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108)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108화(108/140)
공정의 신, 하데스 – (1)
페르세포네와 함께 다시 저승에 돌아오자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양피지를 보고 있는 여러 신들이 있었다.
나를 향한 저 표정은 틀림없이 혼자만 바깥에서 쉬고 오냐는 원망이겠지.
“하데스… 요즘 들어서 자꾸 저승 밖으로 돌아다니던데…”
“처리해야 할 서류가 밀렸습니다.”
스틱스 여신님이 서류 더미를 한 아름 안겨주신다.
예. 예. 해야 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늦게 돌아왔으면 타나토스가 또 도망칠 뻔했어.”
“또 말입니까.”
“실은 나도 내려놓고 싶은 충동이 들더군.”
휘프노스 신이 내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젓는다.
당분간 자리에 앉아 능숙하게 양피지를 넘기고 깃털 펜을 놀려 결제를 해 나갔다.
항상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주신 덕분에 고생하십니다. 다들.
그런데 올림포스의 공식 인장이 찍힌 문서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에로스의 결혼식 때에는 하객으로서 방문했으니 일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거겠지.
이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자, 레테 여신님이 문서의 정체를 알려주셨다.
“…그거. 올림포스에 있던 정의의 여신, 디케(Dike)가 저승으로 거취를 옮기고 싶다는 정식 문서에요.”
“아까 에로스의 결혼식에서는 보이지 않더니…”
“정의의 여신이 왜 올림포스에 있지 않고 이곳까지 내려오려는 걸까요.”
“단순 파견도 아니라 아예 이곳에 눌러앉겠다?”
“음… 혹시.”
의견을 나눈 신들이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설마 다섯 번째(부인인가?)?”
“아닙니다.”
디케(Dike).
제우스와 테미스 사이에서 태어난 정의의 여신.
계절의 여신 호라이(Horai)들 중 하나로서 질서를 관장하는 에우노미아, 평화를 관장하는 에이레네와 자매지간이다.
내 이명이 플루토인 것처럼, 그녀의 다른 이름은 아스트라이아(Astraea)혹은 유스티티아(Iustitia)라고도 불린다.
“아까 에로스의 결혼식 때는 일이 있어서 못 온 모양입니다.”
“그거 어떻게 할까요? 저승에 다른 신이 와주면 환영이긴 한데…”
“예. 아무래도 왜 저승으로 옮기려는 건지 석연치 않죠. 다른 신과 다툼이 있었을 수도…”
정의의 여신 디케는 제법 바쁜 신이다.
정의란 거의 대부분의 일에 포함되는 기초적인 개념. 문명과 질서를 이루는 한 축이니까.
지금도 지상을 돌아다니며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고 있지 않을까?
“일단 저승으로 불러주시죠. 한번 그녀와 대화를 해보고 결정해야겠습니다.”
“예. 그럼 올림포스로 서신을 보낼게요.”
디케는 왜 힘든 곳을 자처하려는 걸까. 모두가 기피하는 최악의 근무지가 바로 저승일지언데.
설마 우리가 이곳에서 고생하는 것을 두고 보는 게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해서?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 * *
그리하여 나는 알현실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디케를 바라보았다.
제우스의 딸임을 나타내는 황금빛 머리카락, 나의 고모이자 제우스의 아내인 테미스에게 물려받은 강한 신력.
아름다운 외모와 그에 걸맞지 않은 강인한 어투.
올림포스 12신의 바로 아래 정도쯤 되어보이는 이 고위 신격은…
“…이만 검이랑 천칭은 옆에 잠시 내려놓아라, 그냥 허공에 띄워놓던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큰아버지! 이 물건들을 한시라도 제 몸에서 떼어놓는다면 정의가 바로 서지 않는…”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도 천칭과 검을 들고 있었다.
“내가 다 불편해 보인다니까. 그리고 네 눈은 왜 가렸냐.”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저승에 머무르고 싶은 이유와도 연관이 있는지라.”
정의의 여신의 눈은 불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온갖 불의를 추적해 심판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 헌데… 왜 눈을 가렸을까.
디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정의의 여신으로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불의를 심판했습니다. 필멸자들이 정말 많은 일을 저지르더군요. 시시포스와 같이 죽음을 거부하려 한 자도 있었고, 탄탈로스처럼 치가 떨리는 이도 있었으며. 제 아버지이자 신들의 왕인, 제우스를 자칭하며 날뛰는 인간도 있었습니다.”
“분명 그런 놈도 있었지. 시시포스의 형제인 살모네우스라는 놈이였던가.”
살모네우스(Salmoneus).
죽음을 거부하려던 시시포스의 형제였던 살모네우스는 엘리스 지방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왕이 되었다.
맨손으로 사람들을 규합해 세력을 불리고 결국은 왕이 된 대단한 수완가였지만…
“으하하! 내가 바로 제우스 신이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을…”
왕이 되자 권력에 심취해 스스로를 제우스라 말하고 온갖 기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의 만행을 하나씩 살펴보자.
“제우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이것을 보아라! 크하하!”
“폐… 폐하!”
“보아라! 이것이 제우스의 천둥 소리다!”
