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115)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115화(115/140)
밤의 여신, 닉스 – (2)
“어머, 그렇게 고개를 숙이면 불편하지 않니?”
부드러운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눈앞의 여신을 마주했다.
나와 마찬가지인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 그리고 타나토스 신과 같은 검은 날개.
티끝 하나 없이 곱게 아름다운 검은 옷의 여신은 마치 인공적인 조형물과 같은 미를 뽐냈다.
마치 생명체가 아닌 것이 생명체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스윽-
“그렇지, 고개를 들어도 좋단다. 너도 따지고 보면 내 후손이 아니니?”
“알겠습니다. 닉스 님.”
나를 흥미어린 눈동자로 바라보는 밤의 여신.
그리고 옆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인 헤카톤케이레스 형제들.
“흥… 내 자식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구나. 너를, 아니 우리를 가이아의 위협으로부터 도와 달라고.”
“……”
“그렇게나 가이아가 무서웠니? 후훗… 귀엽기도 해라. 딱하기도 하네.”
입을 살짝 가리며 말하는 저 태도는 비웃음일까? 아니면 순수한 감상에서 나온 것일까.
밤의 어머니이시자 그 우라노스와도 대등한 프로토게노이의 감상…
“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가이아 님이 두렵습니다.”
“어머?! 얘도 참. 농담이나 조금…”
“가이아 님께서는 저희가 티탄 신족들을 타르타로스에 가뒀다는 이유로 기가스라는 괴물을 양산하셨고, 티폰이라는 막강한 존재도 탄생시키셨죠. 저희는 괴물들을 무찔러 가이아 님의 인정을 받고 싶지만, 만약 그분께서 끝까지 저희를 적대하실 가능성도 생각한 것뿐입니다.”
밤의 여신, 닉스 님은 화가 나면 오히려 가이아보다 자비롭지 않다.
태초의 밤은 곧 소멸과 죽음. 닉스 님의 다른 이름은 죽음의 어머니. 애초에 이분의 아들이신 타나토스가 죽음의 신이니…
나는 슬쩍 검은 여신의 눈을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내게 서슴없이 장난치셨지만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검은 눈동자를.
“…그것뿐이니?”
“……”
“아이들의 부탁과 내 개인적인 호의에 기대는 것이 끝이라면 나는 너희를 도와줄 수 없단다.”
당연히 이렇게 나오시겠지. 프로토게노이를 끌어들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조건.
다만, 한가지… 내가 기대어 볼 만한 것이 있다.
“만약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프로토게노이들 중 그 어느 분보다도 닉스 님의 이름을 연호하는 자가 많도록 만들겠습니다.”
“흐응?”
“제 신전은 저승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신들을 모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곳의 상석에 닉스 님의 신상을 만들고, 밤의 여신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매일같이 닉스 님을 찬미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필멸자들의 추앙 따위가 프로토게노이를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대지모신 가이아와 밤의 여신 닉스 님은 다른 태초신들과 달리 인간들을 많이 접하는 자들.
이곳에만 존재하는 타르타로스 님이나 어둠 그 자체인 에레보스 님보다는 필멸자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겠지.
내 말을 곰곰히 생각하던 검은 여신이 입을 열었다.
“아, 인간들 말이구나. 고요해야 할 밤마다 항상 시끄러운 필멸자들.”
“네…?!”
“그것보다 이건 어떠니? 이승에 존재하는 시끄러운 인간들을 모두 쓸어버린다면… 다시금 예전처럼 고요한 밤이 돌아올 테고, 나도 너희를 도울 마음이 생기다는 것은? 물론 너를 모시는 자들도 예외를 두지 않아야 한단다.”
진심이신가?
* * *
닉스 님을 보았지만 표정 변화를 알 수 없었다.
어떠한 감정이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 현상이 의인화 된 태초신의 의도가 읽히지 않는다.
어째서 저런 말씀을 하셨을까. 나를 향한 시험인가?
하지만 굳이 인간들을 이용해 날 시험하실 이유는 없을 텐데.
