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113)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113화(113/140)
정의와 저승
나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에오스의 다툼을 적당히 중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프로디테의 화를 가라앉히는 것이 제법 힘들었지.
[아프로디테, 너무 화내지 말고 조용히 들어라] [하데스?!] [에오스가 네게서 아레스를 빼앗았다면, 네가 아레스를 다시 빼앗지 못할 것이 있나? 사랑과 미를 주관하는 여신의 매력이 새벽의 여신보다 뒤떨어지리라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만] […하지만.]그간 새벽의 여신이 해내온 공로를 상기시키고,
자유로운 사랑이야말로 대장장이 신과 이혼하고 싶어했던 아프로디테의 마음이 아니었냐고 설득하고…
“에오스 여신님, 이미 임자가 있는 아레스를 노린 것은 잘한 게 아닙니다.”
“그건 공정의 신으로서 내린 판단인가요?”
“…누구라도 그렇게 대답할 겁니다. 정식 결혼만 하지 않았지, 이미 아프로디테와 아이까지 낳은 아레스를 넘보…”
에오스 여신에게도 뭐라고 하고, 눈치를 보던 아레스에게도 한소리하고…
하지만 이 모든 일에 공정의 권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디케의 신물, 정의의 천칭까지는 아니었지만 어긋난 일이 있다면 느껴지는 불쾌감.
이것이야말로 공정의 권능이자 의무겠지.
하지만 여기에 휘둘리지는 않겠다. 내 이성으로 알맞은 판단을 내릴 것이다.
태초부터 공정의 신이 아니라 저승의 주인에게 부가적으로 따라온 신격이였기에 가능한 판단.
‘공정의 기준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신성 모독의 경우, 사형이 기본적인 것도 그렇고…’
참고하는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내려지는 공정의 판결이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을 마치며 제우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 * *
다시 본 제우스는 구름 아래의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옥좌에 앉아서 손으로 턱을 기댄 그의 한쪽 눈에 푸른 빛이 감돌았다.
올림포스 신궁의 알현실로 들어온 나를 본 제우스가 손을 내저어 다른 신들과 시종을 물린다.
“지상을 살피고 있었나?”
“그렇지. 요즘 형님 덕분에 인간들이 죄를 덜 짓는 것 같기도 해서 말이야.”
“공정의 신격이니 뭐니, 피곤하기만 하다.”
제우스가 날 바라보며 슬쩍 웃는다.
“형님한테 여러 신격이 더해진 까닭이 짐작이 가네. 인간들도 저리 숭배하고 있고…”
“그래서 날 부른 이유가 뭐냐? 필히 중요한 일이겠지?”
“아… 그것 말인데.”
목을 가다듬더니 수염을 쓰다듬는 신들의 왕.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도 뜸을 들이는 거지.
“흠. 흠. 그… 정의의 여신 디케 말이야.”
“얼마 전부터 저승에 속하게 된 디케? 그녀가 무슨 일이라도 벌였을 리는…”
“형님이 공정의 신격을 받아들인 연유도 이해가 가지만, 내 체면도 조금 생각해주면 안되겠나?”
아. 제우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저승에서 일하는 디케가 시간이 날 때마다 신들에게 훈계를 하고 다닌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런데 여태까지 천방지축이던 신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겠고, 제우스에게 하소연을 한 모양.
디케에게 말해봐야공정의 신인 내가 버티고 있었으니 제우스에게 간 건가?
“물론 단칼에 내치긴 했지만, 그래도 불만이 꽤 있는 모양이야.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 살아왔으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놈들이 많군. 쯧.”
“험. 모든 일이 정의롭게 흘러간다면 좋겠지만, 꼭 그런 것이 능사는 아니니까.”
너무 올바른 정의를 쫒는 것은 현실과 부딪히기 마련.
이성과 감성의 충돌처럼, 불의와 정의의 충돌 역시 적당한 균형이 있어야 한다.
