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86
9.
우승.
프로스포츠의 모든 것들이 바라는 궁극의 목표점.
“우승? 일단 리더가 필요하지. 선장 없는 배가 한 척의 배만을 허락하는 항구에 도달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 궁극의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리더가 필요하며, 그 사실에 반문을 제기하는 자는 없다.
대신 의문을 제기한다.
“팀을 우승으로 이끌 리더의 자질?”
과연 팀을 우승에 이르게 하는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많은 게 필요하지.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많을수록 좋아. 하다못해 리더에게는 돈이 많아서 나쁠 게 없어.”
사실 그 질문은 무의미한 질문이다.
“당장 1만 달러가 없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루키에게 지갑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찍힌 프랭클린 초상화 백 장 정도를 건네줘 봐. 그 시즌 동안 루키는 최소한 100만 달러 이상의 보답을 하려고 할걸?”
리더에게는 무엇이 있어도 부족하니까.
하물며 팀을 우승시키기 위한 리더라면 더더욱 무엇이 있어도 나쁠 건 없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보다는 다른 질문이 좋다.
“그러니까 질문을 바꾸자고. 팀을 우승시키기 위해 리더에게 꼭 필요한 게 뭔지.”
최소한의 조건.
그 질문에 대해서 김진호는 이렇게 말했다.
“결과. 실력이나, 피지컬이나, 재능이나, 가능성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구속이 100마일이 나오든 110마일이 나오든 그게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야 해.”
결과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고.
“인성이 좋고, 인품이 뛰어나고, 타의 모범이 되고 이런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이 바닥은 그렇게 예의와 존중이 넘치는 바닥이 아니거든. 이 바닥은요, 가느다란 나무 배트 하나로 야구공을 150미터 너머로 보내는 맹수가 수틀리면 마운드로 뛰쳐나오고, 그럼 100마일짜리 공을 던지는 투수가 엉덩이에 101마일짜리 공을 던져서 복수하는 바닥이야.”
인성과 인품보다 그게 더 중요하다고.
“그런 무대에서 인품이 뛰어나지만 방어율 4점대에 매 경기에 나오면 5이닝 간신히 막는 투수가 뭔가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10명 중 8명은 뭐래 저 병신이? 이렇게 나와. 하지만 성격이 개차반 같은 놈이라도 매 경기에 나와 8이닝 이상 던지며 1점대 방어율을 유지하는 놈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10명 중 10명이 귀를 기울이지. 한국말로 그 소리를 지껄이면 한국어를 배우는 한이 있더라도 들으려고 할걸? 그래, 지금 우리 선수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2004년 김진호가 카디널스 소속으로 활약할 당시 남겼던 말이다.
더불어 그해에 김진호는 카디널스를 내셔널리그 우승으로 이끌면서 자신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리고 지금 2017년 6월 7일, 광주구장에 있는 자그마한 투수 한 명이 김진호의 말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자 마운드에 섰다.
펑!
“스윙, 스트라아아아이크, 아웃!”
이진용.
5이닝 1피안타 1볼넷 8탈삼진.
그리고 이제 자신의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45이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소리 내어 세상에 알렸다.
“호우!”
그러자 그 소리에 세상은 대답했다.
호우!
1루쪽 관중석, 그곳에 있던 엔젤스 팬들이 엔젤스 응원단장의 구호에 맞추어 만들어낸 대답이었다.
호우, 그 두 글자가 광주구장을 가득 채우는 순간이었다.
“미친 새끼.”
“저 새끼 정신 나간 거 아니야?”
그 광경에 광주구장의 본래 주인인 돌핀스 선수들이 신경질적으로 번뜩이는 눈으로 노려봤다.
그 눈빛은 경기 초반 이진용을 바라보는 눈빛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눈빛이었다.
“저 새끼가 정신 나간 놈이고 자시고,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정신이 나가버리겠어.”
“그래, 미치겠다, 미치겠어.”
경기 시작 전 돌핀스 선수단은 이진용을 상대로 승리를 자신했다.
그의 무실점 피칭 기록을 광주구장에서 끝장내리란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리그 1위 팀이라는 사실과 무패의 투수를 앞세운 근거 넘치는 자신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그 자신감이 무너지는 데에는 1이닝이면 충분했다.
1회 말, 이진용은 돌핀스 타선을 상대로 14개의 공을 던졌다.
던진 구질은 다양했다.
우타자를 상대로는 투심을 적극적으로 던졌고, 좌타자를 상대로는 커터도 한 번 던졌으며, 스플리터와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도 선보였다.
시장에서 보따리를 풀듯 자신이 보여준 모든 구종을 풀었다.
그러나 결정구는 똑같았다.
