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57
8.
문학구장.
인천 샤크스의 홈구장으로, 보는 순간 확 트였다는 느낌이 드는 이 구장의 불펜은 외야에 위치해 있었다.
외야에 자리를 잡은 팬들이 외야 난간에 몸을 걸치면 공을 던지며 언제든 자신이 출전할 때를 대비해 몸을 풀고 있는 불펜 투수들을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지금 그 외야의 불펜이, 좌익수 방면의 불펜이 고요해졌다.
마치 전쟁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장수가 출전할 때처럼.
이윽고 불펜의 문이 열렸고, 그렇게 열린 틈 사이로 자그마한 체격의 투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사내만이 볼 수 있는 귀신 한 명 역시 그 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둘이 머나먼 곳에 있는 마운드를 향해 처벅처벅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런 그 둘 모습은 마운드로 오르는 불펜 투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그 모습에 가까웠다.
– 오늘 느낌 괜찮은데, 진용아! 노래 하나 불러줄게.
복싱, 그 링에 오르는 선수와 코치의 모습.
– 아마 너도 마음에 들 거다.
그게 이유였다.
– Rising’ up······.
김진호, 그가 ‘록키’, 더 이상 설명을 표현할 필요가 없는 그 영화를 대표하는 노래인 ‘Eye of the tiger’를 부른 건.
– ······to survive∼!
그렇게 김진호의 노래를 배경 음악 삼은 채.
록키 영화의 주인공인 록키 발보아가 아무것도 없던 양손으로 승리와 영광을 쥐기 위해 링에 오르듯, 이진용이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마운드에 올라서는 순간 아직 타석에 서지 않은 채 몸을 푸는 타자를 바라봤다.
사냥감을 보는 맹수처럼 노려봤다.
그런 이진용의 귀로 목소리가 들렸다.
“플레이볼!”
베이스볼 매니저와 주심의 목소리가 이진용에게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 록키 원에서 록키 발보아는 아폴로 크리드를 상대로 마지막 라운드까지 버텼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
그리고 노래를 멈춘 김진호 역시 알려줬다.
– 그래도 괜찮았어. 영화였으니까. 하지만 이진용, 네가 살아남으려면 넌 무조건 승리해야 해.
오늘 이 경기의 중요성을, 이 경기에서 이진용이 해야 하는 것을.
그 사실에 이진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9.
모든 사고가 그러하듯, 4회 말 1아웃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는 달아오른 그라운드의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쳇.’
그런 상황에서 타석에 서게 된 샤크스의 6번 타자 한성엽은 당연한 말이지만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격감 좋았는데······.’
사고는 언제나 여파를 만드는 법이고, 그 여파에 의해 샤크스 벤치에서는 타자들에게 새롭게 오더를 내렸다.
“평범하게, 각자 재량껏 타격하되 엔젤스 자극할 만한 짓은 하지 말도록.”
이성적으로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오더였다.
어쨌거나 샤크스의 타자가 친 공이 투수를 맞추고, 그 투수가 신음을 흘리며 강판당한 상황에서 샤크스가 점수를 내기 위해 엔젤스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무리한 무언가를 하는 건 좋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기습번트를 하거나, 타석 위에서 타자가 포수를 괴롭히기 위해 짓궂은 짓을 한다거나, 주루 플레이를 과격하게 한다거나, 주심의 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타자가 투수를 괴롭힐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사실상 봉인되는 상황이었다.
“씁.”
그건 사실 타자에게 굉장히 불공평한 일이었다.
애초에 타자들은 앞서 말한 수작을 부려도 시즌 동안 3할 타율을 유지하기 힘들었으니까.
사고가 일어난 건 안타깝지만, 안타 하나, 타점 하나, 득점 하나에 적지 않은 연봉이 오고 가는 프로선수에게는 지금 상황 역시 안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엽이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는 하나밖에 없었다.
‘투수도 갑자기 나왔을 테니까, 그걸 노려야지.’
