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87
1.
이진용은 김진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타자를 상대하기 위한 무수히 많은 방법들.
그렇게 위대한 투수로부터 배움을 받은 이진용에게 있어 1회부터 8회까지, 24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으면서 치른 타자와의 만남은 대결임과 동시에 검진이었다.
‘강현종, 오늘 바깥쪽 공에 대한 반응이 느렸어.’
‘김기수, 전체적으로 타격감이 살아있다. 때문에 오늘 빠지는 공에도 배트가 나온다. 칠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박영욱, 타율은 낮지만 파워가 있다. 오늘 내내 큰 것 한 방만을 노렸다. 하지만 무작정 노리진 않는다. 존을 좁게 보고 들어오는 실투만을 노릴 뿐, 존 바깥쪽 공은 꿈쩍도 안 한다.’
자신이 마주하게 될 타자의 오늘 성향과 컨디션, 노림수 그리고 약점과 장점을 파악하는 검진.
그 검진을 토대로 이진용은 처방법을 내놓았다.
‘오케이, 바깥쪽을 물고 늘어져서 볼카운트를 만든 후에 스플리터로 낚는다.’
‘그럼 기꺼이 던져주지. 투심으로. 쳐보라고.’
‘바깥쪽만 물고 늘어져서 잡는다.’
그리고 그 처방법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9회 말 이루어진 이진용의 피칭은 그런 피칭이었다.
그 어떤 피칭보다 계획적이고, 계산적이며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기 그지없는 피칭.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그러나 그 결과를 본 이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맙소사.”
“저게 8이닝 동안 공 던진 인간 맞아?”
“미친 새끼! 지치기는커녕 어떻게 된 게 9회의 피칭이 오늘 피칭 중에 가장 위력적일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단숨에 오늘도 여지없이 9이닝 무실점 피칭을 마친 이진용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른손을 번쩍 든 채 소리쳤다.
“호우!”
그렇게 번쩍 든 이진용의 오른손 모양이 평소와 달랐다.
이진용, 그가 평소처럼 꽉 쥔 주먹이 아니라 엄지를 곧게 치켜들고 있었다.
“응?”
심지어 이진용은 그대로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마치 물속에 들어가듯, 엄지를 치켜든 채로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저게 뭐지?”
모두가 그 모습에 의문을 가지는 사이.
– 야, 그건 또 뭐냐? 엄지는 왜 들어?
그중 한 명인 김진호가 이진용의 갑작스러운 제스처에 질문을 던졌다.
“영화 안 봤어요?”
– 영화?
“터미네이터2.”
그 대답에 김진호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 I will be back?
이진용은 대답 대신 진한 미소만 지었다.
2.
10회 초, 연장전 시작과 함께 돌핀스는 불펜진을 가동했다.
나온 것은 돌핀스의 셋업맨 심현우였다.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돌핀스는 오늘 이 경기를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무조건 막는다.”
오늘 경기가 단순한 1승이 걸린 경기가 아니라는 것을 1위 팀인 돌핀스가 모를 리 없었기에.
“총력전이다! 이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무승부로 끝낸다!”
그렇기에 돌핀스는 필승조를 가동했다.
“아, 돌핀스 새끼들 승수도 많은 놈들이 좀 봐줘라!”
“빌어먹을, 심현우 얘 공도 장난 아닌데······.”
엔젤스에게 있어서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더욱이 엔젤스의 악몽을 보다 깊고, 처절하게 만드는 것은 9회 말이 끝나는 순간 아이싱 대신 점퍼를 입고 있는 이진용의 존재였다.
‘아, 또 10이닝인가?’
‘기록이 걸렸고, 투구수도 많진 않으니까······.’
엔젤스 코칭스태프는 10회 말 이진용을 등판시킬 생각이었다.
9회 말까지 이진용의 투구수가 103구밖에 되지 않았고, 이미 10이닝 피칭을 해본 전력이 있으며, 결정적으로 1개의 아웃카운트만 잡으면 신기록 타이 보유자가 되며, 아웃카운트 2개면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는 상황.
심지어 구은서가 이진용을 불러다 신기록에 대한 당근을 준 상황에서 코칭스태프가 그것을 막을 이유는 물론, 방법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진용이 본인이 원했다.
이진용 본인이 이대로 자신의 게임이 끝나는 것을, 자신이 리타이어 되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괴물하고 같은 팀이 되어버렸어.’
그 사실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이는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이 순간 이진용은 웃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 서슬 퍼런 칼날 위와 같은 곳에서 웃고 있었다.
‘도무지 쟤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난 모르겠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모를까, 돌아버리겠네.’
그 모습에 엔젤스 선수단은 부담감을 넘어 이제는 공포마저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공포가 점수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것.
