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83
10.
컷 패스트볼.
– 커터? 좋지.
일명 커터.
슬라이더와 비슷하게 횡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구종으로, 슬라이더보다는 움직임이 크지 않은 대신 구속은 더 빠른 구종으로, 이런 커터가 본격적인 유행을 시작한 건 21세기의 시작과 함께였다.
– 투심과 커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면 홈플레이트 위에서 좌타자와 우타자를 상대로 똑같이 지랄을 할 수 있으니까. 나? 난 커터를 잘 쓰지 않았어. 이유? 내가 아무리 커터를 연구하고, 연마해도 그만큼은 못 던질 테니까.
그리고 그 커터의 유행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무리투수의 시대와 함께 이루어졌다.
– 리베라, 그만큼 말이야.
샌드맨 마리아노 리베라.
– 나보고 랜디 존슨 수준의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한다면 난 분명히 말할 수 있어. 던질 수 있다고. 하지만 나보고 리베라 수준의 커터를 던질 수 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거야. 여기 코카인을 빤 미친놈이 있는 거 같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커터의 유행과 함께 무수히 많은 투수들이 커터를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들은 리베라의 커터를 자신들이 추구하는 절대적인 이상향으로 삼았다.
– 리베라의 커터는 그랬어. 남다른 게 있었지. 단순히 보이는 것 이상의 남다른 무언가가.
때문에 많은 투수들과 야구 관계자들 그리고 리베라의 커터를 상대해야 하는 타자들은 리베라의 커터를 연구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 일단 리베라의 커터는 빨라. 포심이 95마일이 나오는데 커터가 93마일이 나오거든.
김진호도 그중 한 명이었다.
– 두 번째는 컨트롤이야. 리베라는 실수로라도 타자의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 공을 넣지 않을 정도로 컨트롤이 뛰어났어. 매덕스가 스트라이크존의 원하는 곳에 다트를 던지는 느낌이었다면, 리베라는 스트라이크존의 원하는 곳을 칼로 케이크 자르듯 자르는 느낌이었지.
그 역시 리베라의 커터에 대해 연구했다.
– 세 번째는 다양성. 리베라는 다양한 커터를 가지고 있었어. 때로는 종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종슬라이더 같은 커터도 던졌고, 아주 중요할 때만 쓰는 특수한 커터를 숨겨둔 채 포스트시즌에서만 써먹고는 했지.
그리고 알아냈다.
– 마지막 네 번째는······ 일부러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배트를 쪼개기 위해 공을 던지는 거였지.
리베라의 커터가 단순한 공을 넘어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마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 그리고 타자의 배트를 진짜 쪼갰고.
그 비결은 다름 아니라 타자의 배트를 쪼개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 그게 진짜 비결이었어. 이유? 생각해봐. 타자들이 투수들의 공을 공략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그래, 그 투수의 공을 확실하게 이미지화하는 거지. 스윙 연습도 이미지화가 제대로 된 채로 연습해야 의미가 있지, 이미지화조차 안 됐는데 스윙 천 개 하고, 만 개 하면 그냥 스윙 연습일 뿐이잖아?
그건 단순한 퍼포먼스가 절대 아니었다.
– 그런데 리베라의 커터를 이미지화한다고 생각해봐. 당장 너만 해도 리베라하면 그의 커터가 좌타자의 배트를 쪼개는 것부터 머릿속에 떠오를 걸?
오히려 반대, 고도의 전략이었다.
– 그리고 좌타자에게 있어서 그건 소름이 돋는 일이지. 배트가 쪼개진다는 건 공이 배트의 얇은 부분을 맞았다는 건데, 그보다 좀 더 그립 쪽에 가까이 맞았다면? 그때는 배트가 아니라 손가락이 쪼개지지. 천만 달러짜리 활약을 해야 하는 타자가 시즌 아웃을 당할지도 모르는 공포감이 이미지화되는 거야. 그 순간 타자들이 치기 싫어지는 마구가 탄생하는 거지.
리베라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의 주력 무기를 위대한 무기로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작업이었다.
– 명심해. 커터의 완성은 배트를 쪼개는 거다. 쪼개지는 순간 커터는 마구가 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빠각!
“맙소사!”
“지금 배트 쪼갠 구질 뭐지?”
