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39)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39화(39/82)
불길한 징조 – (1)
오늘도 평화롭지 않은 저승.
당분간 지하 세계의 일을 도와주기로 한 아프로디테 여신은 오늘도 고생하고 있었다.
망각의 강, 레테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인간들은 이승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상태,
따라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이였다.
“으아악! 나는 아직 안 죽었다고!”
“제발 어머니를 한번만 뵙게 해주시오, 잠시만 뵙고 내 발로 걸어들어올 테니!”
“젠장, 이거 좀 풀어줘!”
현실을 부정하는 이들, 이승에 미련을 가진 이들, 자신을 죽인 원수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이들에..
동전 한 푼이 없어 아케론 강을 떠도는 망자들까지.
슬슬 여신의 품위고 뭐고 말하기도 지쳐 눈빛만으로 영혼들을 매혹하기도 잠시,
강 건너편에 영혼들을 데려다주고 돌아온 카론이 하데스의 전언을 전해줬다.
“하데스가 무려 하루 내내 저승에서 연회를 열겠다는군.”
“하루… 하루요?!”
“흠. 나도 꽤 놀랐네. 아무래도 저번 타나토스의 일이 마음에 걸렸나…”
분명 같은 소식이였지만 반응은 서로 달랐다.
아케론 강의 뱃사공은 무려 하루 동안이나 일을 쉴 수 있겠다고 좋아하는 반면,
미와 사랑의 여신은 그것밖에 쉬지 않냐고 경악했다.
그도 그럴것이, 올림포스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이 무슨 일을 했겠는가.
사랑이란 감정은 자연스레 생기는 것, 미라는 것 역시 그녀가 개입할 부분은 없었다.
그리고 올림포스에는 그녀와 같이 여유로운 신들이 한가득.
연회도 자주 열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올림포스에서 편하게 지냈으니 일이 조금 익숙지 않겠구만.”
“…왜 대홍수 이후로 저승 이야기만 나오면 아테나가 자리를 피하는지 알 것 같은데요.”
그런 온실 속 화초가 갑작스러운 업무 지옥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런 반응 역시 당연한 것이다.
* * *
“저는.. 저는 억울합니다.. 제우스 님이 저를 강제로.. 흐윽.. 왜 헤라 님은 저에게만.”
“…그래. 일단 조금만 쉬고 다시 이야기하지.”
제우스에게 강간당하고 헤라에게 보복당해 죽어 저승으로 온 인간 영혼.
슬피 우는 그녀의 뒤로 레테 여신이 조용히 다가가 이승의 기억을 잊혀지게 만든다.
저승에서 판결을 내리다 보면 이승의 기억을 유지한 채로 오는 이들이 종종 보인다.
깊은 원한을 가지고 죽으면 망각의 강이 효과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무슨 이승에 이리도 강간 피해자가 많을까..”
신들은 제멋대로다.
하반신으로 생각하는 제우스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다.
지위가 높은 신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하지만, 하급신이라도 인간을 강간하는 자들이 많다.
당장 오늘 하루동안저승에 당도한강간 피해자만 3명.
모두가 이승의 기억을 가지고 온 채 내게 애원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니 방금 영혼의 기억을 지운 레테 여신이 슬며시 다가온다.
“그래도 하데스는 안 그러잖아요. 인기도 많으면서…”
그야 당연하지, 이래봐도 나는 3주신이다.
나와 결혼하면 저승의 안주인이 되어 엄청난 권력과 힘을 얻을 수 있다.
솔직히 얼굴이 조금 우울하게 생기긴 했지만 이 정도면 잘생긴 편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불륜 때문에 정실부인인 암피트리테가 매일 화를 내는 포세이돈이나,
보이는 여자 대부분과 관계를 맺는 제우스 정도는 아니더라도 내게 은근히 마음을 표현하는 여신들도 꽤 있다.
하지만…
“후우… 매번 저런 영혼들만 보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저승에는 온갖 강간, 불륜, 치정극에 의한 살인 피해자가 오게 된다.
여신의 저주나 질투 때문에 죽은 자들을 보다 보면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도 사라진다…
그리고 저승의 안주인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법.
제우스의 아내이자 신들의 여왕 헤라처럼 강간 피해자를 죽인다던지,
포세이돈의 정실인 암피트리테처럼 분노하면 바다를 아예 뒤집어 버리는 건 조금..
마침 시종 하나가 다가와 연회가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일단 연회 준비가 슬슬 된 것 같으니 저희도 연회장으로 가시죠.”
“치이… 네.”
오랜만에 쉬는 날이 생겼으니 다들 좋아하겠지.
내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레테 여신과 집무실을 나와 연회장으로 향했다.
오늘 연회를 여는 김에 저승의 백성들에게도 디오니소스가 만든 포도주를 나눠주라고 일렀다.
아무리 먹고 마시는 일이 필요가 없는 영혼들이지만 그래도 축제 기분은 낼 수 있으려나.
“무사이(Mousai)여신은 도착했나?”
“예! 여신들께서는 이미 오셔서 연회장에 계십니다.”
학예를 관장하는 아홉 무사이 여신들은 므네모쉬네와 제우스의 딸들.
