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42)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42화(42/82)
불길한 징조 – (4)
“이따위… 몸만 아니였다면…!”
눈에서 빛을 잃어버리고 쓰러진 크로노스, 이제는 에키드나를 보았다.
아름다운 여인과 뱀이 섞인 티폰의 아내는 가슴팍에 구멍이 난 채로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이아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까?
아니다. 설령 버림패로 쓰이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남편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겠네.
“후우…”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빙의한 인간의 몸이 많이 망가진 것이 느껴졌다.
크로노스를 상대하느라 신력을 너무 많이 끌어다 썼어.
인간의 몸으로는 내 힘을 전부 감당하기가 무리라 최대한 조절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는 태양의 광휘에 온 몸이 불타버린 기가스, 엥켈라도스가 널부러져 있었다.
괴물의 시체를 바라보는 아폴론의 몸 이곳저곳에서 황금빛 이코르가 조금씩 흘러나와 땅으로 떨어졌다.
“아폴론, 내가 떠나면 이 인간의 몸을 조금 봐주도록. 나 때문에 수명이 제법 깎여나갔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큰아버지. 제가 또 의술의 신 아닙니까. 그 정도야 문제없죠.”
그가 태양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흔쾌히 대답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리 늦지 않게 도착했구나. 구름 위에서 테베를 주시하고 있었던 거냐?”
“예, 올림포스에 스틱스 님의 전령이 오자 아버지가 곧바로 저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렇게 테베 근처로 날아가 둘러보던 중 이질적인 힘이 동굴에서…”
크로노스가 힘을 방출하던 그때를 말하는 거군.
자기 딴에는 에키드나의 몸에 적응하기 위해서 힘을 끌어올렸겠지만…
오히려 아폴론이 적과 아군의 위치를 판별하는 데에 이득이 되었다.
내가 이승에 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폴론을 파견한 제우스는 지금쯤 회의중이려나?
“아, 크로노스가 현현한 사실은 제가 권속을 시켜 올림포스에 알렸습니다. 설마하니 타르타로스에 갇힌 신격을 이승에 강림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프로토게노이 신들은 정말로 대단하군요.”
가이아는 세계가 만들어질 당시에 혼돈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신, 프로토게노이(Protogenoi) 중 하나.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으니 이런 일도 가능한 것.
그러나 무려 세계의 패권을 한번이나마 쥐어본 크로노스를 현현시키다니.
이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심각한 사태다.
“그리고 아테네 인근에서도 기가스가 나타나 아테나와 아레스가 내려갔습니다.”
“아테네에서도? 가이아가 선전포고를 아주 화려하게 하는군.”
대지모신이 직접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니까…
자신의 권속을 움직이거나 기가스 등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이만 저승으로 돌아가겠다. 뒤처리는 너를 믿으마.”
“그럼 제가 테베의 인간들을 잘 다독이겠습니다.”
기가스도 정리되었고… 근처에서 괴물의 기운도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예술, 궁술, 예언 등 엄청나게 다재다능한 신격을 지닌 아폴론이라면 뒷수습을 잘 하겠지.
* * *
의식을 다시 저승의 옥좌로 되돌리자 눈앞에는 휘프노스 신이 보인다.
그는 늘 보여주던 졸린 눈이 아닌, 잔뜩 날카로운 기색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휘프노스가 다급하게 입을 연다.
“기가스는 처리되었나? 아니면 설마…”
“크로노스 신이 강림했지만 격퇴했습니다.”
“뭐라고?! 이승에 크로노스가?”
“일단 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주시죠. 전할 말이 있습니다.”
휘프노스가 연기처럼 알현실을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지하 세계에 속한 대부분의 신들이 이곳으로 모였다.
기가스와의 일전을 각오한 듯 갑주를 챙겨입고 창을 든 신도 있고…
성채 바깥에서 느껴지는 이 영혼들의 기척은… 영혼병들을 대기시켜 놓은 건가?
“일단 저승의 군세는 필요 없습니다. 기가스의 침공은 일단 물리쳤으니까요.”
“전면전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았네요…”
스틱스 여신이 다행이라는 듯, 바깥의 병력을 물리라고 전한다.
다른 신들도 일단은 안심하는 눈치.
“다만 타르타로스에 갇혀 있어야 할 크로노스가 이승에 강림했습니다.”
“가이아의 수작인가?!”
“그곳에 갇힌 자의 의식을 빼내어 올 수 있다니…”
“필시 큰 희생이나 제물이 있었겠지요. 그렇지 않았습니까?”
크로노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웅성대는 수많은 신들.
그들에게 사제의 몸에 강림해 보고 들은 것을 전해주었다.
티폰의 아내 에키드나, 기가스의 지휘 개체, 아폴론과 크로노스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신들 사이에서 침묵이 감돈다.
“…그래서 일단 저승도 대비를 좀 하려고 합니다. 모르페우스!”
“예. 하데스님.”
“타르타로스의 상황을 확인하고 그 근처에 경비를 추가로 배치해라. 그리고 크로노스가 이승에 나왔다는 사실을 헤카톤케이레스 형제들에게 전해라.”
그다음으로 검은 날개를 펄럭이는 노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타나토스. 만약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망자들이 있다면 바로 알려줄 수 있습니까?”
“아마 제물로 바쳐지거나 기가스에게 희생당할 인간을 말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힘드네.”
“그럼 재해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많은 수의 인간이 죽어나갈 때만 말해주시죠.”
“그 정도는 가능하지.”
이번에 일어난 크로노스의 강림은 수많은 인간을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
죽음 그 자체인 타나토스가 인간들의 의문사가 많은 장소만 알려줘도 빠르게 대응이 가능하다.
“제가 이승에 강림하는 동안, 올림포스에서 따로 전해온 소식은 없습니까?”