“설마 커터?”
이진용, 그가 그 작업을 마쳤다.
11.
6회 말, 이진용이 꺼내든 커터 앞에서 레이번스의 모든 타자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저런 게 있었어?”
“미친놈, 저런 커터를 이제까지 숨겨두고 있었단 말이야?”
레이번스 타자들 그리고 코칭스태프들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나마 우타자나 코치들은 탄식을 내뱉는 선에서 멈출 수 있었다.
“씨발.”
“진짜 씨발.”
“에이 진짜 씨발.”
하지만 좌타자들은 탄식을 넘어 절망마저 내뱉었다.
좌타자들에게 우완투수가 던지는 커터는 그런 공이었다.
좌타자는 우완투수를 상대로 유리하다, 라는 통상적인 논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공.
실제로 리베라의 전성기 시절에는 우완투수인 그를 상대로 스위치히터들, 양손 타자가 좌타석이 아니라 우타석에 섰던 적이 있었다.
뛰어난 커터를 가진 우완투수들은 좌타자들에게 공포의 대상과도 같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젠장, 커터가 제일 싫은데······.”
더욱이 한국프로야구리그에서 커터는 아직 유행이 되지 않은, 때문에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투수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당연히 타자들 입장에서는 꽤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구종이었다.
“저 커터, 보통 커터가 아니야.”
결정적으로 이진용의 커터는 그냥 커터가 아니었다.
“구속이 133이 찍혔어. 패스트볼만큼 빠르다고.”
“갑자기 몸쪽으로 들어왔어. 무브먼트가 저놈이 던지는 투심 수준이야.”
구속은 133킬로미터, 이진용의 패스트볼만큼 빠르며 무브먼트는 이진용의 투심 패스트볼에 버금갈 정도로 날카로운 공.
“배트 쪼개진 거 봐. 위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거야.”
그리고 배트를 부숴버릴 정도로 위력적인 공!
지금 이 순간 레이번스 타자들의 머릿속에 이미지화된 이진용의 커터는 그런 공이었다.
배트 브레이커!
‘일부러 이진용을 잡으려고 좌타자들을 평소보다 더 배치했는데······ 이제 악몽이 되겠군.’
‘우타자라서 다행이야.’
때문에 레이번스 타자들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 사실, 이진용이 던진 커터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대체 왜 이진용은 1회가 아니라 6회에 이르러서야 이 커터를 꺼냈을까?
그 사실을 깨닫게 해준 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이진용, 본인이었다.
6회 말 2사 상황, 다시 한 번 좌타자를 맞이한 이진용은 그 좌타자를 상대로 커터를 이용해 땅볼을 이끌어내며, 단숨에 6회 말을 종료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타자를 잡았음을 눈이 아닌 귀로 확인케 해줬다.
“호우!”
이진용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환호성은 이제까지 이진용이 내지른 환호성과 전혀 다른 환호성이었다.
‘응?’
‘어?’
이진용, 그가 자신들의 팬들로 가득한 1루쪽 관중석이 아닌 3루쪽 더그아웃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이 게임은 내가 지배한다!
그 선포를 들은 후에야 레이번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기세가 넘어갔다.’
이진용, 그가 6회에 커터를 꺼낸 것은 아주 주도면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12.
야구는 기세 싸움이란 말이 있다.
사실 야구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이 붙는 모든 것은 기세 싸움이다.
기세를 타면 약자도 승자가 될 수 있고, 기세를 잃으면 강자도 패자가 될 수 있다.
하물며 비슷한 전력, 누가 이겨도 이상할 게 없는 전력 간의 충돌이라면 사실상 기세를 가진 쪽이 승리를 가져가게 된다.
때문에 그 기세를 가져오거나 혹은 지키기 위해 선수와 코칭스태프는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대개 그러한 수단과 방법을 작전 혹은 전략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자를 흔히 에이스라고 부르고는 한다.
빠각!
“크윽!”
– 배트가 부러졌습니다! 타구가 힘없이 유격수 앞으로 굴러갑니다. 박해영 선수 달립니다. 유격수가 공을 잡고, 송구합니다. 주심이 주먹을 쥡니다.
– 아웃이네요.
