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77
9.
“호오오······.”
일반 사람이라면 그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길게 내뱉을 정도, 그 정도의 시간.
‘3볼 1스트라이크 상황. 여기서 장병헌이라면 무조건 하나를 노리고 스윙한다. 준비한 계획대로라면 스플리터나 높은 라이징 패스트볼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2스트라이크 상황에 몰아넣은 후 잡는 것. 하지만 오늘 타격감이 별로란 걸 염두에 두면······ 투심으로 맞혀 잡는다.’
“······우우우.”
그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계산을 마친 이진용이 이호찬과 사인을 교환한 후 공을 던졌다.
그렇게 던진 공은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그러나 타자 입장에서는 그건 투심 패스트볼이 아니었다.
마치 포심처럼 곧게 날아오다, 포심 패스트볼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은 타자가 휘두른 배트와 부딪치는 순간 뱀처럼 휘어지는 그 마법과도 같은 공에는 다른 이름이 필요했으니까.
빡!
그 마법과도 같은 공에 데블스의 9번 타자, 장병헌의 배트가 비명을 토해냈다.
“윽!”
타자 본인도 비명을 토해냈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비명이었고, 그 비명 소리를 배경음 삼은 채 튀어나온 타구가 그대로 유격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갔다.
이진용이 8회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유격수 앞 땅볼로 잡아 끝내는 순간이었다.
그 사실에 언제나 그렇듯 이진용은 내뱉었다.
“호우.”
그러나 이번에 내지르는 그 소리는 환호성이라기보다는 긴 탄식과도 같이 들렸다.
실제로도 탄식이었다.
그 탄식의 이유는 이진용이 이닝 종료와 함께 바라본 전광판에 명명백백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0대0.
– 내가 말했지?
그 숫자를 바라보는 이진용을 향해 김진호가 말을 걸었다.
– 네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있다고.
그 말에 이진용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슴 언저리에 무언가 답답한 것이 꽉 막은 채 그의 말문을 막은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 답답하지? 가슴에 뭔가 묵직한 게 걸려 있어서 미칠 것 같지?
김진호는 그런 이진용에게 말해줬다.
– 그게 부담감이란 거야.
지금 이진용의 가슴 언저리에 있는 게 무엇인지.
– 에이스의 부담감. 무엇을 하든 자신이 나오는 경기에서는 기필코 이겨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감.
이진용, 그는 이제까지 부담감이란 걸 느껴본 적이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일단 잃을 게 없었다.
한 달 전의 이진용은 프로의 마운드에 오를 수만 있다면 당장 마운드에 올라 1이닝 10실점을 하더라도, 만족해야 마땅한 투수였다.
– 나만 잘하면 돼, 타자들이 뭘 하든 내 알 바 아니야, 그런 생각만 하는 평범한 투수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부담감이지.
동시에 이진용은 타자들이 점수를 내든 말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만 잘하면 됐으니까.
타자들이 어떤 점수를 내든 이진용에게 중요한 건 그날 자신의 성적뿐이었다.
– 하지만 에이스는 아니지.
그리고 그게 대부분 투수들이 가지는 심리였다.
만약 경기에서 투수가 7이닝 2실점의 피칭을 했다면, 그날 경기에서 패배를 하더라도 투수는 연봉이 인상된다.
그 누구도 그 투수를 패인으로 지목하며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이진용도 그랬다.
타자들이 지랄을 하든 말든, 솔직히 짜증은 날지언정 그 사실에 이진용이 부담감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 그래서 에이스가 남다른 거야.
그러나 오늘 이진용은 달랐다.
그는 오늘 다른 무엇도 아닌 엔젤스의 에이스 자리를 빼앗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이진용에게 있어 오늘 게임은 다른 무엇보다 승리가 중요한 게임이 되었다.
– 네가 아무리 잘해도 팀이 이기지 못하면 안 돼. 5선발 투수야 호투만 하면 되겠지만, 에이스 투수가 나오는 게임은 무조건 이겨야 하니까.
