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24)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24화(24/82)
플루토의 신전 이야기 – (1)
오랜 세월이 지나고, 하데스의 집무실.
저승의 왕은 오늘도 영혼들을 심판하며 엘리시움으로 갈 영혼들을 선별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전할 말이 있는 듯 다가오는 시종.
“하데스 님, 지금 저승에..”
“들여보내라.”
들어온 것은 노화로 인해 탈색이 되어가는 금발의 노인 영혼.
나는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승에 귀한 손님이 왔군.”
“저.. 저를 아십니까..?”
티폰을 속여 제우스의 힘줄을 가로채고 테베를 건국했으며, 아레스의 사악한 아들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쓰러뜨리고,
그 벌로 8년간의 종살이를 하다가 끝내 아레스의 용서를 받아 딸인 하르모니아와 결혼한 최초의 인간.
대영웅 카드모스가 두려워하며 내 앞에 엎드려 있었다.
“역시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기억이 사라졌구나. 므네모시네, 기억의 연못에서 물을 조금만 가져다주시죠.”
“알았어요, 하데스. 카드모스라면 상관없겠죠.”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
죽은 자가 레테 강을 지나며 물을 마시고 내 성채로 건너오면 이승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레테 강의 물과 반대되는 기억의 연못에서 물을 마시면 이승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
뭐.. 간혹 아주 강한 원한을 가지고 죽은 영혼들은 망각의 강물을 마셔도 생전의 기억을 간직하지만..
아무튼 그 기억의 연못을 관장하는 여신이 바로 지금 나간 므네모시네.
제우스와 아홉 밤을 보내고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무사이(Mousai)여신들을 낳은 어머니이기도 하다.
기억의 연못에서 퍼온 물을 마신 카드모스의 기억이 점차 돌아온다.
흐리멍텅하고 혼란스러웠던눈빛이 점차 또렷해지며 대영웅의 풍모를 보인다.
“아.. 하데스 님. 정말로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래, 오랜만이다. 너와 하르모니아의 결혼식 때에는 너무 바빠서 가지 못했지.”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허리를 숙인다.
마치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괜찮습니다. 하데스 님이야 저승의 주인이시니 바쁘실 수밖에 없죠.”
“내가 결혼식에 오지 않아 서운하지는 않았나?”
“하하.. 하데스님께서 오셨다면 더욱 기뻤을 겁니다.”
“훗. 나이를 먹더니 농만 늘었구나.”
내가 카드모스에게 이승에서의 기억을 되찾아준 이유는 간단했다.
티폰 앞에서도 당당하던 대영웅은 자신의 일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다.
“이승에서 살아온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어떤 말씀이십니까..?”
나는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레스의 아들, 이스메니오스를 죽인 벌로 받은 불행의 저주.”
“아…”
“네가 세운 테베 왕가의 비극은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비록 아레스 자신도 후회했지만..”
한번 내린 저주는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되돌릴 수 없다.
아레스가 딸을 카드모스에게 주면서 이전에 카드모스에게 저주를 내린 것을 꽤나 후회했다고 들었다.
무려 인간이 여신과 결혼한 최초의 경우였지만 끝은 좋지 못했다.
불행의 저주가 원인이 된 후손들의 연속된 비극에 카드모스와 그의 아내는 스스로 뱀이 되어 눈을 감았다.
“차라리 뱀이 되었으면..”
“아버지 아레스시여.. 제 남편 혼자서만 두지 마소서. 저도.. 저 또한 뱀으로 바꿔주소서.”
카드모스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모두가 인정할 위업을 연달아 이뤄냈지만 끝내 신들로 인해 불행해진 이 영웅은…
누이를 납치하고, 저주를 내리고, 끝내는 자손들의 불행 때문에 아내와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만든 신들을 원망할까?
“주어진 은혜를 모르는 자는 아닙니다.”
그때와는 다르게?
잠시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레스 님의 저주.. 저는 그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음.”
“오히려 8년간의 짧은 벌과 자신의 딸을 주신 관대함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게 벌을 받을까 봐 고하는 거짓이 아닌 진실.
일생의 끝이 불행하고, 죽음을 겪고 나서도 고결하구나.
“그 덕분에 피할 수 없는 죽음에서도 함께 따라와준 아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르모니아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의 딸이자 조화의 여신.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는 달리 불사성을 지닌 신격이지만 스스로 카드모스를 따라 죽음을 맞이했다.
“자손들의 비극 역시 제 탓일지언대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아내와 함께 테베를 다스리는 것도 나름 즐거웠습니다. 중간에 발견한 티폰의 잔당은 조금 신경쓰였지만..”
“티폰의 잔당? 티폰과 생김새가 비슷했느냐?”
“예. 크기가 훨씬 작았지만, 티폰처럼 하반신은 뱀이고 상반신은 인간의 형태를 띤 매우 강력한 괴물이였습니다. 그 괴물을 죽이는데 상당히 고전했지요.”
하반신이 뱀이고 상반신이 인간.
거기에 이스메니오스도 죽일 정도의 강자인 카드모스가 고전했다는 평가.
내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는다.
티폰의 잔당이 맞을까.. 혹시 내가 아는 다른 괴물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때 이후로 티폰의 잔당은 발견하지 못했기에 굳이 신들께 말씀드리지는 않았.. 하데스 님?”
기가스일 가능성이 있다.
* * *
“그 괴물을 어디에서 발견했지?”
“아.. 테베 근처에서 산책을 하다가 들리는 이상한 소리를 따라가보니 한 동굴로 이어지더군요. 그곳에 놈이 있었습니다.”
