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163)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164화(163/179)
황금 사과의 이야기 – (2)
제우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슬쩍 황금 사과를 밀어보지만,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떠넘기려는 모양새가 괘씸했거든.
“너도 머리가 많이 아픈 모양이네.”
“으흠. 다른 신의 지혜를 빌리자니, 지혜의 여신인 내 딸은 황금 사과를 노리고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공정의 신격인 내 도움을 받겠다?
그나마 내가 결정한다면 세 여신의 다툼이 덜할 거라고 여긴 거겠지.
“결국 나한테 떠넘기는 것이 아니냐?”
“아니. 마땅히 결정을 할 자도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저길 보라구.”
제우스의 시선을 따라가자 세 여신들이 아직도 이 황금 사과를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소유욕과 자존심이 깃든 눈빛을 보아하니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게… 사실. 나보다는 아무래도 형님이 신뢰가 더 있지 않나? 저번에 아레스와 포세이돈의 재판 건도 그렇고. 애초에 공정의 신이니…”
“공정한 방법이라면 사실 결혼식의 주인공인 테티스 여신에게 주는 것이 맞는데. 아니면 사과를 세 조각으로 나누던가.”
“으음…”
아니. 정말로 그렇다니까?
“일단 결혼식이 끝나고 계속 생각해 봐야겠군.”
“그래. 나도 좋은 방법을 찾아 보겠다.”
제우스가 못 미더워도 신들끼리 싸울 때에는 의외로 잘 판단했지.
저번에 포세이돈과 아레스의 다툼이라던가, 아프로디테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남신들이 달려들 때에도 중립적으로 해결했으니.
일단은 제우스에게 맡겨놓을까.
* * *
하지만 황금 사과의 주인을 가리는 결정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무리 신들의 시간 관념이 필멸자와 다르다고 해도 과한 논의.
그 사이에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아들도 태어났고,
자신의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스틱스 강에 목욕시키려던 테티스의 요청도 거부했고…
“왜. 왜 안 되나요? 힘의 신도 갓난아기였을 적, 스틱스 강에서…”
“안 됩니다. 헤라클레스는 예외 중의 예외. 테티스 여신님의 아들은 예언의 영웅이 아닙니다.”
아폴론이 트로이의 인간 공주와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이번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뭐.
“하데스 님. 올림포스에서 온 서신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겠다는 제우스의 서신이 저승에 도착했고, 나는 올림포스로 올라갔다.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안 다른 몇몇 신들도 제우스에게 찾아와 의견을 내고 있었다.
“제우스 님. 차라리 그냥 헤라 여신님께 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신들의 여왕에게 준다는 명분도…”
“근데 그럼 다른 여신님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은 역시 하데스 님께서 정해주시는 편이 그나마…”
“저도 그렇습니다. 그나마 공정의 신격께서 판단하시는 게.”
아니. 왜 다들 나한테 미루려고 하는 거냐.
잠시 고민하던 제우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저 놈. 눈빛을 보니 뭔가 심상찮다.
“하데스 형님. 얼마 전에 가이아 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하시더군.”
“가이아 님이?”
“영웅들이 지상에서 너무 활개를 치고 다녀 괴물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 모조리 잡아죽이고 있다는데.”
“뭐라고?”
“저번에 기간토마키아 때, 기가스들을 잡아 바치던 영웅들을 생각해보라고. 그들이 그런 힘으로 대지를 누비니 가이아께서도 거슬리셨겠지.”
지금의 대지모신은 우리를 완전히 인정했다.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 때는 오지 않았지만, 자신의 손녀인 테티스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덕담을 전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올림포스를 쫒아낼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는 뜻.
하지만… 그녀는 태초신, 프로토게노이다.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고. 신들의 왕인 제우스마저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자.
우리를 인정하셨다지만 갑자기 변덕을 부리면 또다시 티폰 같은 게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까.
제우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영웅들이 위업을 찾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저번에 플레스라 평원에서 기가스를 제물로 바쳤을 때, 내가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고 있지 않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 황금 사과를 이용해 영웅들을 쓸어버리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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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대홍수 같은 신벌을 내리지는 않을 거야. 탐욕과 이기심에 물든 자들만을 휘말리게 만들 생각이지.”
탐욕과 이기심이라. 전쟁,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구나.
하지만 전쟁은 필연적으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 내기 마련인데.
“그리고… 굳이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어차피 인간들 간에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여.”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요즘 디케가 영웅들의 패악질을 내게 고하더군.”
“아폴론이 점찍은 트로이를 그리스 국가들이 호시탐탐 노린다는 헤르메스의 말이 있었어. 아마 반 세기가 지나기 전에 전쟁이 터질 터. 그것을 조금 앞당기는 것은 어떨까?”
잠깐.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상황이 너무나도 공교롭게 돌아간다.
지상에 괴물들의 씨가 마른 탓에, 위업을 찾아다니는 인간 영웅들.
짐승을 비롯한 온갖 생물들을 죽이는 그들 때문에 불만을 호소하며 영웅들을 쓸어버리길 원하는 대지모신.
마지막으로 딱 적당한 시기에, 원하는 명분을 만들 수 있는 황금 사과까지.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은 몇 번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그 강대한 티탄 신족들과 맞서 싸울 때, 우리가 승리할 조건이 착착 갖춰지던 그때처럼.