김진호는 말과 함께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엔젤스의 타자들을 비웃음을 지은 채 바라봤다.
김진호는 당연히 이진용이 1군에 올라오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팀은 글렀어. 엔젤스 타자들 보는 순간 느낌을 받았지. 아, 이 새끼들 우승할 마음도 없고, 할 줄도 모르는 허접쓰레기들이구나.
그런 김진호에게 마운드를 내려오던 이진용이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말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합니까?”
– 하나, 선수들을 뒤집어엎는다.
“둘은요?”
– 벤치를 뒤집어엎는다.
“셋은 감독 멱살을 잡는다, 입니까?”
– 그건 한 여섯 번째쯤 되고, 세 번째 방법은 코치랑 한바탕 푸닥푸다닥거리는 거야.
이진용은 김진호의 말에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그냥 그대로 이를 꽉 물었다.
침묵을 고수했다.
이진용은 이 순간 김진호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김진호가 정말로 해야 할 말을 말했다.
– 뭐든 일단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란 의미다. 너 오늘 타자들하고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 있긴 하냐?
그 말에 이를 꽉 문 이진용이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야······.”
– 포수 빼고.
이진용은 대답하지 못한 채 더그아웃을 안으로 들어갔다.
– 야구는 팀 게임이다. 그리고 팀 게임에서 중요한 건 대화다.
그런 이진용을 따라 더그아웃에 들어오며 이진용에 설명을 이어갔다.
– 아무리 10년 이상 함께 한 팀이라고 해도 눈빛만으로는 안 통해. 하물며 넌 이들하고 10년은커녕 이제 1군에 온 지 한 달도 안 됐어. 그런데 엔젤스 타자들이 네 눈빛만 보고 네 마음과 생각을 읽어준다면 그냥 야구 때려치우고 타짜로 전직해야지.
야구는 팀 게임이다.
수도 없이 들었던 그 말이 이진용은 오늘 가장 뼈저리게 가슴을 파고듦을 느꼈다.
동시에 시급함을 느꼈다.
‘김진호 선수 말대로 대화가 필요해.’
정말 승리를 하고 싶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타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 팁을 주지.
그런 그를 다시 한 번 김진호가 막았다.
– 네가 진심으로 나온다고 해서 다들 진심으로 받아주리란 생각은 하지 마. 너도 알겠지만, 이 바닥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할수록 평범한 놈보단 맛이 간 놈들 천지이니까. 심지어 자존심 덩어리들이지. 그런데 가서 오늘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는 당신들이 점수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을 하던 김진호가 글러브 대신 배트를 챙기는 타자들을 바라봤다.
– 진용아, 저들 중에 누가 너한테 갑자기 와서 오늘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이진용, 네가 10이닝 이상 던지면 돼! 그렇게 말하면 넌 뭐라고 말할 거야? 꺼져 이 호로 새끼야, 확 호우해버리기 전에! 그러겠지. 안
그래?
이진용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그대로 침묵에 빠졌다.
당연히 대화는 없었다.
대화 없이 8회 말이 시작됐다.
엔젤스 타자들은 어떻게든 선취점이자, 결승점이 될 점수를 내기 위해 배트를 휘둘렀다.
“크다! 크다!”
“아, 젠장 펜스 앞에서 잡히네!”
열심히 휘둘렀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 너무 스윙이 컸어!”
때로는 기다렸다.
“스트라이크!”
“아오! 좋은 공만 기다리면 뭐해! 커트해야지!”
그뿐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
8회 말, 엔젤스는 삼자범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손에 쥔 채 이닝을 마쳤다.
이제 9회가 시작됐고, 당연히 이진용이 점퍼를 벗고 글러브를 챙겼다.
엄숙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더그아웃을 가득 채웠다.
‘이러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일 일어나는 거 아니야?’
‘미치겠네. 쟨 더 미치겠지만.’