강철로 다리를 건설한 뒤, 그 위를 놋쇠 마차로 몰고 지나가면서 천둥소리를 흉내냈다.
그와 동시에…
“이것이 바로 벼락이다! 하하하!”
휘익-
“으… 으아악!”
“폐하께서 미치셨다!”
“감히 이 제우스에게 미쳤다니, 저놈들을 전부 사형에 처해라!”
백성들에게 횃불을 던지며 이것이야말로 제우스의 벼락이라고 했다.
당연히 이 정신나간 인간의 만행은 올림포스에도 들려왔고,
그에 제우스가 진짜 벼락이 무엇인지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제일 약하고 가벼운 벼락 하나를 툭 떨궜다.
그렇게 살모네우스의 왕국은 통째로 증발했고… 수많은 인간들이 저승으로 왔었지.
“살모네우스는 지금 타르타로스에서 영원히 마차를 모는 형벌을 받고 있다.”
“저도 그 인간의 처벌은 들었습니다. 헌데…”
정의의 여신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내게 말했다.
“살모네우스를 제외한 다른 인간들은 벼락에 맞아죽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아버님이라 하셔도 너무 과하신 처벌이라고 생각했지요! 제 천칭이 한쪽으로 과하게 기울 정도의 처벌이였습니다. 물론 신성모독에 대한 처벌은 있어야 하나, 그를 왕으로 섬긴 인간들까지 죽이신 것은 너무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뿐이 아닙니다! 저번에 아폴론 신께서 오리온을 죽이신 일이나…”
나도 그 사정을 고려해 살모네우스를 제외한 다른 인간들에게는 저승에서 편의를 봐주었다.
휘말린 죄밖에 없는 이들을 가혹하게 심판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가 줄줄이 온갖 신들의 악행과 죄업을 늘어놓는다. 말하면서 분통이 터지는 듯 신력이 미약하게 방출되는 모습.
하기야 정의의 여신이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답답하겠지.
음. 네가 무슨 뜻으로 여기 왔는지 알겠다.
“….이와 같은 일이 수십 건에… 또한…”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다. 디케.”
“아직 더 말씀드릴 것이…”
“너는 내 비호를 받고 싶어서 저승에 머무르려 하는구나.”
* * *
정의의 여신, 디케는 올림포스 12주신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정의는 그리 힘을 쓰지 못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와 티탄 신족, 테미스의 딸이여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뿐.
정의에 어긋난 다른 신들을 처벌하려 할 때마다 그들의 배경을 살펴야만 했다.
“포세이돈 님?!”
“디케. 내 아들이 인간들과 조금 장난쳤다고 해도…”
“신이 인간을 조금 벌하는 것이 뭐가 문제지? 너 역시 신이면서 마치 하데스 큰아버지와 같은 소리를…”
“아르테미스 님…”
“잠깐, 저건 내가 아끼는 짐승이다. 필멸자 몇을 잡아먹었다곤 하나…”
“디오니소스 님…”
디케의 눈은 불의를 꿰뚫어 보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안대로 가렸다.
불의를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 눈이 무슨 소용이지?
디케의 검은 모든 불의를 심판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검을 휘두르기 전에 항상 망설여야만 했다.
정의를 위한 휘두름에 망설임이 묻어나는데, 이 검이 무슨 소용이지?
디케는 분명 정의의 신격이였으나,
그녀보다 강한 자들은 질서의 한 축인 정의의 위에 있었다.
디케의 입에서 나오던 격앙 어린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에게서 보이는 감정은 애원과 동경, 간절함.
“예. 짐작하신 것이 맞습니다. 큰아버지… 하데스 님께서는 자비의 신이라 불리시지요.”
“……”
“수많은 올림포스 신들 중, 천칭이 선으로 기울어진 신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렇게나…”
나는 디케의 손에 들린 저울을 보았다. 그것은 한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었다.
한쪽은 선, 다른 한쪽은 악의 무게.
저것은 옳고 그름의 무게를 재는 저울.
그 제우스라 할지라도 자신의 업보를 마주해야 하는 여신의 신물.
“언젠가부터 제가 있을 자리는 올림포스가 아니라 저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올림포스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고…”
“……”
“마치 아테나 님의 뒤에 승리의 여신인 니케가 함께하듯, 상위 개념을 관장하는 신들은 하위 개념을 관장하는 신을 거느리기도 하지요.”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인간들에게는 자비의 신이라고 불리시지만, 제가 볼 때에는 누구보다도 공명정대하신 신이 하데스 님이십니다.”
그래서 전쟁의 신인 아레스가 패배를 뜻하는 데이모스와 공포를 뜻하는 포보스를 거느리고…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가 승리의 여신인 니케를 거느리는 것처럼…
“저, 정의의 여신 디케는 저승의 주인이시자 공정의 신의 뒤를 따르길 청하옵니다.”
신력이 듬뿍 담긴 신언이 알현실에 울려퍼졌다.
스틱스 강의 맹세보다는 덜하지만, 신의 신격을 걸고 하는 결의이자 선언.
지금 디케가 말하는 것은…
나를 공정의 신으로 인정하고, 정의의 신격을 하위 개념으로 받아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저승과 부, 자비로도 모자라 공정의 신격도 되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