세 번째 공을 던졌다.
‘직구! 넌 뒈졌어!’
김제성의 몸쪽을 향해 날아오는 느린 공, 김제성은 그 공이 패스트볼이라고 확신했고 당연히 그의 몸은 반응했다.
후웅!
그의 배트가 공을 쪼갤 기세로 움직였다.
그뿐이었다.
펑!
갑작스러운 감속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단숨에 바꾼 그 공은 김제성의 배트 아래를 유유히 지나가며 포수의 미트에 들어갔다.
멋진 체인지업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아아웃!”
“씨이발!”
이진용, 그가 8회 말을 삼진으로 시작했다.
9.
8회 말, 공이 높게 뜨는 순간 투수는 하늘 높이 손을 들며 전력을 다해 소리쳤다.
“마이 볼!”
그 외침에 내야수들은 그대로 정지했다.
조각처럼.
오로지 한 명의 주인공만을 위한 엑스트라들처럼 멈춰있는 그들 사이에서 이진용만이 하이라이트 아래에서 움직였다.
퍽!
이윽고 그가 공을 잡는 순간 멈춰있던 좌중의 시간이 흘러갔다.
[69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삼자범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너스 포인트가 지급됩니다.]베이스볼 매니저의 알림을 시작으로 여러 종류의 소리들이 이진용의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오케이!”
“나이스 플레이!”
고양 스타즈 선수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와 박수소리.
“젠장!”
“또 잡혔군.”
“결국 여기까지인가?”
엔젤스 선수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와 한숨소리.
– 나이스 플레이. 이제 9회 초에 스타즈 타자들이 10점 이상만 내면 승리투수가 될 수 있겠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진호의 목소리까지.
그 소리를 들은 후에야 이진용은 자신이 8회 말을 말끔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마무리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직감 속에서 이진용이 고개를 들었다.
이 순간 그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분 좆같네.’
자신이 지금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진용은 절로 찌푸려지는 표정을 감추려는 듯 어깨로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이진용의 모습에 김진호가 옅게 웃었다.
– 야, 인마!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 좋은 날이잖아? 라이징 패스트볼 스킬이 최소한 프로 2군 레벨에는 먹힌다는 걸 확인했잖아?
김진호의 말대로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오늘 이진용이 거둔 수익은 그저 포인트라는 숫자 하나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엔젤스 2군 선수들, 그것도 단련되고 연마된 그들을 상대로 2이닝 무실점 피칭을 했다.
그 과정에서 라이징 패스트볼 스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고작 120대 중반에 불과한 패스트볼을 가진 이진용이 프로 2군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단 그만이 확인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이진용은 자신이 그저 도망치는 사냥감이 아니라 역으로 당신들도 잡을 수 있는 사냥꾼임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했다.
훗날 이진용이 프로에 입단하는 기회를 얻는다면 오늘 이 경기가 중요한 역할을 할 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소득이었고, 그토록 이진용이 바라던 결과물이었다.
‘젠장.’
그러나 이진용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참담했다.
– 그런데 왜 그렇게 인상이야? 응? 뭐 마음에 안 드는 거라고 있어? 설마 똥 마렵냐? 급해?
“아닙니다.”
김진호의 말에 이진용은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내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이 순간 이진용은 틀린 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니. 그저 경기에 나온 것에 감사해야 하는데.’
이 좋은 결과 앞에서 인상을 찌푸리는 건, 기분이 더러운 건 세상이 아닌 이진용에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 네가 맞다.
그런 이진용에게 김진호는 평소와는 보기 힘든 표정으로, 마치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 설마 네가 이 상황에서 그런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지만, 그게 맞다. 네가 느끼는 감정이 정답이다.
“정답이라고요?”
이진용은 저도 모르게 반문을 내뱉은 후에 곧바로 글러브로 입을 가렸다.
김진호는 그런 이진용을 대신해 그라운드를 그리고 조금 전 이진용이 주인이었던 마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 점수 차는 10점 차. 누가 보더라도 지는 경기. 투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를 쟁취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마운드에 올라와 공을 던진다는 것.
마운드를 바라보는 김진호의 얼굴에는 비릿하면서도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투수가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기분이 좋다면 절대 프로의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지.
세상에 좋은 것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세상은 그러하지 않다.
야구도 마찬가지이다.
똑같은 마운드를 쓰더라도 투수의 처지는 명백하게 다르다.
누구는 모든 이들의 관심과 주목 그리고 대접을 받으며 마운드를 밟는 에이스 투수이지만, 누구는 감독과 선수단이 포기한 경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이미 더러워진 마운드를 밟는 패전처리 투수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의 재미, 야구만화 H2에 나왔던 그 말 그대로 시간을 끈다고 해서 야구는 끝나는 스포츠가 아니니까.
– 이제 왜 내가 그 누구도 밟지 않은 마운드를 밟고자 하는지 알겠지?
그러나 이진용은 자신이 그 누군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진용은 그 누군가가 되었다.
그것이 기분이 더러운 이유였고, 표정을 찌푸리는 이유였다.
동시에 이진용이 결코 패배에 순응하며 현실과 타협하는 자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예.”
때문에 이 순간 이진용은 명심했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마운드에 오르지 않겠어.’
그렇게 이진용이 마운드를 내려간 후 시작된 9회 초, 기적 같은 건 없었다.
고양 스타즈 타자들은 무기력하게 삼자범퇴로 물러났고, 거기서 게임은 끝이 났다.
9회 말 치르는 대신 선수단이 그라운드로 모여 인사를 나누었다.
그 속에서 이진용은 여전히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내와 한 여인이 이진용의 그 쓴웃음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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