이제는 9이닝 무실점을 거둔 투수가 완봉승은커녕, 승리도 패배도 기록하지 못한 채 그저 9이닝 무실점 피칭을 한 투수로 남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긴장감이었다.
그 긴장감 속에서 김진호가 이진용을 향해 말했다.
– 난 줄 팁은 다 줬다.
그 말에 이진용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김진호의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한 이진용의 찌푸려진 미간이 풀렸다.
‘아! 그거!’
그 반응에 김진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10.
9회 초의 시작과 함께 이진용이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 그 사실에 의문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이호우 파이팅!”
“호우다, 호우! 제발 호우 세 개만 가자!”
엔젤스 팬들은 이진용의 호우 소리를 갈망하듯, 그가 다시 한 번 호투를 펼쳐주기를 바랐다.
동시에 데블스 팬들도 만족했다.
“호우 소리 듣는 것도 이번 이닝으로 끝이네.”
“연장에서 끝장을 보자고.”
이번 이닝을 끝으로 더 이상 호우 소리를 들을 일은 없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시작된 9회 초는 이진용에게 있어 오늘 이닝 중에 가장 힘든 이닝이었다.
선두 타자와의 승부부터 힘들었다.
“볼!”
“볼넷이다!”
이진용이 선두타자를 상대로 볼넷을 내주었다.
바깥쪽 승부를 시도했으나, 실투가 몇 번 나왔고 동시에 타자가 너무나도 잘 골라낸 결과물이었다.
“희생번트다!”
그 후 다음 타자는 희생번트를 시도했다.
이진용은 굳이 무리하지 않고 그 번트를 허용해줬다.
1아웃카운트를 잡는 대가로 주자가 2루에 가는 것을 이진용은 마다하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 후 이진용은 삼진을 잡았다.
결정구는 스플리터.
이진용이 희생번트는 기꺼이 용납해준 이유이자, 근거였다.
그렇게 단숨에 주자 2루에 둔 채, 2개의 아웃카운트를 만들어낸 이진용은 투심 패스트볼을 이용해 땅볼을 유도했다.
“끝이······.”
유격수 앞으로 날아가는 땅볼, 오늘 수도 없이 처리했던 땅볼이었다.
“······다?”
“아!”
그러나 그 공을 유격수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야이 병신 새끼야!”
“고마워요 엔젤스!”
그렇게 유격수가 허둥지둥하는 사이 2루 주자는 곧바로 3루로, 타자주자는 1루에서 멈췄다.
주자 1,3루.
9회 초 2사 상황에서 데블스가 득점기회를 얻은 것이다.
반대로 투수 입장에서는 가장 미치는 상황이 펼쳐졌다.
“와, 이진용이 멘탈 나가겠네.”
“저건 멘탈 나가는 정도가 아니지.”
“이진용이 오늘 유격수한테 죽빵 날려도 정당방위 인정?”
다 잡은 경기를 이제는 잡지 못하면 패전투수가 될 상황이 마련됐으니까.
하지만 이진용은 그런 상황 속에서 도리어 무덤덤하게, 담담하게 다음 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냈다.
스플리터 3개.
보란 듯이 똑같은 구종 세 개만을 던져서 타자를 세 번 헛스윙하게 만들었다.
“호우!”
그 사실에 기꺼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 사실에 경기를 보던 이들이 이진용을 향해 박수와 함께 쓴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엔젤스 빠따 보면 9회 말에 점수 안 나올 텐데, 끝났네.”
“9이닝 무실점하고 승리투수 못되면 억울해서 어떻게 하냐?”
그 순간 경기를 보는 모든 이들은 호투가 아니라, 분투가 되어버린 이진용의 피칭에 동정을 보냈다.
그렇게 동정 가득한 박수 소리 아래에서.
처벅처벅, 마운드를 내려온 이진용이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수고했다.”
“잘했어!”
그리고 이내 나오는 선수 그리고 코치들의 격려 속에서 이진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반으로 잘린, 오른쪽만 남아있는 점퍼를 그 자리에서 입었다.
