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183)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183화(182/193)
외전 – 복수의 여신 알렉토
티탄 신족들과의 전쟁에서 우리 올림포스가 승리하고, 나는 곧장 저승으로 내려와 여러 신들을 만나고 다녔다.
불화의 여신 등 수많은 신이나 타르타로스를 지키는 헤카톤케이레스들과도 인사를 끝내고 향하는 곳은…
저벅저벅.
복수의 여신, 에리뉘에스들이 산다고 알려진 동굴이었다.
당연히 복수의 여신은 신들조차 기피하는 자들이지만. 기아의 여신 리모스 님이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 님과도 이야기가 잘 된 마당에 그들을 찾아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바깥에 손님이 찾아왔군.”
입구까지 걸어가자 동굴 안에서 들리는 미성의 목소리.
복수의 여신 중 하나의 목소리가 틀림없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들도 소름 돋는 오싹함이 느껴지니까.
에리뉘에스(Erinyes).
우라노스의 성기가 잘렸을 때. 대지에 떨어진 피에서 태어난 복수의 세 자매.
청동 날개와 피 흘리는 눈, 뱀의 머리카락을 가진 무시무시한 처녀신들.
쉬이익! 쉭!
“복수의 여신님들이 맞으십니까? 저는 하데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저승에서 함께 지낼 텐데, 잘 부탁드립…”
“…이쪽 동굴은 우리 자매들이 지내는 곳이니 찾아오지 말아라.”
냉혹하고 잔인한 이미지가 강했기도 하고,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 다가가기가 힘드네.
우라노스의 잘린 성기에서 태어난 그들이 보았을 때. 나는 그저 애송이 신격이겠지.
어쩌면 그들과 친해지는 것은 매우 어려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저승의 왕인데, 어찌 저승에 속한 신들을 배척하고 무시할 수 있겠는가.
저승의 주인이라는 무거운 직함에 걸맞는 신이 되기 위해서라도 올곧은 행보를 이어 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또옥. 똑.
바닥에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저 피눈물 소리를.
어떻게 멈춰줄 방법이 없을까?
* * *
나는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들고 주기적으로 그들이 사는 동굴로 찾아갔다.
세 자매의 대표 격인티시포네로부터,동굴 밖에 그냥 놓아두고 가라는 대답을 몇 번이나 받았을까?
“그럼 오늘도 놓아두고 가겠습니다. 아. 얼마 후에는 저승에서 연회가 열릴 텐데. 참석해 주실…”
“들어와라.”
이제야 마음을 조금이나마 열어 주시는 건가?
주기적으로 동굴에 방문한지 10여 년, 드디어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걸음을 옮겨 축축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싸늘하다 못해 차가운 복수의 신력이 가득 느껴졌다.
그리고 무감정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복수의 여신들.
끊임없는 분노를 뜻하는 알렉토 여신님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네가 이겼으니.”
“네? 그건 무슨…”
“모른 척 하지 말아라. 우리도 눈과 귀가 있고, 그간 허투루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니까. 제우스에게 반역할 때 우리를 불러라. 여태까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얻어먹은 값은 톡톡히 치르도록 하지.”
불륜을 심판하는 티시포네와 질투하는 자인 메가이라 여신이 뒤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응. 하데스가 제우스보단 나아.”
“기아의 여신 리모스(Limos)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도 만나고 다닌다는 소리는 들었다. 소외되고 배척받는 신들을 모아 올림포스로 쳐들어 갈 생각이지? 수완이 나쁘지 않군, 저승의 왕다워.”
그러니까. 내가 여태까지 자신들에게 방문하던 것은…
제우스를 향한 반역에 손을 보태달라는 설득 작업인 줄로만 알았던 것인가?
“아니. 지금 오해하시는 겁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곳은 제우스의 눈이 닿지 못하는 곳. 신중을 기할 필요라면…”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오해하시는 거라니까요?”
“…?”
