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45)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45화(45/82)
신들의 외유 – (3)
스틱스와 레테, 두 여신이 전차에서 내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푸르르륵-
유령마의 다리가 바쁘게 움직이며 대지를 달린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에트나 산 외곽에 전차의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졌다.
물론 모습과 소리를 차단해 인간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꺄하하!”
“이쪽으로 던져!”
티폰의 몸뚱이가 봉인된 위험한 산인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경치 덕분에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많은 님프들이 있었다.
근처에는 숲이 펼쳐져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개울도 보인다.
딱 요정들이 많이 살 것 같은 자연의 풍경.
자연스럽게 내 표정도 풀리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매일 집무실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만 보는 것보다는 확실히 기분전환이 된다.
잠깐 전차와 유령마를 사라지게 하고 힘을 더욱 억누른 채 산에 가까이 다가갔다.
내 존재감이 이 근방을 뒤덮는다면 자극을 받은 몸뚱이가 날뛰어 지진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아악-
검은 신력이 산을 천천히 훑어보면서 밑에 깔린 존재의 동향을 살핀다.
음. 티폰의 몸뚱이는 그대로 잘 있군. 잠잠하네.
이제 두 여신과 헤어졌던 장소로 돌아가려는데 나무 사이에서 나를 부르는 누군가.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거리던 여성 님프의 기척.
“거기 잘생긴 분! 혹시 심심하시면 저랑 같이 놀아요!”
밝고 옅은 청록색의 머릿결이 돋보이는 님프 하나가 내게 다가오며 손짓을 한다.
청량하고 맑은 기운. 물의 요정인 나이아데스(Naiades) 중 하나인가.
하지만 내게 말을 걸기에는 이미 선객이 있는 듯한데…
“멘테!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그래? 나랑 얘기하지니까?”
“아니, 싫다니까요? 저리 가세요!”
그 님프의 뒤에서 남성 켄타우로스 하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았다.
한참 전부터 님프의 근처에 맴돌길래 아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일방적인 구애였나.
“시끄러워! 그냥 따라와!”
“꺄악! 저리 가요!”
켄타우로스가 화가 난 듯, 님프를 거칠게 자신의 품으로 잡아끈다.
곧 그리스에서 너무나도 흔해빠진 범죄가 벌어지겠지.
제우스나 포세이돈… 온갖 신들이나 남성들이 아름다운 여성을 강간하는 일.
강간당하고 죽은 여성들이 깊은 원한을 품고 심판관인 미노스에게 탄원하게 되는 원인.
“어이! 뭘 보고 있어! 이 여자는 내 것이… 컥!”
“꺅!… 하아…”
정말로 역겨운 꼬라지를 보다 못해 위압해서 죽여버렸다.
방금까지 님프를 강간하려한 흉폭한 켄타우로스의 심장이 멎고 거품을 물며 쓰러진다.
“히익…!”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며 겁먹는 님프.
반쯤 벗겨진 옷을 급하게 입는 그녀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너한테 관심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혹시… 어딘가의 신이신가요?”
“그래, 그리고 다른 님프들과 같이 다녀라. 저런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최고신 제우스부터가 강간범이니 다른 종족들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특히 하반신이 짐승인 켄타우로스들은 더욱 본능에 충실하다.
볼일도 다 봤겠다.
이만 떠나려는데 그녀에게서 어디선가 맡아본 향기가 난다.
굉장히… 아주 오래전에 맡아보았던 상큼한 청량감.
아테나가 태어났을 때쯤? 아버지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세계의 패권을 잡았을 때쯤?
아니야. 그 이전, 나의 전생에서나 맡아보았던…
정말로 그리운 냄새.
반쯤 흘러내린 옷을 주섬주섬 다 입은 님프가 내게 고마움을 표한다.
“정말 감사해요. 이 근처에서 님프들을 보면 저 멘테의 은인이라고 하시면…”
멘… 아니, 이것도 분명히..
“네 이름이 뭐라고?”
“저는 멘테(Menthe)라고 하는데요?”
멘테. 민테… 민트?
민트초코를 말할 때의 그 민트?
“너는 물의 님프 나이아스인데… 혹시 청량한 향기를 내뿜는식물을 키우고 있나?”
“예? 어떻게 아셨나요?”
* * *
“이쪽이에요. 신님.”
내가 식물에 관심을 보이자, 자신을 따라오라는 멘테.
그녀의 뒤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자 한 개울의 옆에 자란 식물들이 보였다.
“이거에요. 그냥 평범한 식물에 제 힘을 불어넣으니 이렇게 변했긴 한데…”
자그마한 잎사귀, 여태까지 이승에서 못 보던 새로운 종(種).
이 식물은 역시…
“민트… 박하구나.”
“예?”
의아해하는 멘테를 무시하고 식물을 입에 넣어 씹어보았다.
입안에 상큼하게 퍼지는 청량감.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과거의 향수.
“멘테라고 했지. 나는 저승의 신 하데스다.”
“네…? 하데스.. 님이요..?!”
“그래, 내가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려준 대가로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
스틱스 강에 맹세하는 어리석은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들어줄 수 있는 한에서 적당한 소원을 들어줄 생각.