내가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은 므네모쉬네 여신이 직접 올림포스에 연락해 딸들을 불렀다.
삐리리~
연회장에 들어서자 울리는 음악 소리.
에우테르페(Euterpe)여신이 피리를 불고,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가 그에 맞춰 춤을 춘다.
다른 무사이 여신들 역시 자신의 분야에 맞게 연회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연회장을 둘러보자 모두들 오랜만의 휴식에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세상에…”
“얼마나 힘드셨으면…”
연회장 뒤편 한쪽 구석에 무언가가 있나.. 신들이 수근거리고 있네.
슬쩍 가까이 가보자 한 노신(老神)이 드러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크으.. 커어…”
휘프노스 신이 왜 연회장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지, 그렇게 피곤했나.
그래도 쉬라고 연회를 열었으니 건드리지 말아야지.
시종을 시켜 잠든 휘프노스 신을 조용한 방으로 옮기고 다시 돌아왔다.
“또 질병으로 죽었나? 나약한 필멸자들 같으니 쯧쯧쯧… 중얼중얼..”
또 다른 쪽 구석에서는 넥타르를 홀짝이는 타나토스의 몸 주위로 죽음의 신력이 일렁거렸다.
그는 연회가 열린 이 순간에도 분신을 조종해 영혼들을 수확해야 하기 때문에 쉬지 못하고 있었다.
“하데스 님!”
누군가 나를 부른다.
어디서 들은 목소리인데, 아!
“어머~! 하데스 님! 이게 얼마만이에요!”
“에라토(Erato). 오랜만이네.”
긴 청은발 머리에 튜닉이 잘 어울리는 여신이 내게 눈웃음을 치며 다가온다.
아홉 무사이 여신 중 하나, 연애시와 독창을 담당하는 에라토 여신이네.
“항상 저승에서 고생하시는데 제가 바빠서 찾아뵙지도 못하고…”
에라토 여신이 다가와 내 팔에 팔짱을 낀다.
너무 붙지 말아라 조카야..
애교부리는 모습은 귀엽기는 하지만 거리감이 너무 가깝지 않니?
“하데스니임~ 오랜만에 하데스 님을 뵈니 영감이 마구마구 떠오르는데요~”
“…?!”
어쩐지 시선이 몰리는 것 같은데, 슬슬 여기까지만..
내 속마음과는 다르게 에라토가 목을 가다듬더니 시를 읊는다.
연애시와 독창(獨創)을 담당하는 예술의 여신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퍼진다.
* * *
인간들은 말하죠~
태양과도 같은 미소를 지닌 포이보스, 바다와도 같은 가슴팍의 포세이돈.
매혹적인 자태의 디오니소스, 유쾌한 말재간의 헤르메스라고.
잠시 시를 멈추고 넥타르를 한 모금 마신 에라토가내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다시 이어나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어요~
모두가 두려워하는 저승의 플루토야말로..
“허억… 죄..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응…?!”
갑자기 내 뒤편을 바라보고 말을 멈춘 에라토.
그녀가 매우 당황한 듯이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쳤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미소를 띤 스틱스 여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은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 보이네.
“하데스.. 또 어디서 이상한 여신과…”
“네?”
“후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웬일로 연회를 여는 거죠? 하루만 업무를 거르면 얼마나 큰 피해가 생기는지..”
예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모두에게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아서..”
“하지만 이러다가 저번처럼 또 일이 밀리면 어떡해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길 보시면..”
우리는 고개를 돌려 음험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중얼대며 분신을 조종하는 타나토스를 보았다.
저승에서 제일 바쁜 신은 여전히 영혼들을 수확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음이 이쪽이였나, 어이쿠.. 일가족이 전부 아사(餓死)했구만..”
넥타르 잔에 검은 날개가 부딪혀 적셔지는 것은 둘째치고,
실시간으로 영혼을 수확하는 그 두려운 모습에 죽음의 곁에는 어떠한 신도 존재하지 않았다.
“타나토스 신이 지금도 열심히 일해주고 있고, 미노스 3형제도 돌아가면서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제 돌아가도 되겠죠? 하데스?!”
잔뜩 화난 얼굴을 한 아프로디테 여신이 대화 중에 끼어들었다.
얼마 전과 비교하면 더욱 퇴폐적인 외모로 변화한 미의 여신.
이 정도면 충분히 그녀를 부려먹긴 했다.
한동안 저승의 업무가 줄어드는 게 체감이 될 정도였으니까.
“그동안 수고했다. 혹시 또 저승에 오고 싶어지면..”
“저.. 정말로요?! 저 진짜로 가도 되죠?”
동의하기 무섭게 자리를 뜨는 아프로디테.
그녀를 바라본 스틱스 여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고작 아케론 강에서 조금 일했다고 저러다니.”
올림포스에서 편하게 놀고먹기만 한 여신이라서 그런가 재빠르게 저승을 탈출하는…
…?! 누군가 내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테베에 있는 신도, 아니 사제인가?
그러나 이 간절함과 애원, 공포가 실린 간청은…!
“주 하데스시여! 제발 도와주소서! 뱀과 인간이 합쳐진 괴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