그리고 6월 1일, 이진용은 자신이 그 에이스임을 마운드 위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 7회 말, 이진용 선수가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하며 오늘 쾌조의 피칭을 이어갑니다.
7이닝 2피안타, 볼넷은 하나도 없는 무실점 피칭.
– 투구수는 7회까지 81구입니다!
– 효율적인 피칭의 정수를 보여주네요. 정말 대단해요. 대단합니다.
– 이 정도 페이스라면 100구 미만의 투구수로 9이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투구수는 7회까지 고작 81구.
– 충분합니다. 심지어 이진용 선수의 오늘 피칭은 오히려 6회부터 힘이 더 붙는 듯합니다.
– 그렇지요. 당장 배트만 두 자루째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이진용은 1회 때보다 더 위력적인 모습을 7회에 보여주고 있었다.
– 지금 레이번스 타자들은 이진용 선수를 상대로 점수를 내겠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제 현역 시절 경험을 본다면, 대개 이런 상황에서는 뭐 저런 놈이 있어? 이런 생각만 들지요.
133킬로미터짜리 커터를 이용해 타자의 배트와 함께 그들의 전투의지를 꺾고 있었다.
“이진용 장난 아니네.”
“우타자 상대로는 투심으로 땅볼 유도하고, 좌타자 상대로는 커터로 땅볼 유도하고.”
“둘 다 안 먹히면 스플리터로 삼진을 잡고.”
“구속 빼면 완전체네, 완전체야.”
그 사실에 기자석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진심 어린 감탄을 아끼지 않고 토해냈다.
“대단하네요.”
황선우의 후배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이번스를 압도하네요, 이번 시즌이 프로 시즌 처음인 놈이.”
그 역시 7회 말을 완벽하게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가는 이진용을 향해 감탄을 내뱉었다.
그런 후배 기자의 모습에 황선우가 미소를 지었다.
“진짜 대단한 건 6회에 커터를 꺼냈다는 거지.”
“예?”
“만약 1회에 커터를 꺼냈다면 이진용은 오늘 경기 운영을 훨씬 더 편하게 할 수 있었겠지. 안 그래?”
“그, 그랬겠죠.”
“그런데 이진용은 오히려 힘을 모으고, 6회에 숨겨진 비장의 한 수를 꺼냈지.”
“왜죠?”
“기세를 가져오기 위해서.”
“기세요?”
말을 하던 황선우가 이제는 8회 초를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는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안찬섭 대 이진용의 매치업에서 점수가 많이 나올 가능성은 없지. 5회까지는 박빙의 승부, 다르게 표현하면 5회까지는 그 누구도 승기를 가져가기 힘든 경기일 게 뻔하지. 그리고 실제로 경기 내용도 그랬고.”
황선우의 말대로 오늘 경기는 놀라운 수준의 투수전이었다.
5회까지를 봤을 때, 이진용은 고작 2개의 피안타를 내주는 피칭을 하고 있었고 안찬섭은 볼넷만 2개를 내준 채 노히트노런 페이스를 고수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 누구도 오늘 경기의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진용이 6회에 커터를 던짐으로써 기세를 가져왔지. 그가 커터를 던지는 순간 오늘 경기가 박빙이라고 생각하던 레이번스 타자들은 위기감을 느꼈을 테니까. 중요한 순간에 강력한 무기를 꺼냄으로써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거지.”
그런 상황에서 6회에 이진용이 꺼낸 커터는 분명 경기의 분위기를, 기세를 엔젤스에게 가져오게 해줬다.
“문제는 그렇게 빼앗긴 기세를 가져올 방법이 레이번스에는 없다는 점이지.”
그러나 지금 레이번스는 이 상황을, 빼앗긴 기세를 다시 빼앗아올 수가 없었다.
“적어도 안찬섭이 1회보다 더 강한 모습을, 더 강렬한 모습을 혹은 새로운 모습을 이제부터 보여주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아!”
그제야 후배 기자는 이해한 듯, 황선우가 보는 것과 비슷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그런 후배 기자를 옆에 둔 황선우가 말을 이어갔다.
“저게 진짜 에이스지.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경기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팀의 승리를 위해 경기를 준비하는 것.”
그 순간 마운드 위로 안찬섭이 올라왔다.
그 안찬섭을 본 황선우가 조소를 머금었다.
