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28)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28화(28/82)
파에톤의 이야기 – (2)
“…약간의 자비를 베풀겠다.”
수천, 어쩌면 수만의 생명을 죽였을 자신에게 자비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죽어서 저승에 온 자들은 절대 지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지, 너와 같은 중죄인이면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파에톤은 온 신경을 집중해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만약 네가 원한다면 헬리오스 신을 저승으로 초대해 마지막으로 만나게 해줄 수 있다.”
이승과 저승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비록 신들은 오고 감에 자유롭다지만 이승에 큰 피해를 끼친 중죄인인 파에톤이 만나기란 불가능.
형벌을 덜어주는 자비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올림포스에 전령을 보내 알아보니 헬리오스 신은 너를 잃은 슬픔에 칩거중이라군. 하지만 너를 만날 수 있다면 저승으로 달려올 것이다.”
“감사… 합니다.”
파에톤의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뵐 수 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이는 마냥 네 사정을 봐준 것이 아니다. 헬리오스 신이 오래도록 슬픔에 빠져 태양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세계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는 하데스 신이였지만 파에톤은 알고 있었다.
태양이 움직이지 않아 밤만이 계속되어 죽는 자가 늘어난다면 하데스의 권세는 더욱 강해진다.
이승의 생명들이 더욱 죽어나갈수록 저승의 주인에게는 이득.
이는 분명 자비가 맞았다.
* * *
헬리오스의 태양 궁전.
자신의 아들이 죽어 실의에 빠진 태양신, 헬리오스는 궁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었다.
궁전의 주인이 태양 마차를 몰지 않자 이승은 계속해서 어둠만이 이어지는 상황.
“어째서 오늘도 해가 뜨지 않는 걸까…”
“헬리오스 신이시여! 제발 자비를 베풀어 빛을 주소서!”
“제우스 님…”
“하아.. 이대로면 농작물이 모두 죽어버릴거야…”
이승은 온갖 생명들의 애원으로 가득찼다.
결국 제우스가 그를 직접 찾아왔다.
궁전 밖에서 목을 가다듬던 제우스가 헬리오스를 불렀다.
“헬리오스! 안에 있는가?”
그러나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묵묵부답.
“내가 자네 아들에게 벼락을 던진 것은 미안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네.”
헬리오스 신이 듣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우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태양 마차를 몰지 않아 세상이 엉망이야, 자식을 잃은 슬픔은 알겠으나 다시 의무를 다해줄 수 없겠나?”
그러나 여전히 궁전의 주인은 침묵을 지키고만 있을 뿐.
벼락을 던진 장본인인 제우스가 그리 말해봤자 헬리오스의 심경이 변하지는 않는다.
“후…”
제우스는 잠시 궁전의 문을 박차고 들어갈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의 경솔한 행동이 헬리오스의 칩거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버님!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헤르메스, 무슨 일이냐.”
태양신의 파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제우스에게 다가온 것은 전령신이였다.
헤르메스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데스 큰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파에톤을 만나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이걸 헬리오스께 잘 말씀드리면…”
“뭣이? 형님께서 이미 죽은 영혼을 만나게…?”
제우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양 궁전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한 남신(男神)이 뛰쳐나왔다.
마치 빛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금발머리와 황금 의복, 태양의 열기가 타오르는 눈동자를 가진 신.
위대한 태양신, 헬리오스(Helios)가 헤르메스의 말을 듣고 나온 것이다.
무척 다급해 보이는 그는 전령신의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헤르메스! 그게 정말인가?! 하데스가 죽은 내 아들을 만나게 해준다고!”
* * *
저승에 환한 빛이 들어온다.
하지만 파에톤이 몰던 태양 마차의 폭주와는 다르다.
지금 이 빛은 단 한 사람, 아니 한 남신에게서 나오고 있었으니까.
“하데스! 내, 내 아들을 만나게 해주게!”
올림포스에 전령을 보낸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저승에 찾아온 헬리오스 신.
그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몸에서는 태양의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다.
나도 은근히 열기를 느낄만한 기운에 망자들은 이미 멀찍이 물러난 상태.
“파에톤은 저기 있습니..”
“파에톤..!”
헬리오스 신이 다급하게 한쪽 구석에 있는 파에톤에게 달려간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만났다.
“흡.. 아버지… 크윽.. 제가..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다, 다 내 잘못이다. 네가 태어나자마자 올림포스로 데려왔었어야 했는데…”
“제 무모한 행동으로 지상이.. 아버님의 태양 마차 역시도…,”
“됐다. 그만 말하거라. 마지막으로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 어긋나버린 아버지와 아들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잘못했다. 네 어머니에게도… 나를 용서해다오…”
“아닙니다. 아버지..”
하지만 그 둘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저승과 이승, 죽은 자와 산 자는 엄격하게 분리되어야 하는 법.
만약 그들이 불쌍하다고 파에톤을 살려준다면 헬리오스 신은 자기 자식에게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먹이기 시작할 테고..