지금 마운드 위의 투수 역시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사실상 도축 당하는 가축마냥 끌려 나오듯 마운드에 올라왔다는 것.
‘이진용이라고 했지?’
한성엽은 그 사실을 기반으로 이진용이란 투수와의 싸움을 준비했다.
‘구속이 잘 나와야 130나온다는 투수.’
그런 한성엽이 이진용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의 구속이 느리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이진용에 대해 아는 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타자가 경기를 준비할 때 나올 수 있는 모든 투수에 대해 대비하고, 준비할 필요는 없다.
선발투수와 필승조로 나오는 불펜 투수들, 추격조에 속한 투수들 그리고 좌타자의 경우에는 자신을 상대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 좌완 원포인트 투수 정도를 염두에 두면 충분하다.
패전처리를 위해 나오게 될 투수마저 신경 쓸 이유는 물론, 그런 짓을 할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하물며 상대는 최고 구속으로 130킬로미터가 간신히 나오는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 아닌가?
그런 투수를 분석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건, 쪽지 시험을 대비해서 밤샘 공부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
‘정석으로 가자고.’
당연히 한성엽은 이진용을 상대로 처음 보는 투수를 상대할 때 타자들이 쓰는 정석법을 쓰고자 했다.
‘칠 건 치고, 버릴 건 버린다.’
자신의 스트라이크존을 좁게 만든 후에 그 안에 들어오는 공만을 노리며, 슬라이더나, 커브와 같은 공은 무리하게 타격하기보다는 걷어내거나 참는 것.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온다.’
그런 한성엽을 상대로 던진 이진용의 초구는 다름 아니라 슬라이더였다.
우완투수가 우타자를 상대로 던질 경우,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종류의 슬라이더.
그렇게 던진 이진용의 슬라이더 궤적은 제법 날카로웠다.
‘애매한데?’
동시에 그 코스 역시 날카로웠다.
우타자인 한성엽의 스트라이크존, 그 존의 바깥쪽에 꽂힐 것 같은 느낌의 공이었다.
만약 한성엽이 투스트라이크 상황에 몰려 있었다면 치진 못하더라도 걷어내기 위해 배트를 휘둘렀어야 하는 공.
하지만 그 공은 초구였고, 앞서 말했듯이 한성엽은 굳이 애매한 공을 건드려서 마운드 위의 투수를 도와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대로 공을 지켜봤다.
펑!
“스트라이크!”
그 공에 주심이 곧바로 스트라이크판정을 했다.
“씁!”
그 사실에 한성엽이 짧게 혀를 찼지만, 그뿐이었다.
스트라이크 판정을 줘도 될 만한 공이었고, 혹여 스트라이크존에서 빠지는 볼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라운드의 분위기는 감히 주심에게 그런 항의를 할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샤크스 타자들이 일단은 약간 불리한 무언가를 당해도 감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 공을 본 모든 이들이 그 공에 대해 특별한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구속은 느린데, 슬라이더 각도가 날카롭네. 그런데 저 투수가 슬라이더가 주무기었나? 투심하고 체인지업이 주무기 아니었어?”
“슬라이더도 던진다고는 되어 있는데, 오늘 슬라이더 컨디션이 좋은 모양이지.”
“뭐, 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네. 결정구로 삼기에는 너무 느려.”
좋지만, 느린 슬라이더.
이진용의 초구에 부여할 수 있는 공의 의미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이것 봐라?’
오로지 한 명, 이제까지 이진용의 실전 피칭을 누구보다 많이 보고, 동시에 이진용에 대해 누구보다 지대한 관심을 가진 한 명만이 이진용이 던진 초구의 진짜 의미를 파악했다.
‘코너워크 공략을 할 속셈인가?’
황선우 기자, 그만이 조금 전 이진용의 공이 이제까지 이진용이 던진 공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설마······.’
물론 황선우 기자는 자신이 눈치챈 것을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겠지.’
자신이 생각한 것이 할 수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황선우 기자의 생각이 바뀌는 데에는 두 명이면 충분했다.
10.