“그게 유현을 뛰어넘는 재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던 안찬섭의 복귀전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고.”
8회 초가 시작됐다.
13.
8회 초가 시작됐을 때 엔젤스의 더그아웃은 다시금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점수를 내기 위해, 마운드 위에 있는 투수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진용 역시 다음 8회 말을 위해 두 눈을 감은 채 집중력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런 이진용의 표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쉽지 않네.’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체력의 유무를 떠나서, 7이닝 동안 공을 던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힘든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에이스이기에, 이겨야 하기에 하지만 여전히 0대0이라는 상황이기에 느끼는 부담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 진용아, 힘들지?
그런 이진용에게 김진호가 말을 걸었다.
– 힘내게 노래 불러줄까? 응?
그 순간 김진호의 말에 이진용이 두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 짜식, 너무 긴장하지 마.
그제야 부담감에서 조금은 해방된 이진용을 보며 김진호가 슬쩍 마운드로 고개를 돌렸다.
– 어차피 이번 이닝에 점수가 나올 테니까.
이어진 김진호의 말에 이진용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김진호를 바라봤다.
– 그 눈빛은 뭐야? 내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 응? 내가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아?
이진용이 대답 대신 눈을 좀 더 게슴츠레하게 바꿨다.
– 야, 나 김진호야!
이어진 김진호의 말에도 이진용은 자신의 표정을 풀지 않았다.
결국 김진호가 말했다.
– 오냐, 내가 얼마나 위대한 투수인지 똑똑히 보여주지. 이제부터 예언을 해주마.
말과 함께 김진호가 마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 일단 안찬섭이 8회 초구로 패스트볼을 던질 거야. 그리고 구속은 150 정도가 찍힐 거야.
그 말에 이진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안 됐으니까.
현재 안찬섭은 구속이 경기 초반에 비해 내려간 상황이었다.
당장 7회만 보더라도 그가 던진 패스트볼 중에 150을 넘는 공은 단 1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7회를 끝으로 안찬섭의 투구수는 100구를 넘어섰다.
그런데 8회에 150이 넘는 패스트볼을 던진다?
그때였다.
펑!
“와!”
“맙소사!”
공이 포수 미트에 꽂히는 어렴풋한 소리와 함께 더그아웃으로 경악 어린 소리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151이라니!”
“미친놈, 8회에 150넘는 공을 던진다고? 투구수가 이미 100구가 넘어갔는데?”
그 뒤를 이어 구체적인 숫자가 나왔다.
그 사실에 이진용이 게슴츠레한 눈을 크게 뜬 채, 놀란 눈으로 김진호를 바라봤다.
– 말했지? 150넘는 공이 나온다고.
이진용이 기세등등해진 김진호를 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어떻게 아셨죠?
– 간단해. 지금 안찬섭은 땅딸보에 못생긴 허접쓰레기 또라이 투수에게 지기 싫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찼거든. 아니, 자신이 진다는 걸 상상조차 못하겠지.
자신을 향해 덕지덕지 붙여준 미사여구에 이진용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 하지만 이대로 가면 누가 보더라도 질 것 같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감독을 찾아가서 저 못 던지겠으니 필승조로 바꿔주시죠, 라고 말할까? 아니면 씨부럴 새끼들아 난 살아있어! 살아있다고 이 씨부럴 새끼들아! 마운드 위에서 그렇게 외치려고 할까?
“씨부럴.”
이진용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 그래, 그러니까 이 악물고 공을 던지는 거고 그게 150짜리가 나온 이유이지.
말을 하던 김진호가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마운드를 바라봤다.
– 하지만 이 좀 악문다고 다시 구속이 회복되면 이 세상에 빠른 공 못 던지는 투수가 있을 리 없잖아? 분명 안찬섭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났어. 그런데 150이 넘는 공이 나온다? 뭔가 이유가 있을 수밖에.
“150이 넘는데, 공이 한가운데 몰리는 거 같은데?”
“릴리스 포인트도 분명 달라.”
그 순간 벤치를 채우고 있는 타자들이 마치 김진호의 말에 대답하듯 말을 뱉었다.
프로이니까.
아무리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 단 1점도 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1군이라는 무대, 엔젤스란 팀의 주전 선수로 살아남았으니까.