내가 디케를 지지한다고 해도 극적인 변화는 조금 힘들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내가 디케를 받아준 의미가 없을 터. 서서히 바꿔 나가는 것이라면 가능할까.
제우스도 이를 짐작했기에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의도가 있었겠지.
서신으로 보내면 이쪽에서 오해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네가 요즘 자제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헤라의 눈치를 보는거냐?”
“헤라클레스도 잘 자라주고 있으니까, 으흠.”
“네 말에도 일리는 있군. 디케에게는 적당히 말해놓겠다.”
“오. 들어주는 건가? 고맙구먼.”
“하지만 너도 신들이 무분별한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관리 좀 해라. 디케가 껄끄럽다면, 그녀가 나설 일을 많이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니냐?”
떨떠름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제우스.
그야 뭐, 수많은 신들을 일일이 다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고위 신격들이 위에서부터 모범을 보이면 신들의 성품도 조금씩 바뀔지도.”
“자비와 공정의 신이라고 인간들에게 칭송이 자자하더니 과연 그런 면모도 있구만.”
“내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짐 같은데… 나중에 기가스와 싸울 때를 생각해서 받은 것도 있다.”
“하기야, 지금의 형님이라면 포세이돈보다 강하겠군.”
제우스의 말이 맞다. 인간들로부터 온갖 미사여구로 추앙을 받는 지금의 나는 포세이돈보다 강하다.
물론 그의 영역인 바다에서 싸운다면 지겠지만, 대등한 조건이라면 내가 조금 더 우위를 가지겠지.
그렇다고 해도 크게 유의미한 차이까지는 아니다.
저승의 신격에 이것저것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이니.
“아무튼 지금 저승에 있는 디케에게는 적당히 말해놓겠다.”
“디케의 자매들이 서운해하더군. 내 딸들이지만 우애가 좋아.”
이제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볼까.
* * *
하데스가 올림포스로 갔을 무렵, 저승.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정의의 여신.
왜냐하면 오늘은…디케에게 페르세포네가 저승의 업무를 제대로 알려주는 날.
“디케 언니!”
“…하데스 님의 총애를 받는 데메테르 여신님의 딸?”
“말 편하게 하세요! 그냥 페르세포네라고 불러도 돼요!”
“그래. 페르세포네.”
“언니도 이제 저승에 속하게 되었으니, 여기 소개는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즉, 며칠 전에 봄과 씨앗의 여신인 페르세포네와 약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곧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발랄한 여신 하나.
그녀와 약속한 시간보다 한참 늦었긴 했는데…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그 정도까진 아닌데…”
“아니 그게, 이승에 들러서 씨앗이 잘 자라도록 축복을 잠시 내려주느라…”
디케는 알고 있었다. 페르세포네를 비롯한 많은 신들이 바삐 일한다는 것을.
비록 하데스 님께서 정의를 세우려는 그녀를 배려해 많은 일은 맡기지 않으셨지만…
그녀 스스로도 제법 이곳에서 일했지 않은가?
저승에 온 첫날에 받은 그 엄청난 업무가 고작 일부분이였다는 사실도 알았고.
“괜찮으니 오늘 알려줄 것이나 소개해주렴.”
“네 언니! 일단 저를 따라오세요. 저희 집무실이 이쪽인데…”
페르세포네를 따라간 디케는 곧 서류의 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올림포스 12신의 개인 궁전과 버금가는 넓이의 집무실에서 수많은 이들이 바삐 움직이며 양피지를 나르는 광경.
많은 전령들과 하급 신격들이 집무실로 달려와 보고하고, 다시 책임자의 명령을 전달.
한쪽에서는 양피지의 산에 둘러쌓인 고위 신격들이 책상에 고개를 처박은 채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퓌리플레게톤(Pyriphlegethon)강에서 또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영혼들이 또 불길의 강을 건너기 싫다고 떼를 쓰는 모양이네요. 원래 그곳을 통제하던 여신의 권속은…”
“이봐! 112번째 식량 창고의 넥타르 수량이 맞지 않잖나! 이거 어떻게 된 거냐?”
