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154)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155화(154/179)
기간토마키아(Gigantomachia) – (3)
나는 플레스라 평원을 가로지르며 보이는 기가스들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있었다.
이 정도로 힘을 휘두르는 것이 얼마만이지?
티탄들과의 오랜 전쟁을 제외한다면, 티폰과 싸웠을 때가 마지막이다.
온 몸을 가득 휘감는 만능의 신력. 모든 생명체들은 공포에 떨며 두려워해도.. 내게는 너무나도 친숙한 저승의 기운.
콰아아아앙-
“크아아악!”
“젠장, 저승의 신을 막아!”
“에우리메돈 왕께서는 대체…!”
나는 전쟁의 신인 아레스처럼 싸움을 즐겨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런 중요한 전장에서 적들을 학살하다 보니, 가슴에서 고양감과 열기가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적들이 여태까지 우리 신들과 지긋지긋하게 싸워오던 기가스라면 더더욱.
“꺼… 억!”
또다시 내 바이던트에 목이 꿰뚫린 기가스의 단발마가 들려왔다.
내가 타고 있는 전차와 바이던트, 전차를 모는 유령마들은 괴물의 체액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나간 수많은 기가스들의 시체는 땅 밑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서서히 사라졌기에 눈치채는 것이 늦었군.
전장의 열기에 모두가 휩싸여 있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테고.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들처럼, 계속해서 내게 달려드는 적들을 죽이고 있었는데…
슈우웅- 푸확!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드는 지팡이가 또다른 기가스의 배를 뚫고 지나갔다.
뱀 두 마리가 타고 올라가는 형상을 띤 지팡이는 전 세계에서 오직 하나뿐.
올림포스의 전령신, 헤르메스의 상징인 카두케우스(Caduceus).
“뭔가 이상합니다!”
온몸이 피칠갑이 되어있고 황금빛 이코르를 흘리는 전령신.
치열한 전투를 겪고 온 듯, 넝마가 되어있는 모습인 그가 다급히 내게 다가와 소리친다.
“헤르메스. 진정해라.”
“시체들이 스며드는 땅에서 기이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는 분명히…!”
플레스라 평원에서 느껴지던 이상한 기운.
그저 기가스들의 본거지라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도 감안하면…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의식진이나 함정, 주술이나 마법이겠지. 나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까 데메테르가 대지에 손을 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
“…!”
“분명 대지모신의 수작이겠지. 이 많은 기가스들의 시체와 원념을 재료로 삼은…”
대지 위에 떨어진 모든 것은 아래로 흡수되었다.
아마도 수천에 달할 기가스들의 시체와 피. 원념과 신들의 신혈(이코르).
제우스에게 바치는 인간들의 올림피아 제전마냥.
이 전투 자체를 하나의 의식으로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콰아아아아!!!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는데 포세이돈이 불러낸 거대한 물기둥이 눈에 보였다.
자신을 둘러싼 기가스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바다의 지배자가 삼지창을 휘두르며 그들을 비웃는다.
“흐하하! 바다에는 감히 다가오지도 못했던 것들이!!”
그의 삼지창은 지진을 일으키는 강력한 권능이 있다. 그렇다면 땅을 아예 뒤집어 엎는다면…
이 함정으로 추정되는 현상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데메테르와도 연계하고, 헤파이스토스의 불길로 뒤덮으면 될 터.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하던 나에게 보이는 것은 수많은 신수.
크르렁! 음머어-!!! 카르릉…
제우스가 불러낸 독수리를 제외하고도 황소나 표범, 하늘을 날지 못하는 많은 신수들이 눈에 밟혔다.
저승에서 데려온 신수나.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없는 신격들도 있었고…
지진은… 안 돼. 아군까지 휩쓸린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지상의 인간 영웅들이나 하급 신격들은 투입하지 않았지만.
평원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면 우리 쪽의 피해도 커진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방법은 일단 한가지.
저승의 힘으로 이승의 영역을 침범한다면… 즉, 평원을 저승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가능하다.
아무리 신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일이 중요해도.
기가스에게 패배할 수도 있는 마당에는…
고오오오오ㅡ
이미 늦었나.
* * *
대지에서 붉은 기운이 잔뜩 치솟아 평원의 한가운데로 모여든다.
그것들의 목표는 제우스와 다투고 있던 기가스의 왕, 에우리메돈.
“무슨! 저쪽에 무슨 일이…?”
“제우스 님이 싸우고 계신 곳인데? 아니, 설마…”
“헤카테 님! 이건 대체 무슨…”
“제우스!”
번쩍- 콰르르릉!!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제우스가 벼락을 내리쳐 보지만 그것의 진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정말… 주변을 신경 써야만 하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는군.
다른 올림포스 신들의 존재를 의식하느라 주변을 쓸어버리는 위력의 공격은 할 수가 없다.
나도. 포세이돈도. 제우스도 마찬가지. 그래서 제우스가 스퀴테를 들고 왔겠지만…
제우스와 싸우던 에우리메돈 왕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당장이라도 죽기 직전의 몰골을 하고 있는 기가스의 왕.
배에 구멍이 뚫리고 머리가 반쯤 날아간 괴물은 자신에게로 모여드는 붉은 기운들을 보더니 흉소를 내뱉었다.
“크. 흐흐… 제우스! 나는 졌지만, 어머니께서는 아직 패하지 않으셨다!”
“뭐라?”
푸욱.
그렇게 놈이 들고 있던 횃불을 가슴팍에 박아넣으며 크게 외치는 순간.
에우리메돈 왕이 쓰러진 자리에서부터… 평원 전체에 거대한 진이 만들어졌다.