이진용과 한성엽의 대결은 단순했다.
초구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잡은 이진용은 이후 한성엽의 몸쪽 낮은 코스에 패스트볼을 던져서 두 번째 스트라이크를 잡았고 투스라이크 상황에서 스플리터를 던져 한성엽으로부터 헛스윙을 끌어내며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을 잡아냈다.
그런 이진용의 피칭에 경기를 보던 좌중은 당연히 이진용이 던진 마지막 공에만 집중했다.
“조금 전 스플리터가 대단한데?”
“저런 스플리터를 가진 투수였나?”
“생각보다 무기가 많군. 하긴, 그러니까 1군까지 올라온 거겠지.”
이진용이 던진 결정구, 스플리터에 대해 모든 이들이 감탄과 찬사를 보냈다.
때문에 한성엽 다음에 배치된 샤크스의 7번 타자 김영권이 왼쪽 타석에 섰을 때, 경기를 보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는 이진용이 던진 스플리터만이 가득했다.
‘그 정도 스플리터라면 던지는 걸 알아도 바로 치긴 힘들어.’
‘구속만 느릴 뿐, 순수하게 스플리터의 낙폭이나, 움직임만 보면 리그 정상급 수준이야.’
김영권 본인도 그랬다.
‘미치겠네.’
그의 머릿속에도 이진용이 한성엽을 상대로 헛스윙을 끄집어낸 스플리터만이 아른거렸다.
당연히 김영권은 무리한 타격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패스트볼은 조심하자.’
일단 그는 패스트볼을 의심하기로 했다.
‘존에 들어오는 건 스플리터일 확률이 높아.’
특히 스트라이크존 높게 오는 패스트볼에 대해서는 섣부른 타격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진용이 자신을 상대로 초구로 던진 바깥쪽 높은 포심 패스트볼을 그냥 지켜만 봤고, 그 후에 이진용이 2구째로 김영권의 몸쪽으로 던진 투심 패스트볼 역시 그냥 지켜만 봤다.
“스트라이크!”
그렇게 이진용이 던진 포심 패스트볼에 주심이 스트라이크 콜을 하는 것도 그냥 듣기만 했다.
“스트라이크!”
그리고 몸쪽으로 들어오는 투심 패스트볼에도 주심이 스트라이크 콜을 하는 것을 그냥 듣기만 했다.
후웅!
그 후에 이진용이 마치 칠 수 있으라면 치라는 듯이 던진 스플리터 앞에서 그는 헛스윙을 헌납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더 순식간에 떨어지는 스플리터는 고작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칠 수 있는 공이 아니었기에.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게 주심이 4회의 마지막 아웃콜을 선언하는 순간 경기를 보는 선수들도, 기자들도 모두가 놀라며 말했다.
“스플리터 정말 좋네.”
“한두 번 보고 공략할 수 있는 공은 아니야.”
“샤크스 타자들이 골치 아프겠어.”
모두가 이진용이 놀라운 무기를 장착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그게 아니었다.
‘확실해.’
정말 놀라운 건 이진용의 피칭 스타일이었다.
‘코너워크 공략을 하고 있어.’
황선우, 그가 아는 이진용은 스트라이크존에 과감하게 공을 넣어서 공격적인 피칭을 하는 투수였다.
안타를 맞든, 안 맞든 어쨌거나 타자로 하여금 그라운드로 공을 나오게 만드는 투수.
홈런을 맞을지언정 볼넷은 주지 않는 투수.
때문에 이진용은 반대로 스트라이크존의 좌우 경계선을 노리는 피칭, 일명 코너워크 피칭은 하지 않았다.
어설픈 코너워크 피칭은 볼넷 남발과 투구수 낭비라는 최악의 결과물로 이어지니까.
‘이제까지는 오히려 코너워크 피칭을 피했었는데······.’
결정적으로 코너워크 공략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보통은 영점을 잡기만 해도 제구가 나쁘지 않은 투수로 평가를 받는다.