– 구속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속만 내기 위한 피칭이 시작된 거야.
때문에 그들은 지금 안찬섭이 보여주는 타오름이 꺼지기 직전 불꽃의 타오름과 다를 바 없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 아마 선두타자는 아웃으로 잡겠지. 그래도 갑자기 150짜리 공이 나왔으니까. 두 번째 타자도 아마 잡을 거야. 2아웃까진 잡겠지.
김진호는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간 분석을 했다.
– 그러나 2아웃을 잡고 그다음 타자를 상대로 안타를 맞거나 볼넷을 내줄 거야. 만약 거기서 안타를 맞는다면, 그나마 안찬섭을 움직이게 해주던 긴장의 끈이 끊어질 거다.
놀라움을 넘어 섬뜩하기 그지없는 예고.
그 예고에 이진용의 표정이 굳었다.
이토록 세밀한 예상을 하는 김진호의 안목이 놀라움을 넘어 소름 끼칠 정도였기에.
– 그럼 게임 오버, 안찬섭은 안타를 맞는 순간 오늘 단 하나의 아웃카운트도 못 잡을 거다.
그런 이진용에게 김진호가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 7.2이닝 3실점. 그게 오늘 안찬섭의 성적이다. 틀리면 내가 이진용, 널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라고.
“아, 안 돼!”
– 돼!
섬뜩하기 그지없는 못을.
그렇게 운명이 건 8회가 시작됐다.
14.
언제나 그렇다.
거대한 것일수록 붕괴는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안찬섭 역시 그러했다.
8회 초, 마운드에 올라와 초구로 151킬로미터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던 그는 거듭 강속구를 던졌고 2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8회의 아웃카운트를 단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무너지리란 조짐은 조금도 없었다.
그가 무너지리라 생각하는 이 역시 조금도 없었다.
따악!
“어?”
“어!”
그런데 9번 타자를 대신해 나온 대타를 상대로 안찬섭은 그날 처음으로 안타를 내주었다.
“노히트 깨졌다!”
“아, 깨졌네!”
안찬섭의 노히트노런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경기를 보는 레이번스 팬들은 여전히 승리를 자신했다.
“쩝.”
“아깝다.”
“우리도 노히트 투수 가지나, 싶었는데.”
8회 초 2사 상황에서 타자 한 명이 출루했을 뿐이라고.
다음 타자를 상대로 안찬섭이 아웃카운트를 잡아줄 것이라고.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씨팔, 저 새끼가 노히트 깨고 지랄이야.”
안찬섭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여전히 승리를 자신했고, 자신했기에 그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소롭게 바라봤다.
그게 안찬섭이 그동안 해온 야구였고, 동시에 안찬섭을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 만들어준 야구였다.
당연히 안찬섭은 이 순간 자신이 하던 것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당연히 포수가 패스트볼이 아니라, 슬라이더를 요구했을 때도 그 사실을 강하게 무시했다.
‘150짜리 공을 엔젤스 새끼들이 어떻게 쳐? 이 새끼들은 내 공 못 친다니까. 무슨 슬라이더 같은 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그는 엔젤스 타자 따위를 상대로 기교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수준 차이를 보여주마.’
오히려 그들을 힘으로 누르고자 했다.
그게 응징이라는 단어에 더 가까웠기에.
그러나 힘이 없는 자에게 그러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이 될 수 없었다.
오만이 될 뿐.
따악!
“어?”
“어!”
그리고 그 오만한 자에 대한 응징이, 천사의 응징이 시작됐다.
“안타다!”
“크다!”
연속 안타가 나왔고, 1루 주자는 3루로 그리고 타자 주자는 1루에 안착했다.
오늘 처음으로 엔젤스의 타자가 3루에 안착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타순은 2번부터 시작.
누가 봐도 위기 순간.
“제발, 하나만 잡자. 찬섭아 하나만 잡으면 뽀뽀라도 해줄게!”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자! 하나만!”
당연히 그 순간 대구구장을 채운 레이번스 팬들은 안찬섭이 이 위기를 벗어나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어떻게 잡지?’
하지만 이 순간 안찬섭이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떠올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안찬섭, 그는 100구를 넘게 던져도 150짜리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는 어깨를 가지고 있는 투수였으니까.
