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43)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43화(43/82)
신들의 외유 – (1)
오늘도 어두운 저승.
나, 하데스는 업무를 잠시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요즘 옥좌에 앉아 이승에 귀를 기울이면 무언가 많이 달라진 것이 느껴지기 때문.
“자비로우신 플루토 신이시여… 오늘도 당신의 은총에 감사를.”
“저에게 부의 축복을 내려주소서. 가장 부유하신 자여..”
“저승으로 가신 저희 아버지가…”
어째서인지 최근에 내게 기원하는 기도가 늘어났다.
그냥 늘어난 정도가 아니라 마치 테베 전체에서 기도를 올리는 느낌.
얼마 전에 테베 근처에 강림해 산에서 싸운 것밖에 없는데…
그 여파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내게 기원하는 건가?
다른 곳에서는 한 부유한 귀족이 나무로 제단을 쌓아올리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다.
제단 위에는 소 20마리가 죽어 있었고, 횃불을 든 귀족이 제단에 불을 붙이면서 소리쳤다.
“전능하신 주 플루토여! 수소 10마리와 암소 10마리를 당신에게 바치나이다!”
전능은 제우스도 불가능한 일이고, 네 뒤편의 하인들을 보아하니 내게 제물을 바친다고 혹사시켰구나.
그리고 제물로 올린 소들은 병에 걸렸거나 늙은 소들이네.
나를 믿는 자들이 늘어나서 그런지 이상한 놈들도 많이 꼬이는군.
저놈은 저승의 심판관, 미노스 3형제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다.
다시 다른 곳을 살펴보려는데 전령 하나가 달려와 내게 일렀다.
이제는 이 전령의 얼굴도 익숙하다. 아마 미노스가 있는 심판소 근처의 경비병…
“하데스 님! 또 레테의 강물에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은 자가 나타났습니다!”
“또…?”
“심판관 분들이 있는 곳에서 억울하다고 난동을…”
엄청난 원한을 지니고 죽은 자들이 자꾸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자들을 모두 만나보기에는 끝도 없으니 레테 여신님을 불러…
“그런데 그자가 테베를 세운 영웅, 카드모스의 손자인 것 같습니다.”
“카드모스의 손자? 어디 한번 만나볼까, 데려와라.”
테베는 내 신앙이 널리 퍼진 곳.
그리고 티폰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는 대영웅 카드모스가 탄생한 곳이다.
카드모스는 엘리시움에 갈 정도로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건만,
그의 손자는 무슨 일을 겪었길래 기억을 유지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네.
잠시 기다리자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훤칠해보이는 젊은 남성의 영혼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가 나를 보자마자 바로 엎드려서 하는 말이 참 가관이였다.
“그래 네가 카드모스의 손자라는…”
“자비의 신 플루토시여! 저는 악타이온(Actaeon)이라고 하는 인간입니다! 제발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저승에 끌려와서 부의 신 플루토를 연호하는 자는 많이 보았지만…
내가 왜 자비의 신이냐.
“나는 자비의 신이 아니다. 그런데 너는 무슨 원한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는 것이냐?”
“아르테미스 신의 알몸을 보았다고 죽었습니다!”
뭐라고? 무슨 소리냐.
내가 말문이 막히자 악타이온이 울부짖으며 소리친다.
“저는 결코 흑심을 품고 접근한 것이 아니옵니다! 아름다운 여신의 신체를 감히 엿볼 생각은 없었나이다!”
“…일단 진정해라.”
* * *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악타이온이 이성을 되찾았다.
우울한 어조로 천천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고하는 그.
“저는 어렸을 적부터 켄타우로스 현자 케이론(Cheiron) 선생님께 사사해…”
상반신이 인간, 하반신이 말인 켄타우로스.
난폭하고 야만적인 종족이지만케이론은켄타우로스들과 달랐다.
크로노스가 말로 변신해 자신의 조카를 강간하여 태어난 케이론.
그는 온화하고 현명한 성격에 무술, 음악, 문학 등 여러 가지에 능통한 현자였다.
그 명성이 날로 커지자 영웅이 되길 원하는 인간은 케이론의 문하에서 사사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영웅들의 스승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케이론의 밑에서 악타이온도 가르침을 받은 모양이다.
“케이론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저는 모험가로서 명성을 조금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케이론의 제자였군.”
“제가 죽은 날은… 힘든 모험을 마치고 돌아와 사냥을 하러 키타이론의 숲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아르테미스가 있었나?”
“예… 목욕을 하고 계시던 아르테미스 여신과 님프들이…”
그와 눈을 마주친 아르테미스는 대노하며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악타이온의 몸은 사슴으로 변하게 되었고, 결국 그가 부리던 사냥개들에게 쫒겨 죽음을 맞이했다.
