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29)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29화(29/82)
죽은 자들의 이야기
영혼들의 종착지이자 안식처인 저승.
이곳에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먼저 저승의 왕인 하데스를 비롯해죽음의 신 타나토스나 망각의 여신 레테,
절대적인 맹세의 주인인 스틱스 여신, 잠의 신 휘프노스나 꿈을 다스리는 모르페우스…
그러나 저승에는 오직 그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였다.
예를 들자면…
“뱃삯.”
“으흑.. 네…?”
어둠의 신, 에레보스와 밤의 신 닉스의 아들인 높은 신격이면서…
“없나? 없으면 태워줄 수 없어.”
“어으..에? 입 안에 뭔가가…”
“거기 있구만 입 벌리라고, 내가 알아서 가져갈 테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배를 저어야 하는 중노동에 시달리는…
아케론 강의 뱃사공, 카론(Charon)이 있겠다.
“그래, 1오볼로스(6분의 1드라크마)가 맞군. 그런데 또 동전 한 푼이라니, 쯧.”
흰 백발, 잔뜩 피곤한 얼굴, 늙은 선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신.
매일 하데스나 타나토스에 버금가는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뱃사공 카론이야말로 저승의 참된 일꾼이 아닐까?
* * *
이승에서 사람이 죽으면 먼저 타나토스의 분신을 만나 영혼이 저승의 입구로 끌려오고…
그 다음으로는 저승에 흐르는 첫번째 강인 아케론 강을 만나게 된다.
넓고 고요한 강가에서 기다리다 보면 배를 젓고 있는 노인이 영혼들을 부른다.
“내가 죽었다니… 으으.. 그.. 그런데 저 자들은 무엇인가요?”
“알면서 뭘 물어보나? 뱃삯을 안 주면 강을 건너게 해줄 수 없지.”
아케론 강의 뱃사공, 카론.
그는 망자들에게 동전 한 푼(1오볼로스)을 받지 않는다면 절대로 강을 건너게 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늘 아케론 강가에는 떠돌아다니며 슬피 우는 영혼들이 수두룩했다.
카론의 일화는 이승에도 퍼져있다.
그래서 죽은 자를 장사지낼 때, 보통 가족이 입에 동전을 물려준다.
하지만 외지에서 객사하고 짐승에게 뜯어먹힌 여행자들.
전쟁터에서 죽고 시신을 찾지 못해 장례를 치르지 못한 영혼들.
신벌을 받아 시신이 흔적조차 남지 않은 이들.
그런 영혼들은 죽어서도 편할 수 없었다.
이승에서 죽은 자들은 매일같이 아케론 강에 몰려들기 때문에 카론은 엄청난 부자가 아닐까 하지만…
휘익- 퐁당.
뱃사공 카론이 정작 소유할 수 있는 돈은 두 번째 동전부터고 처음 받은 돈은 무조건 아케론 강에 던져야만 한다.
이것이 아케론 강의 법칙, 그렇기 때문에 카론은 늘 가난하다.
“하아.. 죽어라 일하는데 호주머니는 항상 비어있군.”
잠시 하데스의 전생으로 넘어가보자면…
이것이 바로 열정페이, 거의 무급 노예가 아닌가?
“다 왔다. 내려라 이놈들아.”
“흐윽.. 흑.. 네에…”
“어머니… 죄송합니다.”
“젠장.. 그놈이 찌른 칼을 피했어야 했는데…”
영혼들이 카론의 배에 올라탄 것이 얼마 지나기도 전에 배는 이미 건너편에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카론은 영혼들을 내려주고 노를 몇 번 저어 다시 멀어져 간다.
아케론 강을 건너면 그 다음은 시름의 강, 코퀴토스(Cocytus).
“으으…”
“어머니.. 으아아!”
“너무 차가워…”
이 강은 영혼들의 과거 모습이 비치기 때문에 시름에 젖게 된다.