‘어?’
‘뭐야?’
그 순간 더그아웃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오직 한 명.
– 짜식.
김진호만이 이진용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진용!”
그 순간 봉준식 감독이 이진용을 자신의 근처로 불렀다.
11.
10이닝 피칭.
어떤 의미에서 완투보다 더 보기 힘든 피칭이다.
애초에 모든 투수는 9이닝만을 던지도록 연마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불태우니까.
막말로 9이닝이 됐을 때 그 어떤 투수도 10회를 염두에 두고 여력을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9회라는 마지막 이닝에 불태우고 하얀 재가 되고자 하지.
좀 더 들어가면 혹여 투수 본인이 여력을 남겨두더라도 코칭스태프가 투수의 등판을 허락하지 않는다.
10이닝 피칭이 몸에 미칠 영향, 피로는 이제까지 제대로 검증된 바가 없는 일이니까.
1이닝을 더 던지기 위해 투수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코칭스태프는 없으니까.
“10회에도 등판하겠습니다.”
때문에 이진용이 원하는 바를 말했을 때, 봉준식 감독은 허락 대신 요구했다.
“날 설득해보도록.”
“제가 제일 잘나가니까, 제가 나가야죠.”
그 대답에 봉준식 감독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진용을 바라봤다.
“아, 농담입니다. 죄송합니다.”
그 표정에 이진용이 황급하게 사과했다.
곧바로 진짜 이유를 말했다.
“감독님은 9이닝 무실점을 하고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다면 납득하실 수 있으십니까?”
“납득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게 리스크를 감수하고 널 마운드에 올릴 이유는 되지 않는군.”
“예. 하지만 제가 10회에도 마운드에 오르는 게 오늘 경기를 이길 가능성을 1퍼센트라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근거는?”
“선발투수가 10회까지 던지면 타자들이 미안해서라도 제 벌금을 대신 내줄 정도로 열심히 할 테니까요.”
그 말에 봉준식 감독은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 한숨을 내뱉던 봉준식 감독이 선글라스를 벗은 후에 자신의 눈과 눈 사이를 주물렀다.
그리고 다시 선글라스를 쓴 봉준식 감독이 이제 시작되는 9회 말의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1996년 7월, 메이저리그의 투수 한 명이 너랑 비슷한 짓을 했다. 9이닝 무실점 피칭을 했음에도 팀은 점수를 내지 못해 승부가 연장으로 넘어갔고, 그렇게 시작된 10회 초에 마운드에 올라갔지. 하지만 10회 말에도 점수는 나오지 않자, 투수는 11회까지 올랐고 결국 11회에 첫 실점을 했지.”
과거의 이야기를.
“그런데 11회 말 타자들은 역전 투런 홈런을 때리며 11이닝 피칭을 마친 투수를 승리투수로 만들어줬지.”
메이저리그에서도 전설로 남은 11이닝 완투승 이야기를.
“그 투수가 누군지 아나?”
“1996년 7월 1일, 카디널스 대 컵스의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출전한 김진호 선수였죠.”
김진호, 그의 이야기를.
“그 투수가 그 후에 남긴 말도 알고 있나?”
“난 믿었습니다. 내 팀원들이 내게 승리를 가져다주리라고.”
이진용의 그 말에 봉준식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10회까지만 던지면 된다.”
허락이 떨어졌다.
“그럼 10회 말, 타자들이 네게 조금 늦지만 승리를 가져다줄 거다.”
그와 동시에 봉준식 감독은 이진용에게 자신이 불어넣을 수 있는 가장 큰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감사합니다.”
그 사실에 이진용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반면 김진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 내가 그 경기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이상하네······ 그때 11회에도 등판한 건 팀원들하고 말이 안 통해서 그냥 무력시위를 한 건데?
그리고 잠시 후, 엔젤스가 9회 말 득점을 하지 못하며 한국프로야구위원회의 규정에 따라 연장전인 10회가 시작됐을 때.
“어? 호우다!”
이진용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