테베 인근에 강림했던 크로노스 때와 흡사한 느낌이지만, 아예 질적으로 다르다.
저번과는 다르게 의식만을 끌어오는 수법이 아니야.
지금 우리의 발밑에 그려진 것은 소환진. 분명 헤카테 여신님이 신수들을 소환할 때 쓰던 방법인데.
평원 전체에 새겨질 정도로 거대한 크기에, 이만한 신력과 제물. 이걸 때려부수고 진행을 멈추려면 제법 힘을 써야 하겠어.
분명히 불러오는 이에게도 상당한 힘을 제공할 수 있겠지. 대체 어느 놈이냐…
.
..
…
이 느낌은 설마.
티타노마키아 당시 죽어라 싸웠던 그.
크로노스를 제외한다면 티탄 중에서 가장 강했고, 가장 힘이 센 티탄.
번쩍- 화아아악!
바닥에 쓰러진 에우리메돈 왕을 뒤덮은 강렬한 빛기둥이 끊기자.
그 자리에는 티탄 신족 하나가 서 있었다.
“…네놈이 기여코!”
“여어. 제우스. 오랜만에 보는군.”
목과 어깨를 풀고 천천히 걸어나오는 자.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는 태연한 어조와 태도였지만, 신들의 왕마저 그를 경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짊어지고 있던 천구가 조금 많이 무거워서 말이야.”
티타노마키아에서 패배한 벌로 천구를 짊어지고 있던 티탄 신족.
우리들의 아버지, 크로노스조차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상대가 되지 않던 자.
마지막까지 제우스에게 저항한 티탄.
“아틀라스! 이번에는 타르타로스로 들어갈 각오를 하도록 해라!”
“글쎄. 네가 들어가게 될 수도 있지.”
위대한 티탄 신족. 아틀라스(Atlas)니까.
* * *
천구를 떠받치는 벌을 받고 있어야 할 아틀라스의 갑작스러운 등장.
나는 조용히 제우스의 옆으로 다가가며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포세이돈도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아틀라스.”
“하데스. 그쪽도 오랜만이다. 타르타로스에 있는 내 형제들은 잘 지내나?”
“잘 지내고 있는지, 이참에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보면 되겠군.”
아틀라스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씩 웃는다.
제아무리 아틀라스가 직접 나서도 나와 제우스, 포세이돈을 상대로는 전혀 승산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양쪽 다 만전의 상태일 경우.
제우스의 팔뚝에 흐르는 이코르가 눈에 띤다. 포세이돈은 수백의 기가스들을 갈아버리느라 약간 지친 얼굴.
나 역시 지속된 연전으로 힘이 제법 소모되었다.
반면 아틀라스는…
“이야. 대지모신의 권능이 정말 좋긴 좋아. 지금의 너희들이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수많은 기가스들을 제물로 처먹으니 좋더냐?”
“당연하지. 포세이돈. 너희가 내게 떠맡긴 천구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으니까…”
나는 이 티탄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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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일이 생각나는군.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네가.”
“아. 아. 그때야 그랬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니까 말이야. 대지모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겠거니 싶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가스들을 전부 처죽였더니 이제는 아틀라스라.
아니, 어쩌면 제법 위기였기에 신경이 예민해진 것일 수도 있겠네.
“아틀라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시 천구를 짊어지는 자리로 돌아간다면…”
아주 오래전, 티탄 전쟁 막바지.
크로노스를 포함한 다른 모든 티탄을 제압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저항했다.
우리들과 아틀라스는 모두 지쳐 있었고. 그와는 적당히 타협하자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제우스마저도 아틀라스를 힘으로 완전히 제압할 수 없어서 건넨 제안이 바로…
반란하지 않고, 천구를 짊어진다면… 그의 아들딸과 자식들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
타르타로스에 갇힌 다른 티탄들과는 달리,
오직 그만이 이승에서 천구를 짊어지는 벌을 받고 있던 까닭이었다.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를 지키는 헤스페리데스들과 칼립소(Calypso) 여신을 비롯한 수많은 네 혈육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하지만 끝까지 우리에게 맞선다면 이들은 전부 타르타로스에 끌려가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크. 하하하하! 하데스! 그것 참. 이승에서 들려오는 소문처럼 정말로 자비롭군!”
“내가 좀 자비롭긴 하지. 반란을 일으킨 자에게도 활로를 열어줄 정도로.”
내 눈빛을 받아내던 아틀라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천구를 들고 있으면서 키워왔던 복수심과 투쟁심, 분노와 탐욕이 그의 눈에 휘몰아쳤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되겠군.”
“…”
“평상시라면 반역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너희의 힘은 소모되었고. 나는 오히려 강해진 상황이 아닌가?”
“네놈의 혈육은…”
“여기서 대지모신의 편에 선 내가 이긴다면 너희의 혈육이 타르타로스로 떨어지겠지. 물론, 제우스 너는 내 딸들과 결혼했으니… 나 대신 천구를 떠받치는 정도로 용서해주마.”
씩 웃은 그가 천천히 자신의 주먹을 들어올렸다.
변변찮은 권능도. 쓸만한 무기도 없는 그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
마치 프로토게노이를 연상시키는, 티폰이나 크로노스보다 견고한 육체.
눈앞의 적은 제우스조차 완전히 제압이 불가능했던 티탄.
어느 정도 소모된 우리들과, 오히려 힘을 받은 아틀라스.
마지막으로 대지 아래에서 또다시 모이는 불길한 기운.
나는 주변의 모든 신들에게 전언을 보내 소리쳤다.
“휘말리기 싫으면 전부 물러나라. 플레스라 평원은 단번에 사라질 테니까.”
이렇게 된다면 뒤를 생각할 여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