이승에서의 후회되는 기억들, 사랑을 나누던 순간, 기억하고픈 추억.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죽음을 맞이한 지금의 상황이 영혼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우울한 기색으로 시름의 강을 넘어간 망자들이 마주한 것은..
불꽃의 강, 퓨리플레게톤(Pyriphlegethon).
“아니 무슨.. 강이 불타고 있어?”
“사방이 불길로…”
“그런데 뜨겁지는 않는데?”
이승에서의 불은 뜨겁다.
영혼들은 그 기억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말로 뜨겁지 않잖아?”
“그러게, 이미 죽어서 그런가.”
영혼들의 몸에 불이 붙지만 뜨거운 느낌은 없다.
오히려 묵은 때를 밀듯이 개운한 감각이 그들을 휘감자 영혼들은 다시금 강을 건너간다.
이렇게불꽃의 강, 퓨리플레게톤에서 이승의 더러움이 정화된 그들은 망각의 강을 마주한다.
망각의 강, 레테(Lethe).
“저쪽으로 가…”
아름다운 은발을 뽐내는 레테 여신이 종종 강변에 나타나 영혼들에게 방향을 알려준다.
손가락으로 강 너머를 가리키는 여신의 손길을 따라 망자들이 강에 뛰어든다.
“얼마나 더 가.. 아.. 어…”
“이 강은 이승과 별 다를… 에…”
영혼들은 질식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입에 들어오는 망각의 물은 이승의 기억을 사라지게 만든다.
간혹 원한이 너무 강한 영혼들은 이승의 기억을 잊지 않지만 평범한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
본능에 따라 앞으로 가던 망자들은 드디어 저승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강에 도달했다.
증오의 강 스틱스(Styx). 저승을 9바퀴 휘감는 길고 넓은 강이다.
가끔은 스틱스 여신이 망자를 인도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여신의 권속이 영혼들을 재촉한다.
강을 건너서 조금 걸어가자 곧 망자들의 눈에 하데스의 성채가 들어온다.
* * *
“히익…”
“어..어..! 저기…”
저승 전체에 펼쳐진 하데스의 성채,
멀리서도 보이는 칠흑 같은 성의 웅장함이 망자들을 위압한다.
스틱스 강에서부터 성채까지 이어진 넓은 대로를 걸어가다 보면,
저승의 성채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이 나타난다.
그리고 문 앞에는 머리가 셋 달린 괴물인 케르베로스(Cerberus)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크르르…”
“아그르르…”
날카로운 송곳니에서 떨어지는 거품 가득한 침은 독을 품고 있었다.
폭풍의 신, 티폰을 아버지로 두고 하데스의 힘을 받은 신수(神獸)의 위엄은 영혼들을 겁에 질리게 만든다.
그러나 다가오는 영혼들을 본 케르베로스는 그들에게 관심 없다는 듯이 길을 비켰다.
하데스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저승의 신수는 오직 문을 나가는 영혼만을 뜯어먹을 뿐.
망자들이 조심스럽게 케르베로스가 지키는 거대한 문을 통과하자,
저승의 관리들이 나타나 어디론가 그들을 인도했다.
“이쪽으로 와라 인간들아, 아직 재판을 받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그리고 대부분은 저승에서 생활하게 될 텐데 너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망각의 강을 건너느라 이승의 기억이 사라졌겠지? 신들에 대해 다시 알려주겠다.”
한쪽 건물이나 광장 비스무레한 공간으로 이동한 영혼들이 설명을 듣는다.
이승의 기억을 잊어버린 영혼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고,
죽은 자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심판…?”
“이승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였을까?”
“불안한데…”
정신없이 새 지식을 받아들이던 망자들에게 관리가 다가온다.
“이제 너희 차례다. 거기 너부터 여기까지 전부 날 따라오도록.”
주섬주섬 일어나 차례대로 관리를 따라가는 망자들.
그들은 지금부터 하데스가 판결을 내리는 장소로 이동한다.
대략 수백의 영혼들이 사방이 탁 트인 넓은 공간에 모이자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흑발흑안의 남신.