물론 그 적당히라는 범위는 굉장히 넓겠지만.
내 말을 들은 멘테가 크게 놀라더니 마구 당황하며 손을 내젓는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그.. 그럼 혹시… 으으.. 아니이… 그래, 내 주제에 뭔…”
“천천히 생각해보고 말해도 좋다.”
“그…! 그럼 저하고 잠시만 시간을 보내주세요!”
….정말로 그게 소원이라고?
잔뜩 붉어진 얼굴로 겨우 말하는 것은 소박하고도 작은 바램.
“역시 무례한 부탁이였나요..?! 으.. 죄송합니다..”
“그 정도야 간단하지. 그리고 더 보답을 하고 싶은데…”
자연에 깃든 정령이자 요정이니 부의 축복도 필요 없겠고,
무언가 크게 바라는 점도 없어보이는데…
아! 좋은 생각이 났다.
누구나 바라는 명예를 안겨주면 되겠구나.
“거기에 더해 네가 창조한 저 식물, 민트를 내 상징으로 삼겠다.”
“네.. 네헤에..?! 그.. 그런?! 너무 과분…”
과분하기는, 내 전생의 기억을 일깨워준 대가인데.
보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내 신전에는 항상 민트가 자랄 것이며 이것의 창조자가 너라는 사실을 인간들에게 널리 알리겠다. 민트로 만든 음식들이 세계에 퍼질 것이고…”
“으으으…”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을 뻐끔거리는 민테.
양손으로 가린 그녀의 얼굴이 헤파이스토스의 불길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음으로 그녀가 원하는 포상, 잠깐의 산책을 들어주려고 하는데…
근처에서 다가오는 여신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레테 여신님과.. 스틱스 여신님?
“아 하데스! 여기 있었… 어?”
“한참 찾았어요… 그런데 그쪽은…”
이쪽으로 다가오던 여신들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멘테의 얼굴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점차 딱딱하게 굳어가는 얼굴. 흉흉하게 발산되는 신력.
그런 여신의 신력을 느낀 멘테가 나와 그녀들을 살피더니…
“이.. 힘은… 여, 여신님들? 그.. 그렇다면 혹시! 죄.. 죄송합니다아!!!”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아니, 네가 그렇게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도망치는 걸 붙잡고 잠시 해명을 도와달라고 해야 했나?
점차 발걸음을 옮기는 두 여신의 눈초리에 가슴이 아프다.
“하데스도 결국 남신이였군요..”
“저희랑 놀러 와놓고 다른 여자를 또… 점점 늘어나…”
“…일단 지금 생각하시는 거는 절대로 아닙니다.”
* * *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
테베에서 크게 번영한 하데스 신전.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던 대사제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놓인 종을 치자, 신전에 맑은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하데스 님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사제분들은 모두 모여 주세요!”
“신탁인가?! 이번에는 어떤 말씀을…”
“주 하데스께서 자신의 상징을 내리셨습니다!”
신전 한가운데에 검은 신력이 감돌며 하데스의 하사품이 도착했다.
겨우겨우 두 여신의 오해를 푼 하데스가 자신의 신전에 민트를 잔뜩 보낸 것.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민트 이파리와 씨앗을 본 사제들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건… 처음 보는 식물입니다만.. 향이 굉장히 강하군요.”
“하데스께서 저희에게 이걸 보내주신 까닭이 있을 텐데…”
“이 식물을 창조한 멘테라는 님프의 이름을 따서 민트라는 이름을 붙이셨다고…”
“그 님프가 무언가 큰 공이라도 세운 게 아닐지.”
한동안 고민하던 사제들 중 하나가 말을 꺼냈다.
하데스가 직접 몸에 강림했던 차기 대사제,페네데이아였다.
“혹시 하데스께서 망자들과 유가족을 배려하신 것이 아닐까요?”
“망자를 배려하셨다고요…?”
“시체의 악취를 덜어줄 향이 강한 민트를 장례식에 사용하면 망자들도, 유가족들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요?”
“아! 뱃사공 카론에게 드릴 동전과 비슷한 느낌인가?!”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들.
“과연! 그 어떤 사람이라도 본인의 가족이 죽어서 악취를 풍기는 것은 원치 않으니…”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조금이나마…”
“어쩐지 청량한 향기가 도는 식물을 보내셨다 했습니다. 자비의 신이시여…”
그 누구보다도 필멸자를 위하는 자비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사제들.
그들에게 존재하던 신앙심이 더욱 커지는 순간이였다.
그 이후 테베에서는 장례식을 치를 때,
자비의 신, 플루토의 상징인 민트를 시체의 옷 사이에 두는 문화가 생겨났다.
“플루토 신의 자비가 민트 이파리라며?”
“시체가 썩으면서 나는 악취에 대한 해결책이라는데.”
“저승의 신은 정말로 자비로우시군…”
“멘테라는 그 님프도 대단하단 말이지.”
그리고 저승에 있는 어느 신은 힘이 점점 강해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테베 말고도 내 신전이 이승에 또 생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