“설마, 운명인가?”
내 말에 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이승에 전쟁이 일어날 운명이지. 어거지로 조금 뒤틀려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영웅들도 거슬리는데, 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명분도. 실리도. 대지모신의 신뢰까지 얻을 수 있는 기회인데?
제우스의 마지막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파고들었다.
* * *
티탄 신족이 세계의 패권을 올림포스에게 넘겨준 운명.
티폰과 기가스들이 우리에게 패배하는 운명.
오이디푸스 왕과 페르세우스 왕의 비극이 발생하는 운명.
하위 신격은 인지도 하지 못하며, 올림포스 12신 정도쯤 되어야 바꿔볼 시도라도 할 수 있는 법칙.
어떻게 보면 예언의 상위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정말 전쟁을 일으켜야겠어? 수많은 필멸자가 이로 인해 희생당할 텐데.”
“이번 건은 아무리 형님이 말해도 들어줄 수 없어. 신들의 왕으로서 내린 판단이야.”
제우스나 다른 신의 입장에서야 그렇겠지.
언젠가는 벌어질 전쟁의 불씨를 살짝 당기는 것만으로…
가이아의 신뢰를 얻고, 신들에게도 위협적인 영웅들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
“…제우스. 네 권위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더는 말하지 않겠다.”
“음. 그건 고맙군.”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으니. 나 나름대로 이승에 어느 정도 개입하겠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아예 포기할 수는 없다.
분명 조금은 뒤틀어버릴 방법이 존재하니까, 내가 페르세우스 왕의 비극을 완화한 것처럼.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조금 물러나 근처의 기둥에 몸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린 내 모습을 보던 헤르메스가 슬며시 제우스에게 다가와 말을 꺼낸다.
“그… 아버지.”
“헤르메스. 너도 의견이 있느냐?”
“하데스 큰아버지도 묵인해 주셨으니. 전쟁을 일으키실 거면 제게 맡겨주시죠.”
“자세히 말해 보아라.”
헤르메스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도 제가 이승을 자주 돌아다니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인간이 몇몇 보이더군요.”
“음.”
“황금 사과를 이용해 큰 전쟁을 일으키시려면, 역시 인간들 중에서 지위가 높고 화젯거리를 끌어모으는 자를 이용하면 됩니다.”
어느 나라의 왕이라도 이용할 셈인가?
“지금 인간 중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칭송받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를 데려와 황금 사과를 줄 여신을 고르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트로이의 왕자라…”
“분명 헤라 님을 비롯해 모두가 그에게 제안을 할 것입니다. 아테나 누님이라면 전쟁의 승리나 지혜를 준다고 할테고… 아마 아프로디테 여신님이라면 아름다운 여인을 준다고 하실 테니까…”
“그 인간이 누굴 고르든, 분명 난리가 날 것이다?”
헤르메스의 말에 다른 신들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그 인간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으나, 셋 중 누구를 골라도 명분은 충분할 겁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신탁과 병행하여…”
저게 말이냐. 인간 하나를 잡아다가 여신 셋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고.
그 다음에 전쟁을 일으킨다니. 역시 나는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제우스의 권위를 존중해 한 발자국 물러난 마당에 다시 끼어들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인간이 트로이의 왕자라고 했었지? 나중에 황금 사과를 줄 여신을 선택하는 자리에 잠깐 끼어들까.
만약 정신이 똑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여신들의 눈총을 받아도 보호해 주겠다.
한 나라의 왕자라고 하니, 이상한 생각을 할 가능성은 낮겠지만.
“헤르메스! 그럼 너는 세 여신들에게 향해, 트로이의 왕자에게 심판을 맡기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잠깐. 나도 같이 가지. 헤르메스.”
“예? 옙!”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해보자.
* * *
헤르메스의 의견을 들은 세 여신들은 흔쾌히 찬성했다.
지상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그 파리스라는 인간이 당연히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눈빛.
“그럼 바로 그 인간에게 향하지.”
“좋습니다. 트로이의 왕자라고 하니, 필멸자 중에서는 제법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겠죠.”
“흐으응… 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남성인데. 당연히 제일 아름다운 저를 선택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신경전이 더 이어지기 전, 잠시 끼어들었다.
아테나랑 헤라는 이미 확고하니. 그나마 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 잠깐.”
“왜요?”
“저번에 내가 너를 헤파이스토스와 이혼시켜줬지 않았나? 한번만 더 생각해 봐라. 굳이 꼭 이렇게 싸워야 하는지.”
“죄송해요. 아무리 하데스가 말해도 이건 제 신격과도 관련된 일이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요.”
“…아테나. 너도 같은 생각이냐? 헤라. 그쪽도?”
“저는 아직도 제가 제일 황금 사과에 어울리는 여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해도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에요. 하데스가 뭘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상관없지 않나요?”
아테나고 헤라고. 굳이 제우스가 직접 사과의 주인을 결정하지 않고 인간에게 맡긴 이유를 짐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다…라.
“하. 그래. 알겠다.”
신들은 다른 신이 내린 형벌이나 포상에 함부러 간섭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내려지기 전이라면 되돌릴 수 있어.
파리스라는 인간 왕자가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여파가 줄어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