“그곳의 경비병들에게 다시 재고를 제대로 파악하라고 이르겠습니다.”
“내가 이런 것까지 신경써야 하나? 똑바로 다시 조사해서 올려보내!”
“환생에 영혼 하나가 잘못 들어간 모양입니다. 원래 남성의 몸에 들어갔어야 할 자가 여성의 몸으로 환생해버렸습…”
“어떤 머저리 같은 놈이 그거 하나 똑바로…!”
“뭬야?! 영혼을 잘못 집어넣어?”
“대체 어느 신이 책임자냐! 머리에 붉은 뿔이 달린 그놈인가?”
“자네도 레테 여신님의 축복을 받았나? 그놈은 죄인들을 고문하는 역할이고!”
엄청나게 왁자지껄. 아니 난장판인 저승의 광경.
모든 필멸자들이 두려워하는 저승의 실태에 압도당한 디케에게 한 신격이 말을 걸었다.
아니, 디케 옆의 페르세포네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페르세포네 여신님?! 여기서 뭘 하고 계신겁니까? 어서 이쪽으로 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저 오늘은 디케 언니의 안내를 맡았어요!”
“…부럽습니다.”
싱글벙글 웃는 페르세포네 여신.
그녀가 곧 손가락으로 한 여신을 가리켰다. 그 여신도 페르세포네와 디케를 보았는지 고개를 슬쩍 숙여보였다.
눈 밑가에 드리운 음영이 동정심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일단 하나씩 소개시켜 드릴게요. 얼굴은 알고 있어야 하니까.”
“으음.”
“먼저 이쪽은 메두사라고 하는데. 아시죠? 예전에 페르세우스…”
“정의의 여신께 인사 올립니다.”
“…디케라고 불러도 좋아.”
“그럼 저는 업무가 밀려있어서.”
인사를 마치고 다시 책상으로 고개를 돌리는 메두사를 보던 봄의 여신이 디케에게 말했다.
그녀는 생전 신들로부터 너무 많은 피해를 입고 하데스가 신으로 만들어준 필멸자.
하데스가 그녀를 배려해 업무량을 적게 배정해줬고 여러 편의를 봐줬지만,
오늘처럼 일이 바쁜 날에는 종종 자발적으로 업무를 거들어주는 착한 여신이라는 설명이 잠시 이어졌다.
“…어. 그리고 저쪽은 민트의 여신, 멘테라고 하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정의의 여신님!”
“그래. 하데스 님의 상징을 만든 님프가 여신이 된 이야기는 나도 많이 들었단다.”
청량한 향기가 감도는 민트의 여신은 울상이 된 얼굴로 허겁지겁 움직이고 있었다.
페르세포네와 메두사가 저승에 오기 전까지는 그녀가 막내였다고.
다음으로 봄의 여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양피지의 산 안에서 느껴지는 두 여신이였다.
페르세포네보다 높은 신격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대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스틱스으… 이거 잘못 적은 거 같은데요?”
“아앗! 미안해요. 레테! 오늘따라 바빠서 자꾸 이런 실수를….”
“하아…”
디케는 그녀들에게 다가가 슬쩍 인사를 건네보았다.
그들의 대화로 추측하건데 저들은 스틱스 강의 여신과 망각의 여신.
티탄들의 시대부터 존재했던 고위 신격이기에.
“얼마 전부터 저승에서 일하게 된 정의의 여신, 디케입니다.”
“저도 보고는 받았습니다. 테미스 여신의 딸이라면서요? 그런데 정의의 여신이라면.”
“재판장으로 배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신물인 천칭은 이름 높은…”
“그것도 괜찮겠지만, 정의를 주관한다면 이승의 일도 신경써야 할테니…”
디케는 생각했다.
저승은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곳이 바로 모든 신들이 기피하는 근무지, 지하 세계의 현황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