복수의 여신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 * *
다행히도 오해는 빠르게 풀렸다.
“…그러니까 반란 같은 걸 할 생각은 없다고?”
“제가 왜 제우스랑 다투겠습니까. 올림포스 따위는 맡아봐야 일거리만 늘어나는데.”
“그럼 여태까지 소외된 신들과 친분을 쌓던 행보는…”
“그야 제가 저승의 신이니까요. 적어도 제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맡은 신격이나 외모에 따라 천대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입을 벌리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세 여신.
그녀들의 머리카락 역할을 하고 있는 뱀들마저 입을 벌리고 이쪽을 쳐다본다.
“으음. 혹시 이 말씀을 하시려고 저를 안으로 들이신 겁니까? 불편하시다면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아니… 이제부터는 그냥 들어와도 된다.”
주섬주섬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꺼내어 건네자, 일단 무언가 떨떠름한 얼굴로 받아드는 여신들.
나도 여기까지 온 김에 넥타르를 좀 들이켰다.
꿀꺽꿀꺽.
“하데스.”
“?”
“너는 다른 올림포스 신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구나.”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암브로시아를 받아드는 알렉토 여신님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승의 왕인 내가 이곳까지 찾아와서 자신들에게 신경 쓰는 것이?
물론 지금의 올림포스 신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 자들이 많겠지.
제우스나 포세이돈 같은 나의 형제들은… 티타노마키아에서 이기고 세상의 패권을 차지한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겠고, 새롭게 태어난 어린 신들은 이들을 그저 퇴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저승에 사는 신들조차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뭐가 저승의 왕이냐.
필멸자를 판결하는 이는 언제나 공정하고 완벽한 신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별 거 아닙니다. 그보다는 종종 저승에서 연회를 여는데, 거기에 좀 참석해 주셨으면 해서요.”
“…그것은 조금 많이 이른 것 같다.”
쉬이익.
머리카락의 뱀이 작게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분명 나를 경계하고 있지만, 처음 봤을 때만큼 적대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복수의 여신들의 감정이나 기분이 뱀 머리카락으로 반영되는 걸까. 제법 신기하군.
* * *
그로부터 시간은 점점 더 빨리 흘러갔다.
이제는 내가 동굴에 찾아가도 익숙하다는 듯이 다들 반겨주고,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티시포네와 메가이라 여신님이 이상하다.
종종 알렉토 여신님만을 남기고 이승으로 죄인을 괴롭히러 떠나는 기색을 보였다.
바로 지금처럼.
“흠. 흠. 잠시 이승에 다녀와야겠군.”
“좋은 시간… 보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빨리 가기나 해!”
오늘도 이 동굴에 알렉토 여신님과 나란히 앉은 채로 둘만 남겨졌다.
이런 적이 최근 들어서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설마, 아니겠지.
쉭. 쉬익.
알렉토 여신님의 뱀 머리카락이 내 어깨로 슬며시 타고 올라온다.
그걸 의식하니 알렉토 여신과의 거리감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 머리카락이 내게 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어 있었다니.
서로의 어깨가 닿을 정도. 묘하게 달뜬 것처럼 들리는 여신의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쉬이익…
스윽.
자꾸 보다보니 이 뱀 머리카락도 귀엽게 보였다. 내게는 이빨을 드러내는 일도 없었기에 더더욱.
반대쪽 손을 들어올려 머리부터 슬며시 쓸어내리자… 기분 좋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비벼오는 뱀, 아니 머리카락.
“귀엽네요.”
“뭐. 뭐. 뭐가! 나는 복수의 여신이라 하나도 안 귀엽거든!”
뱀들이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이쪽을 향해서 고정되어 있다. 역시, 귀엽네.
“아니. 그. 여신님의 머리카락이요.”
“으으… 그으럼.”
귀까지 빨개진 여신이 내게 뭐라고 작게 속삭인다.
“그. 그럼. 만져도 상관 없는데…”
귀여웠다.