카드모스는 그곳에서 사람들을 뜯어먹던 거대한 반인반사 괴물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검을 뽑아 싸웠지만.. 놀랍게도 드라콘을 쓰러뜨린 카드모스조차 제법 고전했다고.
모든 기가스들의 무력이 동등하지는 않다.
카드모스가 마주친 개체는 다행히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구나.
동굴에 숨어있어 올림포스 신들의 눈길이 닿지 않은 것일까.
우리의 할머니인 대지모신 가이아가 전력으로 기가스들의 위치를 숨긴다면.. 데메테르가 모를만도 하겠지.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지만 그녀의 힘은 명백하게 가이아보다 아래.
우리가 티탄 신족을 몰아낼 때와 다르게 선제 공격권은 저쪽에 있다.
어쩌면 신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함정을 파놓은 거라던가,
일부 개체들만의 독단적인 움직임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기가스가 확실한지 우선 기억의 여신의 확인을 거쳐야겠지.
“므네모시네,잠시만 카드모스의 기억을 확인해주십시오.”
“알았어요. 잠시만 눈을 감도록 해라.”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가 카드모스의 머리에 대고 기억을 읽어들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신.
젠장, 기가스가 맞구나.
“그래.. 그렇군. 일단 너는 생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엘리시움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
“아.. 엘리시움.. 감사합니다! 하데스 신이시여!”
“너의 아내도 마찬가지, 그곳에서는 행복하게 지내도록 하여라.”
낙원, 엘리시움 평원에 첫 거주민들이 탄생한 순간이였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영원히 엘리시움에서 편히 지내리라.
오랜만에 만난 카드모스와 즐거운 대화를 나눴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저승의 병사들이 발견하지 못한 기가스가 테베에서 발견되었다니..?
하지만 내가 직접 기가스들을 찾아 돌아다니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
저승의 일을 내팽겨치고 이승을 떠돌아 다닐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역시 자신의 신전을 통해 하계에 간섭하는 아폴론의 사례를 참고해야 할까?
“델포이의 사제여, 나는 저기 먼 곳에서 찾아온..”
“너도 아폴론 신의 신탁을 받으러 온 것인가? 일단 기다려라.”
그러나 온갖 다재다능한 신격에 예언까지 할 줄 아는 아폴론과는 달리 누가 저승을 기껍게 여길까.
실제로 아폴론은 하계에서 널리 숭배받으며 델포이 섬의 신전도 유명하지만..
이승에서 내 신전은 오직 한 군데, 테베에만 있다.
생전의 카드모스가 나와의 인연을 생각해 자신의 국가에 만들어 준 신전.
“올림포스에 연락해 기가스들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전해라, 그리고 모르페우스를 내게 데려오도록.”
“예!”
얼마 뒤, 모르페우스가 영혼병의 말을 듣고 불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데스 님? 저는 무언가 잘못한 것이..”
“네가 취미로 가끔씩 인간들에게 악몽을 꾸게 만드는 것에 대해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일단 그걸 문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니까 넘어가고..
“나를 조금 도와줘야겠다.”
* * *
위대한 대영웅, 카드모스가 세운 국가인 테베.
테베에 단 하나뿐인, 아니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하데스의 신전.
무려 3주신을 모시는 곳이니만큼 비호를 받고 싶은 인간들이 바글바글해야 하지만..
“하아아암~”
이곳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하데스 신전의 사제, 파로나는 심심해 죽겠다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방문객도 없고, 저승의 사제라고 사람들이 꺼려하고,
그나마 하데스의 신관이 되어서 좋은 일은 시비에 절대 걸리지 않는다는 점?
그녀는 결혼 적령기의 처녀인데다 도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미녀지만..
팡크라티온에서 힘깨나 썼다는 왈패들조차 그녀에게는 추파는 고사하고 말조차 붙이지 않았다.
“하아… 심심하다아..”
분명 하데스의 사제를 건드렸다가 저승으로 끌려갈 후환이 두려웠겠지.
하지만 저승의 신의 이름값으로 신전 역시 꺼림칙함의 대상이 되었다.
“낮인데 왜 이리 졸립지….”
테베의 건국왕, 위대한 카드모스 왕의 명령으로 세워진 하데스 신전이지만 너무나도 한적했다.
하나뿐인 사제가 부자연스러운 잠에 빠져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 * *
파로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신전이 아니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찬 공간.
사제로서 고등 교육을 받은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재빠르게 엎드렸다.
“어..어느 신인지는 모르겠사오나 미천한 인간에게 명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잠에 빠졌다 싶었는데 눈을 뜨자 다른 세상.
기억도 명확하고 몸도 잘 움직여지는데 평범한 꿈일리가 없다.
분명히 신이 개입한 것.
하지만 그녀가 모시는 하데스 신은 아닐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주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침묵했기에.
어둠 속 어딘가에서 들리는 낮고 싸늘한 남성의 목소리.
“나는 플루토다.”
….!
플루토, 저승의 주인인 하데스 신의 별칭.
그렇다면 그녀에게 신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심판을 하기 위함일까?
급하게 변명을 하려는 그녀였지만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승에 있는 나의 사제는 오직 너뿐이더구나. 그 신실한 마음에 작은 보답과 과업을 주겠다.”
보답과 과업이라면.. 역시 시키실 일이 있으신 거구나!
“너는 지금부터 내 신전을 부흥시켜라. 그에 도움이 되는 축복을 내리겠다.”
두려움에 움직이지 않는 몸.
다시 암전하는 시야.
난폭하게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지식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