‘저 새끼 포심이 왜 이렇지?’
‘오늘 이진용의 포심이 말도 안 돼. 130짜리 공이 절대 아니야.’
포심 패스트볼.
이진용, 그는 1회 말에 네 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개중 세 명의 타자의 아웃카운트를 포심 패스트볼만으로 뜯어냈다.
그건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분명 이진용의 포심 패스트볼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쁘지 않음이란 그가 가진 구속, 130대 초반의 구속에 비해서 나쁘지 않다는 것이지 리그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진용의 포심 패스트볼은 프로 선수라면 누구든 칠 수 있는 공이었다.
‘포심을 노렸는데······.’
실제로 돌핀스 타자들은 대부분이 이진용의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무브먼트를 보여주는 투심이나 스플리터 그리고 레이번스 전에서 보여준 기상천외한 커터는 무시한 채, 이진용이 볼카운트를 만들기 위해 던지는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기로 했다.
연습도 그에 맞췄다.
이진용이 던지는 포심 패스트볼을 연구하고, 분석한 뒤 이미지화를 하고 그에 맞춰 스윙 연습을 했다.
‘우리가 분석한 거랑 전혀 다른 포심을 던지고 있어.’
그러나 오늘 이진용이 가져온 포심 패스트볼은 돌핀스가 예상하고, 기다리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강하고, 무겁고 동시에 특이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볼끝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배트와 부딪치는 순간,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공의 위치를 살짝 비트는 듯한 느낌.
‘한 번이지만 전광판에 137까지 찍혔고.’
심지어 3회 말, 타순가 한 바퀴를 돌며 1번 타자가 다시 한 번 이진용을 만나는 순간.
그 순간 이진용이 던진 포심 패스트볼이 137킬로미터라는 구속으로 찍혔다.
이진용은 130대 초반의 공을 던지는 투수이다, 라는 개념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돌핀스의 전투 의지가 꺾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 역시 타자 일순 후에 리볼버로 퍼포먼스 한 번 보여준 게 제대로 먹히고 있네. 네 포심에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당연한 말이지만 그 모든 건 이진용이 기획하고, 준비하고 노리던 것이었다.
– 포심이 먹히면 사실상 게임은 끝이지. 게임 오버. 유 윈. 퍼펙트!
그것도 그냥 기획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김진호의 조언 아래에서 준비한 기획.
– 덕분에 6회까지는 무난하게 막겠네. 그러면 무쇠팔 발동할 테고, 그 이후 체력은······ 마법의 1이닝 안 쓰고도 충분히 10회까지 던질 수 있겠는데? 응? 안 그래?
완벽.
감히 그 표현을 써도 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완벽하기 그지없는 5이닝을 선보인 이진용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왔을 때,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유는 당연히 그것이었다.
“엔젤스 빠따 새끼들아 1점만 내라고!”
지금 어디선가 들려오는 엔젤스 팬의 말 그대로, 엔젤스 타선이 1점도 내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이건 예상된 바였다.
‘아, 미치겠다. 어떻게든 점수 내야 하는데 후안, 이 새끼 공 장난 아니야.’
‘괜히 무패 투수인 게 아니네. 공이 영상으로 볼 때와 타석에서 볼 때 전혀 달라.’
‘변화구 구사 능력이 작년보다 더 좋아졌어. 볼배합도 변칙적으로 변했고.’
후안 가르시아.
작년 시즌 200이닝을 던지며 3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던 그는 이번 시즌 그 대단했던 작년 시즌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당장 지금 후안 가르시아의 방어율은 2.11이었다.
산술적으로 본다면 9이닝 동안 주는 점수가 2점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 그에게서 최근 타격감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엔젤스가 1점을 내는 게 쉽지 않으리란 건 엔젤스 타자들은 물론, 오늘 경기를 보는 모든 이들이 예상한 바였다.
심지어 오늘 스포츠 토토에서 엔젤스의 승보다, 돌핀스의 승에 베팅을 한 이들이 더 많았다.
‘이번에도 점수 못 내면 면목이 없다.’
‘이런 짓도 한두 번이지, 이진용 올라올 때마다 이러네.’
물론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었다.
투수는 점수를 막고, 타자는 점수를 낸다, 그것이 팀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팀의 승리야말로 선수가 존재하는 이유였으니까.
그게 분위기가 침울한 또 다른 이유였다.
변명조차 할 수 없다는 것.
– 진용아······.
그 사실을 이진용도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하며, 엔젤스 타자들이 결코 1점을 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 너 미쳤냐?
그런데 더그아웃에 들어온 이진용은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흐우, 흐우, 흐우∼!”
호우 소리를 콧노래로 내면서.