뱀 머리카락이 아닌, 모두가 기피하는 복수의 여신이.
맙소사. 내가 복수의 여신을 귀엽다고 느낀 것인가?
사실 그들의 외형은 아름다운 다른 여신들에 비한다면 많이 부족하다.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 스틱스나 레테 여신님 등.
그런 여신들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는 복수의 여신이?
조금 더 의식하게 되자,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피눈물을 흘리는 눈과 뱀 머리카락만 제외한다면 어느 여신에게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의 외모와 몸매.
스으윽. 슥.
“흐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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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뱀들을 만져나갔다. 한 마리, 두 마리. 점차 내게 애교를 부리며 다가오는 뱀들이 많아졌다.
다섯 마리가 넘어갈 때쯤. 알렉토 여신님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신다.
터억. 쉬이이익?!
머리카락들은 갑작스러운 주인의 다가감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움찔거리던 뱀들이 다시금 평정을 되찾고 슬며시 다가온다. 정말 귀엽네.
“이. 이건 그냥… 내 머리카락이 귀여우면 조금 더 편하게 만지라고… 아. 아니…!”
“감사합니다. 저는 좋네요.”
“이런 건 좀 좋아하지… 하아. 너랑 있으면 내 복수의 칼날이…”
스으윽. 슥.
어느새 여신의 뱀 머리카락에 내 얼굴이 파묻힌 모습이 되었다.
이제 슬슬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하던 와중. 복수의 여신이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뱀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주변의 풍경 속에서, 그녀의 진지한 시선과 마주했다.
어째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녀의 붉어진 얼굴처럼, 내 얼굴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데스. 그거 아느냐?”
“무엇을…”
“내게 귀엽다고 해준 것은 네가 처음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아니. 이 머리카락들. 여신님이 조종할 수도 있는 것이었나?
“후웁…!”
입술과 입술이 서로 닿았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과 열기가 저승의 동굴을 덥힌다.
내 몸도. 함께 뜨거워졌다.
양 손을 뻗어 여신의 뒷 머리를 잡고 당겼다.
그렇게 뜨거운 입맞춤을 이어 나가다가 탁. 하고 서로 붙어있던 얼굴이 떨어졌다.
“하아… 하.”
“후…”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눈빛은 내게 무언가를 더 갈구하는 것만 같았고, 갈 곳 잃은 손은 애처롭게까지 보인다.
그리고…
-화아아악!
여신에게서 강렬한 빛과 신력이 뿜어져 나오며 그녀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아니. 모습뿐만이 아니다. 본질이 달라지고 있었다. 신격, 여신을 이루는 근본의 변화.
신격은 신이 단순히 관장하는 영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신의 근원이며, 신을 이루는 모든 것이다. 광기의 신이 광기를 표출하고, 사랑의 신이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그런데.
“…어?”
복수라는 감정이 의인화된 여신의 머릿속이, 한순간이나마 다른 감정으로 가득 찬다면…
그래도 복수의 여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복수보다 다른 감정을 깊게 깨달은 상황.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져… 죄책감과 복수, 보복이 의인화된 것과 마찬가지인 여신의 모습이 완벽하게 달라진다.
다가오는 이들에 대한 경계심을 형상화한 뱀들은 눈을 감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변했다.
끊임없는 고통과 증오가 형상화된 피눈물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철혈과도 같은 복수를 상징하는 청동 날개는 그 견고함을 잃고 하얗게 물들어갔다.
“아. 아아…! 내 모습이… 흐윽…!”
“…아름다우시네요. 알렉토 여신님.”
첫사랑의 여신, 알렉토(Alecto).
흰 날개와 옅은 초록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사랑의 기쁨인 황금빛 눈물을 떨어뜨리는 아름다운 여신.
“제가 여신님을 변하도록 만들었으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승의 안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정… 말로?”
“네. 제 첫사랑은 여신님입니다.”
저승에 새로운 안주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