다른 모든 신들도 헬리오스의 사례처럼 아끼는 인간을 살려달라고 내게 애원할 것이다.
“이제 슬슬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지요.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아…”
그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 * *
“흐윽…”
자리를 비켜주는데 어딘가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성채의 외곽에서 들리는 것,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훌쩍..”
성벽에 기댄 아름다운 여신의 눈에서 슬픔이 흘러나온다.
스틱스.. 여신님?
입을 막고 조용히 우는 스틱스 여신의 얼굴은 물기가 가득했고 손은 흐르는 액체를 닦느라 바빴다.
그녀가 내 기척을 느낀 듯 급하게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 하데스..! 자.. 잠시만요, 여기 바라보지 마세요..!”
“헬리오스의 맹세 때문입니까?”
스틱스 여신이 입을 다물었다.
스틱스 강의 맹세는 신들조차도 절대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약속.
티탄 신족과의 전쟁에 제일 먼저 달려와 힘을 보태준 여신에 대한 보답.
하지만 스틱스 강의 맹세로 일어나는 비극을 볼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그냥…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해요. 스틱스 강의 맹세가 없었다면..”
나는 그녀의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인 세멜레와 제우스의 사건도,
이번에 일어난 파에톤의 사건도,
전부 절대적인 스틱스 강의 맹세를 어길 수 없었던 신들이 저지른 일.
“이런 비극들은 여신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때 제 강을 맹세의 증거로 쓰이게 해준다는 제우스의 제안만 거절했어도..”
우리 신들은 불로불사이며, 필멸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당장 내 앞에서 울고 있는 스틱스 여신만 하더라도 저주를 내려 가볍게 도시 하나를 망가뜨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오만하고, 자만한다.
맹세를 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줘야 하는 스틱스 강은 우리에게 주어진 족쇄.
신들의 왕인 제우스마저도 무조건 지켜야 하는 맹세.
하지만 여신의 이름을 건 맹세는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지금부터 그 사실을 스틱스 여신에게 말해줄 생각.
“스틱스 강의 맹세는 항상 비극만을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같은 일이 이례적인 경우죠.”
“예…?”
“요새 너무 바쁘셔서 이승을 살피지 못하신 모양이지만.. 신도들의 기도, 제대로 한번 다시 들어보시겠습니까?”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이승.
내 신전 안에 놓인 스틱스 여신의 신상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왜 여기로 부른 거야?”
“그야..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할게, 나와 혼인해 줘.”
“아…!”
스틱스 여신의 신상 앞에서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
“스틱스 강에 맹세코! 나는 양을 훔치지 않았소! 이제 저 놈의 차례요!”
“나.. 나는…”
“너도 꿀리는 게 없다면 나처럼 맹세하라고!”
“그게 사실은.. 요새 형편이 어려워서…”
스틱스 강의 맹세로 도둑질을 한 범인을 밝혀내는 사람들.
“스틱스 여신님의 신상 앞에서 맹세합니다. 영감이 타나토스 님의 부름을 받아도…”
“어허! 무슨 그런 맹세까지… 으음.. 그럼 저 또한 맹세합니다. 만약 할멈이 먼저…”
한쪽이 먼저 죽어도 남은 한쪽을 가슴에 품으며 살아가겠다는 늙은 노부부의 맹세.
“진실을 밝히고, 사랑을 맹세하며, 언약을 나누는 인간들입니다.”
“아…”
“만약 여신님의 이름에 무게가 없었다면 저런 광경들도 볼 수 없었겠지요.”
인간들이 스틱스 강의 맹세를 어기면 죽고 나서 타르타로스로 빨려들어간다.
그 두려움에 항상 조심하는 인간들이였으나 때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인간들이.. 의외로 맹세를 자주 하는군요..”
“저도 놀랐습니다. 아마 여신님의 신상이 세워진 까닭이 아닐까요?”
자신의 이름을 건 맹세가 불행만을 불러온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스틱스 여신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까에 비해 개운해보이는 얼굴을 한 그녀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조금은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눈물자국을 말끔히 지워낸 흑발의 여신이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죄책감에 빠진 마음이 약간은 편해진 것일까?
“고마워요. 하데스.. 항상 퀴네에로 장난만 치는 줄 알았는데…”
“네…? 무기의 강도 테스트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풋.. 푸흐흐…”
나는 스틱스 강에 맹세코 퀴네에로 장난을 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래도 지금 웃고 있는 여신의 아름다운 미소를 계속 보고 싶어서 침묵했다.
잠시 동안 입가를 가리며 행복하게 미소짓던 스틱스 여신이 가까이 다가온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가와 요염하게 지어보이는 눈웃음.
“오늘 제가 이러고 있었던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이쪽으로 가까이 붙은 여신의 한쪽 손바닥이 내 가슴에 얹혔고, 오른손의 검지는 입술에 닿았다.
가슴팍도, 입술도 부드러워서 무언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홀린 듯이 대답했다.
“….스틱스 강에 맹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