만약 스트라이크존의 좌우를 공략하는 코너워크를 하는 피칭을 한다면 그 투수는 제구력에서 아주 좋은 점수를 받는다.
물론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는 스트라이크존의 위아래마저 공략하는 것이지만, 이 정도 제구가 가능하다면 그건 리그 최정상급 수준의 제구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스트라이크존의 좌우폭은 홈플레이트를 기준으로 삼지만, 위아래는 타자의 신장과 타격폼을 기준으로 삼고, 그렇기에 스트라이크존의 위아래 폭은 타자마다 다르니까.
어쨌거나 이진용은 지금 코너워크 피칭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코너워크 피칭을 통해 2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도망가는 건 아니야.’
더 중요한 건 그 결과물이 이진용이 도망가는 피칭, 피하는 피칭을 해서 나온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제까지 이진용은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만약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지금 마운드 위에도 없을 테니까.
‘제구에 자신이 생겼다는 건가?’
즉, 이런 피칭을 하는 건 이진용이 이제는 이런 피칭을 할 자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순간 황선우 기자는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이진용이란 투수를 조합했다.
그가 가진 능력을 다시금 조합했고 동시에 이진용이란 인간에 대해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러자 그림이 그려졌다.
‘수싸움에 능한 투수에게 뛰어난 제구력은 아서왕에게 엑스칼리버를 쥐여준 것과 같지.’
멋진 그림이.
11.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의 삼진 아웃 콜이 나오는 순간 이진용은 흐트러진 모자를 고쳐 쓰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나지막이 소리쳤다.
“호우.”
나지막했지만, 처음 1군에 올라와서 최초로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 그때 내지른 외침보다는 큰 소리였다.
큰 목소리만큼 이진용이 보다 큰 확신과 자신감을 가졌다는 증거였다.
‘2타자 연속 삼진. 준비한 공략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 그리고 준비한 공략대로 공이 컨트롤되고 있어.’
이제는 1군이란 무대, 프로야구무대에서 충분히 실력을 인정받고, 그 실력만큼의 대우를 받을 자신이 있다는 증거.
그리고 오늘 자신이 준비한 것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
하지만 자신감은 있을지언정 확신은 없었다.
때문에 이진용은 질문했다.
“김진호 선수.”
– 왜?
“오늘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김진호는 이진용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 입에 발린 말을 해주기를 원하냐, 아니면 냉정하게 말해주기를 원하냐?
“냉정하게요.”
이진용이 대답했다.
– 컨트롤 마스터 스킬 덕분에 코너워크 제구가 되기 시작했고, 스플리터는 끝내주고, 일일특급 효과는 슬라이더에 적용된 상황. 컨디션은 최고조고, 체력도 만땅.
그 대답에 김진호가 냉정하게 이진용이 처한 상황을 분석해줬다.
– 여기에 오늘 경기에 출전할 것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고, 앞선 이닝 동안 타자들 분석도 완료. 경기 흐름 파악도 완료. 그리고 조금 전 두 명의 타자를 상대로 네가 준비한 작전이 통한다는 것도 확인 완료.
일단 이진용의 상태를 분석했다.
– 반면 불의의 사고로 그라운드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고, 네가 상대할 샤크스 타자들은 이기고 있는 게임에서 갑작스럽게 등판한 투수를 상대로 아주 신사답게 매너를 지키는 상황.
그다음에 이진용이 상대할 자들을 분석했다.
– 결정적으로 샤크스 벤치에서도 팀의 에이스가 나오고, 이미 5점이나 득점한 상황에서 타자들에게 득점을 내라는 오더보다는 수비에 집중해서 점수를 지키라는 오더를 내리겠지.
그렇게 분석을 마친 김진호가 말했다.
–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내가 지금 이진용, 네 처지였다면 감독에게 가서 이렇게 말할 거다.
“뭐라고요?”
– 호우주의보 발령하겠다고.
메이저리그의 지배자였던 위대한 투수의 냉정한 판단의 결과에 이진용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발령해야죠.”
이진용, 그가 이제 자신을 넘어 확신을 가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