10회 초, 엔젤스 타선에 광명은 없었다.
더불어 그 사실에 관심을 가지는 이도 없었다.
“10회 말이다.”
“올라온다.”
지금 이 순간 모든 이들의 이목은 오직 한 사람, 마운드에 올라오는 이진용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10회 말이 시작됐다.
3.
[철인 효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일찍이 이진용은 10회에 올라오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깨닫고, 경험해봤다.
“마법의 1이닝.”
10회에 선발투수가 올라온다는 건, 그 투수를 상대하는 타자에 있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타자들이 느끼는 분노는 상냥한 양을 난폭한 늑대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런 타자를 상대가 이빨을 드러낼 틈조차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심기일전.”
그렇기에 이진용은 그동안 아껴두었던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꺼낼 속셈이었다.
심기일전을 꺼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기일전을 꺼낸 것은 스트라이크존 아슬아슬한 코스에 공을 던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목표는 몸쪽.’
노리는 곳은 지금 오른쪽 타석에 선 타자의 몸쪽.
몸에 맞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코스.
어쩌면 몸에 살짝, 옷을 스칠지도 모르는 코스.
그곳을 노리고자 했다.
두 가지를 위해서였다.
‘홈플레이트에서 꺼져.’
어떻게든 이진용의 공을 치기 위해 홈플레이트에 바짝 달라붙는 타자들을 홈플레이트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위협.
몸에 맞을 정도로 깊숙한 몸쪽 코스에도 언제든 공을 집어넣을 정도로 자신의 오른팔이 정밀한 총이라는 것을 증명.
위협과 증명, 노리는 바는 그 두 가지였다.
– 타자의 몸에 공으로 맞추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진짜 위협구는 맞지 않아야 의미가 있는 거야.
그리고 그게 김진호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몸에 맞춰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몸쪽 공 깊숙한 곳에, 맞아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곳에 찔러 넣어야 한다.
펑!
“헙!”
그래야 지금처럼 타자의 입장에서 전투 의지가 가득한 함성이 아닌,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오니까.
‘이 새끼가!’
물론 10회 말 상황에서 고작 몸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오는 공 하나만으로 타자의 기를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상대는 리그 1위 팀.
이기는 법을 아는 자들이다.
고작 몸쪽 공 한 번에 겁에 질려서 나약한 생각을 할 수 있다면 1위 팀이 될 수 없다.
리그 1위, 아직 시즌 초반에 불과하더라도 그 1위 자리를 한다는 건 남은 아홉 개 팀보다 더 뛰어나다는 의미이니까.
때문에 이진용은 기꺼이 또 던졌다
“심기일전.”
다시 한 번 더 몸쪽.
“라이징 패스트볼.”
이번에는 더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심지어 아끼지 않았다.
“리볼버.”
이진용, 그가 남은 세 번의 리볼버 중 한 번을 지금 이 순간, 몸쪽 공을 향해 던졌다.
볼 판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 공에 자신이 투자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투자했다.
하지만 아까움은 없었다.
아까움이 없으니 주저함도 없었다.
이진용은 곧바로 자신의 몸을 비틀었고, 토네이도와 같은 자신의 몸에서 공을 토해냈다.
펑!
그렇게 날아간 공이 다시 한 번 타자의 몸쪽 깊숙한 곳에 박혔다.
“헉!”
그리고 그 사실에 타자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아차!’
그것으로 사실상 그 게임은 끝이었다.
그 모습으로 이미 타자는 투수는 물론 이 경기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줬으니까.
“야이 병신아 그냥 맞으라고!”
“그걸 왜 피해!”
지금 자신이 마운드 위의 투수를 상대로 겁에 잔뜩 질렸다는 사실을.
‘젠장, 젠장!’
타자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자 했다.
‘내가 겁먹었을 리 없어.’
동시에 타자는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런 거북이 새끼의 공에 겁먹었을 리가 없어.’
자기 혼자 열심히 이 사실을 부정해봤자, 머릿속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여봤자 세상은 알아주지 않을 것이며, 더 나아가 코치와 감독은 그 사실에 감점을 주리란 사실을.
‘몸쪽으로 친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이 결국 마운드 위의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뽑아내는 것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타자는 기다렸다.
몸쪽으로 오는 공에 대해서 기꺼이 배트를 휘두를 준비를 했다.
‘그래, 볼카운트는 2볼. 하나쯤은 존에 집어넣겠지.’
스트라이크 하나 없는 2볼 상황이라는 것 역시 타자로 하여금 노림수를 품게 했다.
그런 그에게 이진용은 기꺼이 몸쪽, 그러나 이번에는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공을 던졌다.
차이점은 오직 하나.