“있어요. 하데스.. 이리스가 저승에 방문했거든요.”
레테 여신이 이리스가 전해준 소식을 말한다.
먼저 아테네 인근에 자신을포르피리온(Porphyrion) 이라고 말하는기가스가 나타나 헤라를 겁탈하겠다고 날뛰어…
“신들의 여왕을 겁탈하려 해?”
“정신나간 놈들이 한둘이 아니군.”
“저번에 알로이다이니 뭐니 하는 놈들도 그랬지 않았나?!”
“그만, 일단 레테 여신님의 말을 끝까지 듣겠습니다.”
…분노한 제우스가 아테나와 아레스를 보내 놈의 사지를 찢어발겼다고 한다.
죽은 포르피리온의 영혼은 저승으로 끌려와 내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놈은 타르타로스로 보내겠습니다. 그럼 계속 얘기해주시죠.”
“어.. 그리고 제우스가 올림포스에서 회의를 열었는데요.”
영원히 타르타로스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던 크로노스가 다시 나왔다는 소식은,
모든 올림포스 신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제일 큰 문제는 가이아가 기가스를 보내는 걸 빠르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
대지모신 가이아의 권능이 데메테르보다 훨씬 윗줄에 있다는 것이다.
신들의 회의에서 그 해답으로 나온 방안은…
“옴팔로스를 잠시 데메테르에게 맡기기로 했대요.”
“데메테르의 힘으로 기가스의 본거지를 찾아내려는 생각이구먼.”
“하긴 옴팔로스는 신의 권능을 증폭시키니까…”
“그런데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그 물건을 꼭 써야 하나?”
“그렇게까지 해야 할지도 몰라요. 가이아는 대지모신 그 자체라 데메테르의 힘으로는…”
크로노스가 제우스 대신 삼켰다가 토해낸 바윗덩어리,옴팔로스(omphalos).
세상의 중심에 있는 그 보물을 데메테르가 잠시 맡아둔다면 가이아의 권능과도 어느 정도 맞설 만하다.
즉, 그 말은…
“데메테르가 말하길, 딱 한 번만 더 기가스가 지상을 습격하면 대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거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겠다네요.”
아직 예언의 영웅이 태어나지 않았기에,
기가스들의 본거지를 알아낸다고 바로 쳐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움직임을 파악해 전초전에서 한 방 먹여주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
또한 이번처럼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는 일이 완전히 사라진다.
제우스의 판단이 적절한 것 같네.
물론 옴팔로스는 중요한 상징물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되돌려 놓아야겠지만.
“하지만 가이아 역시 옴팔로스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기가스를 움직이면 그들의 본거지가 밝혀질 것을 알고 있겠군요.”
“네. 아테나와 메티스가 그 한번의 습격을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대요.”
“만약 우리가 그걸 막지 못한다면 승기가 넘어가겠죠.”
다음에 벌어질 기가스의 습격은…
여태까지와 다르게 지휘 개체 한둘이나 함정 정도가 아닌, 수많은 전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크다.
철저하게 준비해 올림포스 신궁을 기습한다거나.
저승으로 와 타르타로스 개방을 노릴 가능성도 있겠고,
아니면 인간들의 나라를 통째로 멸망시키고 산제물을 이용해 티탄 신족을 강림시킬지도.
올림포스에서 일어난 회의 결과를 전달받은 신들이 웅성거린다.
“놈들이 어디로 습격할 것 같나?”
“아마 인간들의 나라를 단숨에 멸망시키고 타르타로스의 죄인들을 이승으로…”
“올림포스 신궁으로 급습할지도 모른다.”
“전면전은 무조건 피해야 해요. 예언의 영웅이 나올 때까지만…”
이제 기가스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 한번의 기습을 위해 날카로운 비수를 갈고 닦으면서 우리의 동향을 살피겠지.
* * *
테베의 하데스 신전.
기가스에게 납치되었다 풀려난 사제, 페네데이아가 신전의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테베 인근에 그런 괴물들이 있었단 말이야?”
“세상에… 하데스 님께서 네 몸에 강림하시다니..”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이제 걱정하지 마라, 내가 왔으니.. 라니!”
하데스가 몸에 강림하고, 아폴론에게 직접 치료를 받은 그녀는 유력한 차기 대사제감으로 떠올랐다.
신이 몸에 강림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의 신앙심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주 하데스는 자비로우신 분이 분명하셔.”
“의외로 저승의 군주께서는 신도들을 아끼시는 게 아닐까?”
“이 사실을 널리 알리면 신전의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죽은 자들은 모두 하데스의 백성이 된다.
인간들이 죽을수록 그의 권세가 강해진다.
그런데 자신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보다 신도들을 먼저 생각해주시는 신이 있다고?
심지어 죽음의 위기에서 강림하시기까지 한다?
다른 신도 아니고 무려 3주신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페네데이아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분께서는 자비의 신격도 있으신 게 아닐까요? 어차피 저승은 생명의 종착점이니 살아있는 자에게는 관대하시다던가…”
주변의 사제들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네?”
“지하세계를 다스리시느라 바쁘실 텐데 신도를 외면하지 않고 손길을 내미시는 걸 보면…!”
“본인의 권세보다 신자를 먼저 우선하시다니..”
그로부터 며칠 후…
하데스 신전의 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원인은 플루토의 자비를 말하고 다니는 사제들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하데.. 플루토께서는 그 어떤 신들보다도 자신의 신자들을 아껴주신다는군.”
“크흠, 그렇지. 다른 이름은 많이 두렵지만…”
“이승에 있는 생자에게는 그리도 자비로우시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이제 테베에서 부와 자비의 신, 플루토의 위명은…
원래 주요 신앙이였던 디오니소스 신의 이름보다 높게 불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