정말로 고요한 밤이 마음에 드시고, 시끄러운 필멸자를 전부 쓸어버리고 싶어하시는 것일까.
“왜 말이 없니? 네게는 손쉬운 일일 텐데.”
“……”
“그깟 생명체, 다시 만들면 되지 않니? 너희가 한번 대홍수를 일으켜 멸종시킨 그 종족 정도야.”
손쉬운 일이 맞다. 올림포스 12주신 중 아무나 나서도 필멸자를 절멸시키기에는 충분하다.
가이아의 위협에 비한다면 인간의 절멸은 싸게 치르는 값도 맞고…
다시 만들면 되는 것도… 맞다.
아무나 한 인간을 살려놓고 돌을 어깨 너머로 던지라고 하면 재창조 할 수 있는 것이 인간.
애초에 기가스의 위협 때문에 영웅을 탄생시키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지 않았나.
내가 아무리 신들 중에서 인간들에게 제일 자비롭게 보인다고는 하나,
나 역시 불멸자. 인간들보다는 내 가족, 내 형제들이 더 소중하다.
하지만…
“위대하신 플루토 신이시여! 당신의 자비를 바라나이다!”
“전쟁터에서 죽은 저희 아들이 지하 세계에서는 부디 행복하길…”
“자비의 신께서 이승에 보내주신 민트 덕분에…”
“플루토시여, 저를 비호해 주소서…”
지금도 나를 믿고 기도하며 자비와 공정을 노래하는 이들의 기대를 배반하기는 싫었다.
미쳐버린 오이디푸스 왕의 위협에서도 내 신전을 떠나지 않았던 사제들, 내 자비를 바라는 신도들.
내 이름과 권위를 빌려 공정하게 판결하길 기도하는 재판관. 사후에 안식을 바라는 불치병 환자들…
인간들이 이름 붙인 자비의 신이라는 직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올림포스의 가족들보다 인간을 위한다는 같잖은 위선을 지켜 추앙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인간을 또다시 멸종시킬 수는 없습니다.”
“…?”
그저, 필멸자를 대함에 있어 다른 신들처럼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뿐.
프로토게노이 앞에서 방금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이것 때문이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 * *
밤의 여신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실패했다고 여긴 순간,
꾹 참다가 터뜨린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푸… 푸흐흣…! 그냥 장난이였단다. 뭘 그리 심각하게 반응하니.”
“무슨…”
방금까지 느껴지던 위압감은 온데간데없이, 날 향해 웃어보이는 프로토게노이.
아름다운 미소가 주변을 환기하지만 나는 따라서 웃을 수가 없었다.
정말 장난이였을까? 올림포스 신들이 변덕스럽다지만, 가이아를 비롯한 태초신들보다도 그럴까?
방금 내게 말한 것은 한순간의 변덕에 불과할지도…
“내 아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저승의 왕 하데스는 올림포스 신들 중에서 제일 공정하고 자비로우며… 도울 가치가 있는 신이라더구나.”
“과분한 평가입니다.”
“필멸자들을 무척 아낀다기에 그냥 궁금했을 뿐이니 마음에 두지 마렴.”
폭-
검은 여신이 자신의 검은 날개에서 깃털 하나를 뽑아 내게 내밀었다.
프로토게노이의 신체답게 제법 막강한 신력이 담긴 깃털.
양 손으로 그것을 받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닉스 님이 말을 이어나가셨다.
“그 깃털을 들고 하늘의 신에게 찾아가렴. 그, 아니 그녀라면 한눈에 알아볼 것이란다.”
“설마…”
하늘의 신은 제우스다. 하지만 그녀라면 단 하나뿐인 존재밖에 떠오르지 않아.
자신의 자식에게 남성기를 거세당하고 남성성을 잃은 것으로 취급되어 여신이 된 우라노스.
닉스 님과 같은 프로토게노이이자 나의 할아버지.
지금은 쫒겨난 천공의 신. 크로노스 이전에 세계의 패권을 쥐었던 자.