– 진용아, 그러지 마. 무섭잖아······.
김진호가 질색할 정도.
그러나 이 순간 이진용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포심이 먹힌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포심이 먹혀!’
포심 패스트볼.
흔히들 직구라고 불리는 그 공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프로 레벨에서 통하는 날이었으니까.
‘드디어 내 포심이 먹힌다고!’
그것이 되지 않아서, 자신의 패스트볼이 먹히지 않아서 야구와 관련된 모든 꿈을 접었던 이진용이기에 오늘 이날은 그야말로 역사적이고도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분위기도 최고고!’
그와 동시에 이진용은 지금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이 침울한 분위가 꽤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선수와 코치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내 눈치를 봐야지.’
이진용은 이미 결심했다.
엔젤스를 우승시키기로.
결심이고 자시고 그것만이 지금 이진용이 가야 할 유일한 방향이었다.
문제는 이제 프로 데뷔 1년 차인 이진용이 나서서 리더가 된다는 건 일반적인 경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
호가호위, 호랑이의 위세를 빌리더라도 여우 정도 되어야 늑대들을 상대로 그게 씨알이 먹히지, 토끼가 호랑이의 이름을 팔아봤자 늑대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다.
때문에 이진용은 도리어 엔젤스 선수들이 자신을 어렵게 보고,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자신을 상대로 고개를 숙이기를 원했다.
더욱이 이진용, 그가 원하는 건 하하호호 웃는 관계 따위가 아니었다.
리더와 부하.
군주와 졸개.
까라면 까는 관계.
‘분위기도 끝내주는군.’
결정적으로 이진용은 오늘 무대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팀 타선은 점수를 내지 못해서 결국 0대0으로 연장전에 들어가고, 연장전 10회 초에 점수가 나오고, 10회 말에 내가 나와서 막으면······.’
이보다 더 극적이고 완벽한 무대는 없을 테니까.
“후후후······”
그 순간을 상상하던 이진용이 히죽거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김진호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얘 왜 이래? 설마 귀신 들린 건가? 가만, 악귀면 어떻게 하지? 내가 싸워야 하나?
그렇게 게임이 계속됐다.
10.
마운드 위에서 선발투수는 경쟁자다.
무대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경쟁자.
그렇기에 모두가 기억할 만한 명경기는 오로지 한 명의 주연만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주연에는 그에 어울리는 조연이 있듯, 손이 마주쳐야 박수가 나오듯, 투수가 가진 진짜 기량이 절정에서 나오는 것은 상대팀 투수가 그에 어울리는 피칭을 했을 때다.
그것이 이진용이 그동안 놀라운 피칭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와 함께 마운드를 쓰던 투수들은 경기 초반에는 이진용을 잊게 만들 정도로 멋진 피칭을 보여줬었고, 그로 인해 이진용이 긴장할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0대0, 그 긴박한 상황이 이진용이 가진 모든 것을 끄집어낼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후안 가르시아는 이진용에게 있어 최고의 경쟁자가 되어줬다.
“스트라이크, 아웃!”
– 루킹 삼진! 후안 가르시아가 9회 초 마지막 카운트를 자신의 열네 번째 삼진으로 장식합니다.
– 대단해요. 정말 대단해요.
9이닝 4피안타 1볼넷 14탈삼진 그리고 무실점.
완벽한 피칭.
홈팬들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내지른 뒤 박수갈채를 뿜어야 마땅한 피칭이었다.
“아!”
하지만 광주구장을 채운 돌핀스의 팬들은 후안 가르시아의 그 열네 번째 삼진 앞에서 자신들의 기쁨을 폭발시키지 못했다.
“아······.”
오히려 반대, 기쁨보다는 짜증과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바라봤다.
그리고 후안 가르시아, 그 역시 돌핀스 팬들과 비슷한 표정으로 1루쪽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마치 경주를 앞둔 경주마처럼, 지금 당장 마운드로 뛰쳐나오지 못해 안달이 난 자그마한 괴물을 바라봤다.
“퍼킹 크레이지 호우맨!”
이진용, 마운드를 향해 당장 뛰쳐나올 것 같은 그를 보며 후안 가르시아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윽고 공수교대가 이루어지는 순간 이진용이 마운드를 향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처벅, 처벅.
당장 뛰쳐나올 것과 같은 기세와는 달리 느릿한 걸음으로.
마치 패션쇼장에서 패션쇼를 보여주듯.
모두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보듯 걸어 나오는 그가 글러브로 가린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노래 한 곡 불러주시죠.”
– 내가 그런 건 마다하지 않지. 그래서 신청곡은?
“골라주세요.”
– 마이클 잭슨의 Bad.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잘 어울리는 곡은 없을 거다.