그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패스트볼이 안타로 연결되고 있으니까.
결국 안찬섭은 3타자 연속 안타를 내주며 첫 실점을 기록했고, 그 후 올라온 홍우형에게 오늘 네 번째 안타이자, 마지막 안타를 내주었다.
– 아,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 교체네요.
8회 초, 안찬섭이 결국 아웃카운트를 잡지 못한 채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리고 8회 말, 이제는 오롯한 주인공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 Mama, oooh! Didn’t mean to make you cry!
퀸의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를 배경음 삼은 채.
– 야, 진용아 다음 가사 뭐였지?
“좀 닥쳐요.”
– 좀 닥쳐요. 그게 가사였구나. 마마! 우우우! 좀 닥쳐요오오오!
“젠장!”
‘이 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빨리 경기를 끝내야겠어.’
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
“라이징 패스트볼.”
‘여섯 타자 연속 삼진으로 끝낸다.’
그렇게 이진용의 원맨쇼가 시작됐다.
16.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다.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게임이 끝나기 직전이기에 9회 말 2아웃에 관중들은 기대감과 긴장감을 품은 채 경기를 보고는 했다.
대구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9회 말 2아웃 상황의 대구구장 안은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소리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대구구장을 홈으로 쓰는 레이번스에 대한 기대감이나 긴장감이 아니었다.
그 반대, 지금 현재 마운드에서 레이번스의 숨통을 끊기 직전까지 온 투수를 향한 것이었다.
후웅!
이윽고 그 투수가 자신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는 스플리터를 이용한 삼진으로 잡는 순간.
그 순간 긴장감과 기대감을 머금은 벙어리가 되어있던 엔젤스 팬들이 소리쳤다.
호우!
“호우!”
이진용, 그가 9이닝 완봉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호우 나왔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기자들이 준비했던 기사를 올리고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야, 대단하네. 3게임 연속 완봉이야! 삼봉!”
“노히트노런, 10이닝 완봉승 그리고 그냥 완봉. 그냥 완봉이 평범할 정도네.”
“이거 내일 기사 끝내주겠네.”
“그 기고만장하던 안찬섭이 내일 표정 볼만하겠네. 내일 그냥 레이번스 취재하러 갈까?”
“안찬섭 성격이면 그냥 경기장에 안 나올걸? 그 새끼 자기 선발 경기 아닌 날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놈이잖아?”
오늘 경기가 끝났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번 엔젤스와 레이번스의 시리즈에 마침표가 찍혔다는 사실에 대한 한숨이었다.
“선배님 드디어 끝났습니다! 으으으, 경기 내내 보니 힘드네요. 어쨌거나 수고하셨습니다. 대구까지 왔으니 곱창에 술 한잔하고······ 응?”
그러나 한 명은 한숨을 내뱉는 대신 오히려 더 긴장감 가득한 표정으로 마운드에서 주먹을 움켜쥔 투수를 바라봤다.
“선배님?”
황선우, 그의 긴장된 모습을 바라보던 후배 기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경기 끝났는데요?”
후배 기자의 말에 황선우가 차디찬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경기는 끝나지만,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지.”
“예?”
“오늘 경기를 끝으로 이진용의 무실점 이닝이 40이닝이 됐다.”
“그야······ 어디 보자 일단 7이닝 무실점, 그 후에 노히트노런, 10이닝 완봉 그리고 오늘 완봉했으니 선발로 나와서 35이닝 던졌고, 불펜으로 5이닝인가 던졌으니까······ 40이닝쯤 되겠네요. 대단한 놈이네요. 사실상 4경기 연속 완봉한 수준이니까요.”
“이제 2게임 정도, 어쩌면 한 게임만으로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전설 하나를 깰지도 몰라.”
그 말에 후배 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전설 말입니까?”
“무등산 폭격기의 전설 중 하나.”
“예? 잠깐만요 선배. 무등산 폭격기의 전설이라니 그게 무슨······.”
“49.1이닝 무실점 피칭의 전설.”
“예?”
“1986년, 다시는 볼 수 없을 0점대 선발투수가 남긴 전설을 깰 기회가 왔다고.”
그 말에 후배 기자는 황선우와 똑같은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오는 이진용을 바라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