“그래. 여신이 된 우라노스.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증표를 받아 내게 가져온다면 너희를 도와주겠다.”
자신의 깃털을 주신 이유는 쫒겨난 우라노스 신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
크로노스에게 성기를 잘린 그가 우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시험이다. 정말 우리 올림포스 신들이 우라노스 님의 우호를 이끌어 낼 수 있겠냐는.
우리가 크로노스를 몰아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잘 말해보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알겠습니다. 반드시 우라노스 님을 설득해 보이죠.”
“후후… 기대하고 있으마.”
산 넘어 산이로군.
다른 프로토게노이, 그것도 천공의 신 우라노스의 증표를 받아오라…
* * *
가이아의 손자, 지금은 저승의 왕이라고 불리는 하데스가 떠나가고…
닉스는 타르타로스 제일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세계의 패권, 가이아와의 다툼, 종의 멸종… 이 모든 것은 그녀와는 관련없는 일.
앞에서 흐르는 강물이 뒤에서 밀려오는 물길에 밀려나듯,
세대가 바뀌는 것은 당연한 세상의 흐름.
하지만 그것를 막으려는 가이아의 일에 별로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어머니.”
“에리스니? 오늘도 왔구나. 저번에는 타나토스가 와서 애원하더니…”
“단 한번만, 제 사위의 말을 들어주시면…”
“어… 계십니까?”
“케레스. 영혼들을 수확하러 다닌다고 고생하는 네가 여긴 웬일이니?”
“저도 어제 왔던 에리스와 똑같은 이유입니다. 제발 한번만…”
닉스의 자식들은 주기적으로 그녀를 설득했다.
하데스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그녀였지만 모두가 그를 고평가 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들었다.
그녀의 아이들 중 하데스보다 어린 신격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을 터인데.
모두의 마음을 얻었다는 말인가? 젊다못해 어린, 가이아의 손자가?
궁금증이 생긴 그녀는 낮의 여신이자 자신의 딸인 헤메라와 자리를 바꿔 하늘로 나왔다.
어두컴컴한 밤하늘 위에서, 태초의 여신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달 마차를 모는 셀레네가 구름 위에서 돌아다녔고… 더욱 아래로 내려가자 필멸자들이 보였다.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이 만든 생명들.
밤하늘 아래에서 손을 모아 기도하며 애원하는 작은 존재들.
닉스는 저승의 주인인 하데스와 관련된 이야기만을 쫒았고…
“플루토 신이시여. 오늘도 당신께서 내려주신 민트 잎사귀의 은혜를 찬미하며…”
“주 플루토시여. 공정과 자비를 주관하시는 당신의…”
“울지 마렴. 내가 저승으로 가 플루토의 품에 안긴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그분께서는…”
그에게 기도하는 수많은 인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실한 믿음. 죽은 자에게 내려지는 판결의 정당함. 자비와 공정의 신.
인간들은 그 누구도 하데스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두려움의 대상인 저승을 다스리고 있다고 해도… 좋은 쪽으로 치우쳐진 평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닉스의 취미는, 바로 밤하늘 아래의 존재를 관찰하는 것.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플루토…아니 하데스는 그녀의 아이들이 말했던 대로 필멸자를 굉장히 아끼는 아이였고,
한 번쯤은 그녀가 시험해 볼만한 존재였다.
만약 우라노스의 증표를 받아온다면 그녀는 기꺼이 올림포스를 도우리라.
당연히…
“엄마. 밤하늘은 어느 신께서 만드시는 건가요?”
“으응… 닉스 님이라는 분의 은혜야.”
“닉스 님이요? 그분은 제우스 님보다 더 쎄시나요?”
“어… 아마 아닐 거란다. 제우스 님께서는 신들의 왕이시잖니?”
“그곳의 상석에 닉스 님의 신상을 만들고, 밤의 여신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매일같이 닉스 님을 찬미하도록 하겠습니다.”
절대로 자신을 가이아의 손자보다 아래로 알고 있는 인간이 있어서가 아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