곧바로 이진용의 귀로 마이클 잭슨이 남긴 명곡, Bad의 가사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진호의 말대로 이진용의 지금 상황에 퍽 어울리는 노래였다.
그런 노래는 이진용의 마운드에 올라오는 순간 그대로 멈췄다.
우아아아!
우우우우!
1루 관중석 쪽에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환호성과 광주구장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야유 소리에 김진호의 노래가 들릴 틈 따위는 존재치 않은 탓이었다.
이진용, 그가 그렇게 마운드에 올라왔다.
– 이진용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이제부터 이진용 선수는 1.1이닝을 더 던지면 선동열 선수가 남긴 최다 이닝 무실점 기록과 동일한 기록을 보유하게 됩니다.
– 아웃카운트 다섯 개면 본인이 새로운 전설이 되지요.
국보급 투수가 남긴 전설에 1.1이닝, 4개의 아웃카운트만을 남긴 채로.
– 그리고 이대로 이진용 선수가 9회 말마저 무실점으로 막는다면, 어쩌면 오늘 이곳에서 새로운 전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점수는 0대0, 9회 말이지만 이진용은 본인이 원한다면 다음이 아닌 오늘 이 자리에서 전설이 될 기회를 앞두고 있었다.
“과연 지금 저 마운드에 선 기분이 어떨까?”
“분명한 건 난 기회를 줘도 저 마운드에 올라가진 않을 거야. 바지에 오줌을 지려도 모를 테니까.”
“바지에 오줌만 지리면 다행이지. 여기서 만약 실점을 한다면, 이제까지 해온 모든 탑이 무너지는데······ 소름이 끼치는군.”
“심지어 패전투수까지 되어야지.”
“끔찍하군.”
“섬뜩하고.”
서슬 퍼런 칼끝 위에 올라선 채 별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 어때 기분이? 실점 한 번이면 개뽀록 허접 쓰레기 땅딸보 추남 또라이 패전투수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선 기분이?
그 상황 속에서 김진호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이진용은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대답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오금이 저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겠죠.”
칼끝에 서 자신의 운명이 걸린 피칭을 해야 하는 상황을 정상적인 개념과 가치관을 가진 자가 담담히 받아들이는 게 가능할 리 없는 법.
–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넌 또라이잖아?
다행히도 이진용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 그래서 느낌이 어때?
“좀 미친 소리일지도 모르는데 오늘 중에 가장 컨디션이나 집중력이 좋은 거 같아요. 좀 과장하면 포수 미트가 바로 코앞에 있는 거 같아요. 너무 가깝게 보여서 공을 던져도 되나 싶을 정도요.”
그 말에 김진호가 지그시 이진용을 바라본 후에 고개를 돌려 타석을 바라봤다.
홈플레이트 위를 덮은 흙더미를 털어내는 주심과 선 채로 숨을 고르는 포수 그리고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두 눈을 감고 집중력을 가다듬는 타자가 보였다.
– 아직 타자가 타석에 서지 않는 걸 보니까 시간 좀 남으니까 이야기 좀 해주지.
그것을 확인한 김진호가 말을 이어갔다.
– 전설적인 선수들이 만들어낸 전설적인 경기들 있지? 예를 들면 그렉 매덕스의 76구 완투승이라든가, 2004년에 랜디 존슨이 마흔 살 먹고 달성한 퍼펙트게임이라든가, 위대한 메이저리거 김진호의 일대기라든가.
“예.”
– 그런 그들에게 어떻게 그런 기록을 달성했냐고 물어보면, 대개 이렇게 대답해. 어쩌다 보니 잘됐습니다, 하늘이 도왔습니다, 신께 감사합니다, 팀 동료 덕분입니다.
“그렇겠죠.”
– 근데 사실 그거 다 구라야. 그런 전설적인 무언가를 할 때는 이미 선수 본인이 인지하고 있어. 이런 느낌이지.
말을 하던 김진호가 팔짱을 끼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씨발 오늘 나 쫌 쩌는 듯!
그리고는 곧바로 김진호가 팔을 풀었다.
– 내가 매덕스와 존슨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단언컨대 매덕스가 76구째 공으로 완투를 거뒀을 때나, 랜디 존슨이 퍼펙트게임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았을 때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 순간 이진용이 대답했다.
“나는 전설이다.”
– 응?
“그렇게 생각했겠죠.”
그 말에 김진호는 이진용을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마운드를 내려갔다.
더 이상 말은 없었다.
이진용 역시 입을 여는 대신 모자를 고쳐 쓰며, 이제는 타석에 선 타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전설이다.’
“플레이볼!”
그렇게 9회 말이 시작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