“저는 정말로 억울합니다.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처녀를 맹세한 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르테미스가 그리 분노한 까닭은 인간 따위에게 여신의 알몸을 보여주었다는 부끄러움,
그리고… 처녀성에 위협이 갈만한 상황이였다는 것.
스틱스 강에 맹세한 아르테미스의 처녀성이 악타이온에게 알몸을 보여줌으로서 깨질 위기에 처했다.
그가 여신의 알몸을 보았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죽였구나…
“네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한다. 미노스에게 말해 너의 딱한 사정을 심판에 고려하라고 하겠다.”
“예…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비의 신, 플루토께 영광 있기를..”
그가 정말로 운이 나빴다고 밖에 설명할 말이 없다.
이게 아레스가 카드모스의 후손들에게 내린 저주의 영향인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악타이온,
사정이 몹시 딱하니 저승의 생활에 약간의 편의라도 봐줘야지..
* * *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르테미스 신도 정말 가차없네요.”
“…딱해요.”
비스듬히 옥좌에 기댄 내 옆의 스틱스 여신이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다.
바닥에 앉아 날 올려다보는 레테 여신의 눈매가 살짝 내려간다.
“그런데 여신님들은 왜 이곳에?”
“저희도 쉬는 시간은 있어야죠.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전 타나토스 신이 아니에요…”
어디선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을 것만 같은 어떤 신이 떠오르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런데 너무 가까이 붙으시면 자꾸 부드러운 감촉이…
둘다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어서 억지로 눈을 돌리고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악타이온이 저를 자비의 신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인간들 사이에서 신격이 잘못 알려진 게 아닌가…”
“그야 지금 테베에 소문이 돌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레테 여신은 종종 멍하니 이승의 인간들을 관찰하곤 했다.
망각의 축복도 가끔 내려주고 인간들의 반응을 구경하기도 하는 그녀는 지상에서 들리는 소문에 민감하다.
“자비로우신 저승의 군주께서 위험에 빠진 신도를 구하기 위해 현신하셨다는 소문이죠.”
“그런데 다른 신들도 종종 신도들을 돕지 않습니까?”
자신의 신자를 돕거나 별자리로 만들어주는 일은 제법 흔한 일이다.
인간들이 위험에 처할 때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역시 그 때문이고.
“아무래도 죽음은 두렵고 무서운 것이니까요. 피할 수 없기도 하고.”
“인간들은 저승이라는 말도 잘 꺼내지 않아요…”
내가 인간들 사이에게서 알려진 이미지와 상반된 행동을 해서 그런가.
하기야 아직도 플루토가 아닌 하데스를 찾는 신도는 많지 않으니…
“하지만 자비의 신격은 프로메테우스나 헤스티아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가엾은 인간들을 위해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
화로와 가정을 수호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헤스티아.
이들을 제치고 나보고 자비의 신이라니…
잠시 생각에 빠지자 스틱스 여신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달라붙는다.
아니, 레테 여신님도 그러시면…
“헤헤… 하데스는 팔뚝이 정말 단단하네요.”
“그럼 여기도 혹시…”
오늘저승에온영혼의수가얼마나되었더라제우스랑포세이돈이강간한여신들의숫자를하나씩세어본다면하나둘셋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은 와중, 내 귀에 들리는 마성의 속삭임.
스틱스 여신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어깨에 닿는다.
“하데스, 우리 머리도 식힐 겸 이승으로 나갈래요? 요새 너무 많이 고생했잖아요.”
“저도 좋아요. 당분간 기가스도 쳐들어오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나가는 거 어때요.”
“하지만 제가 저승에 있어야…”
기대감에 찬 두 여신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찰나,
나를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리는 은발머리의 여신이 눈에 들어온다.
“저도 그동안 힘들었는데… 안되나요? 우으…”
“흡…!”
너무나도 맑은 푸른 동공, 여신 자신도 부끄러운 듯 점차 붉어지는 볼과 귀.
인간을 초월한 신의 심장은 멎지 않지만 지금의 나는 신이 아니라 남성이였다.
“되.. 됩니다… 그럼 잠시 나가시죠.”
…!
어차피 이승으로 올라가서 해야 할 일도 있었으니 함께 나가면 되겠지.
여신 둘이 잠시 업무를 쉬어도 될 정도로 저승의 체계도 정비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 티폰의 몸뚱이가 깔려있는 에트나(Etna)산 근처를 순찰하러 갈 때가 되었는데, 그럼 함께 가시겠습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여신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정말이죠? 맹세의 여신이 들었으니 어기면 안 돼요!”
“헤헤… 성공했어요. 스틱스!”
아차… 내가 여신들의 계략에 속았구나.
과연 노회한 저승의 신들, 언변과 몸(?)으로 나를 설득하다니.
뭐 그래도…
“히히… 의복 좀 갈아입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하데스!”
“앗. 레테, 저도 같이 가요!”
이런 평온도 나쁘지는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