빡!
포가 아니라 투라는 것.
“큭!”
투심 패스트볼.
포심을 노리고 배트를 휘두르는 자에게 악몽을 선사하는 그 구질이 제 역할을 해냈다.
“유격수!”
힘없이 내야 위를 움직인 공이 그대로 유격수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격수는 그 공을 잡는 순간 수만 번 넘게 반복한 행위를 그대로 실현했다.
1루수를 향해 송구했다.
펑!
1루수 역시 수만 번 넘게 반복한 행위를 그대로 재현했다.
“아웃!”
주심마저 수천 번 넘게 반복한 행위를 다시 반복했다.
그럴 뿐이었다.
수천, 수만 번 했던 것을 각자 다시 한 번 더 했을 뿐.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은 어느 때보다 긴장된 상태로 그라운드의 분위기를 살폈다.
심지어 이 경기를 보는 모든 이들조차 긴장된 채로, 숨죽인 채로 기다렸다.
큰 폭풍이 불어오기를.
30년 넘게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49.1이닝 무실점 피칭을 이룩한 투수가 내지를 환호성을.
호우!
그 두 글자가 부르짖어지기를.
‘응?’
‘어?’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폭풍은 오지 않았다.
‘뭐지?’
‘호우 안 해?’
이진용, 아웃을 잡은 그는 환호성을 내지르지 않았다.
환호성을 내지르는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마운드로 다시 걸어 올라온 후에 타석을 바라보며, 삐뚤어진 모자를 고쳐 썼다.
모자 아래로 드리워진 그늘 속의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 뒤의 김진호 역시 말없이 눈빛을 번뜩인 채 서있었다.
그것은 표현이었다.
‘타이기록을 세우려고 여기 선 게 아니야.’
– 타이기록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지.
여기서 만족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전부 다 잡는다.’
– 유일무이해야지 의미가 있지.
즉, 이진용은 지금 자신이 가진 모든 바를 오로지 다음 타자를 잡는데 투자할 생각이었다.
호우, 그 소리를 내지르는 힘마저 아끼고 아껴 자신의 공에 담을 생각이었다.
그 사실에 모두가 놀라고 또한 긴장했다.
꿀꺽!
그리고 이제 곧바로 이진용과 상대하게 된 돌핀스의 6번 타자 이강수는 침을 삼켰다.
그뿐이었다.
‘아.’
이 순간 이강수의 머릿속은 그저 하얗게 변해버릴 정도였다.
자신이 아웃카운트를 당하는 순간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없던 신기록이 세워진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감 앞에서 기어코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이강수는 사실상 실 끊어진 인형과 같았다.
왼쪽 타석에 섰지만,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인형.
이진용은 그렇게 넋을 잃을 이강수를 상대로 망설이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초구로 스트라이크존에 걸치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2구째는 커브였다.
뚝 떨어지며 타자의 타이밍을 앗아가는 커브.
마지막 3구째는 스플리터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2스트라이크에 몰려 본능적으로 배트를 휘두를 수밖에 없는 타자를 먹어치우기에 가장 완벽한 스플리터.
“아우우우우웃!”
그렇게 이진용이 3구만으로 한국프로야구 최다 무실점 이닝 기록 보유자가 됐다.
역사적인 순간.
기념비적인 순간.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
“호오······ 우?”
“이번에도 안 해?”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이진용은 환호성을 내지르지 않았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2아웃,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무대 위에서 이진용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10회 말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기 위한 준비를 했다.
다시 마운드를 올라갔고, 이번에는 마운드 뒤편으로 이동했다.
투수의 신발, 그 아래 달린 스파이크 사이의 흙을 제거할 수 있는 스파이크 클리너, 가시 돋은 판을 이용해 스파이크 사이의 흙을 제거했고 로진백으로 오른손을 적셨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에 이진용이 마운드 위에 다시 섰다.
동시에 사인을 나눴다.
이호찬의 손가락을 바라본 후에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의 대화로 대화를 마쳤다.
“라이징 패스트볼.”
그 후에 이진용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심기일전.”
준비해둔 주문.
“리볼버.”
그리고 오늘 쓸 수 있는 마지막 주문까지.
모든 주문을 마친 이진용은 그대로 곧바로 멈춤 없이 반짝이는 곳을 향해, 그곳을 향해 전력으로 공을 던졌다.
던진 공은 포심 패스트볼.
노리는 코스는 타자의 스트라이크존 높은 코스.
그 공에 대한 타자의 대답은······.
딱!
높게 뜬공이었다.
“호우!”
이진용, 그제야 그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엄지만을 곧게 세운 자신의 오른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50이닝 무실점!
한국프로야구 역사의 새로운 신기록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더 놀라운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