매우 피곤한 얼굴을 하고 양피지를 손에 들고 있는 그자는 저승의 군주, 하데스였다.
그자는 단상에 잔뜩 놓인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면서 관리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저승신이 귀찮다는 듯 손을 이리저리 내젓자권능이 발현되며 검은 바람이 좌중을 휩쓴다.
몸을 스치듯이 지나가는 검은 바람에 의해 비틀거리는 영혼들에게 무감정한 목소리가 들어온다.
“타르타로스나 엘리시움에 갈 영혼은 없군, 그럼 다음으로…”
“너희들은 이쪽으로 움직여라.”
“지금부터 심판관들께 이동할 것이다.”
중죄인이나 영웅, 특별한 이를 걸러내는 하데스의 간단한 판별이 끝나고 나면 저승의 심판관인 미노스 3형제에게 재판을 받는다.
영혼이 이승에서 저지른 죄의 경중을 미노스 3형제가 낱낱히 살피며 그에 맞는 벌을 내린다.
때로는 절차를 바꿔 미노스 3형제가 먼저 영혼들을 심판하다가 판결을 내리기 힘든 자를 하데스에게 보내기도 한다.
“너는 이승에서 이웃 셋을 죽이고 재물을 훔치는 범죄를…”
“그럼 저승 외곽에서 노역형과 성채를 보수하는 벌을 내리자고.”
“다음 영혼은 저 노인인가?”
미노스(Minos).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생전에는 크레타 섬의 왕이였으나,
죽은 뒤에는 자신의 두 형제와 함께 저승의 심판관을 맡게 되었다.
그들의 판결은 공정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기에 하데스 역시 미노스 3형제들을 믿고 영혼들의 심판을 맡겼다.
큰 죄를 지은 이들이 저승에서 벌을 다 받거나,
삼형제의 판결에서 죄가 적거나 거의 없다고 판명난 이들은 하데스의 성채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
이승과 지하 세계의 풍경은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다.
다만 죽은 영혼들이 모두 반투명하며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
이곳에도 법과 질서, 직업과 규율이 존재했다.
이승만큼 넓은 저승의 공간에서 아직 환생을 하지 않은 영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나도 환생을 하게 될까?”
“난 계속 이곳에 남으려고, 저승의 관리가 되어야겠어.”
“오늘도 레테 여신님은 정말 아름다우신 것 같네…”
“입 조심해, 저승의 안주인이시잖아.”
“그건 스틱스 여신님 아니셨나?”
죄를 씻어낸 영혼들은 먼저 저승에 온 순서대로 환생을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만약 이 과정에서 망자가 환생을 거부하고 저승에 있기를 원한다면 상황을 고려해 남는 것도 허락된다.
그렇게 저승에 남는다면 보통 관리들이나 하급신들에게 직업을 배정받는다.
저승을 순찰하는 경비병, 하데스나 휘프노스 등 신들의 시종이나 시녀.
혹은 너무나도 넓은 성채를 보수하거나 영혼들이 거주할 집이나 공간을 짓는 역할 등.
“여기 먼지가 많이 쌓인 것 같은데.. 조금 청소를 해야겠어.”
“성채에 구멍이 생겼잖아? 이런 건 빨리 보수해야지.”
“하데스 님의 시녀가 환생했다는데요?”
“그래? 곧 다시 모집하겠네. 나도 지원해볼까?”
또한 어두침침한 지하 세계에 적응한 저승의 영혼들은 불빛이 없어도 앞을 볼 수 있었다.
곳곳에 놓인 헤스티아의 화로가 망자들에게 안도감과 따듯한 기운을 불어 넣어주지만 불빛 자체는 큰 필요가 없는 법.
덕분에 그들은 낮보다는 밤이, 빛보다는 어둠이 익숙하다.
여기까지가 영혼들이 살아가는 저승의 일상.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거대한 시스템의 한 축이였다.
그런데 만약 이런 순환이 깨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재앙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