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5)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5화(5/82)
기간테스의 이야기 – (2)
황급히 올림포스 산으로 향하자 이미 수많은 기가스들이 구름 위의 신궁으로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틈을 봐서 제우스에게 합류하려는데 강렬한 빛과 굉음이 터져나오고 개미 떼처럼 몰려들던 기가스들의 일부가 날아갔다.
콰르르릉! 꽈광!
“크워어!”
“이게 어머니가 말씀하신 벼락인가!”
방금 수십의 기가스를 날려버린 이 공격은 제우스의 벼락, 아스트라페.
그리고 저 위쪽에서 거대한 화로의 형상이 엎어지며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는 것은 헤스티아의 권능이겠고..
전생에 보았던 모 닌자만화의 기술처럼 풀과 나무가 잔뜩 자라나며 기가스들을 묶는 것은 데메테르의 힘.
“크하하하! 발악이 제법이구나!”
“어디 더 해봐라!”
개개인의 힘은 이쪽이 압도적이지만 전황은 백중지세로 보였다. 놈들의 수가 많고 개개인이 모두 신족이라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다.
각각의 객체인 기가스가 아니라 기간테스라는 군체에게 작용하는 ‘흐름’
그것 때문에 신들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도 쉽사리 결판을 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구름 위에서 인상을 쓰며 다시 벼락을 준비하는 금발 머리의 신, 제우스에게 뜻을 전했다.
[제우스, 들리나?] [하데스 형님, 저승은 대체 어쩌고 이곳까지 온 것이야?] [지하 세계로 온 기가스들은 이미 모두 처리했다. 내가 올림포스 서쪽을 맡을테니 이쪽으로는 아스트라페를 던지지 말아라] [고마워, 이 놈들은 재생력과 회복력이 엄청나니 주의해. 올림포스는 형님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지.]제우스.. 이 큰형님한테 네네 그럴때는 언제고 이제는 반말이냐.
그래, 너는 하늘을 다스린다 이거지?
괘씸한 막내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전장을 빠르게 누볐다.
최대한 죽음의 힘으로 기가스들의 회복을 늦추고 전열을 무너뜨리는 데에 집중하자 금방 진형이 무너진다.
“무언가가 있다! 커억!”
“기척을 느낄 수 없는 암살자, 어머니가 말씀하신 저승신 하데스!”
“저승으로 간 우리 형제들은 모두 당했단 말인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공격당하고 부상을 입은 기가스들이 속출하자 놈들이 나를 알아챘다.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투구를 벗고 싸늘한 미소를 짓자 연예인을 만난 극성 팬마냥 아주 좋아죽는다.
“하데스! 죽여버리겠다!”
“쥐새끼 같은 놈!”
잘생긴 나를 향해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시는 기가스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한 손을 들어올려 화답하다가 다시 퀴네에를 착용했다.
모습을 감추고 바로 몸을 날리자 내가 있던 장소에 곧 불타는 떡갈나무가 땅으로 쳐박혔다.
“또 사라졌다!”
“나와라 이놈! 크아아아!”
참을성도 없고 단순한데다 재생력과 힘만 강한 신족이지만 우리가 아직까지 이기지 못한 이유는 역시 운명 때문일 확률이 높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면 역시 대부분은 운명 때문이다. 전투가 끝나고 제우스에게 말해봐야겠다.
그리고 이것들은 저승에서 싸웠을 때와는 달리 잘 죽지 않았다.
권능을 발현해 대량으로 쓸어버릴까 생각했지만 이곳은 지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했던 위력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크억!”
결국 일일히 칼로 베어야만 한다.
피를 뿌리는 기가스를 뒤로 하고 다시 다음 목표를 설정.
뒤로 돌아가 그대로 가슴을 관통했다.
한참동안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다. 기가스들도 불타는 떡갈나무를 휘두르거나 거대한 바위를 마구 던져대지만 내가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뱀 다리를 베고, 바위를 든 팔을 찌르고, 내 위치를 가늠해 공격해오는 기가스를 피하고..
슬슬 지루해질 무렵, 고착화된 전장에 다시 한번 이변이 일어났다.
“무슨..? 땅이 흔들린다!”
“어머니 가이아께서 노하신 건가?”
쿠구구구구.. 쩌저적.
전쟁터 외곽에서 일어난 작은 균열이 점차 커져나간다.
전투의 열기에 빠진 기가스들은 그제서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미약한 진동에서 바위가 제멋대로 움직일 정도로.
풀이 흔들리는 정도에서 거대한 떡갈나무가 뽑혀 나갈 정도로.
땅은 점차 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숫제 발광하듯이 자신의 위에 있는 모든 것을 갈아엎고 있었다.
“으하하하! 내가 왔다. 제우스!”
“포세이돈! 딱 알맞은 때에 왔군!”
이 정도의 지진은 분명히 포세이돈의 트리아이나.
바다의 신인 그가 자신의 영역으로 밀려온 기가스들을 퇴치하고 올림포스를 도와주러 온 것이였다.
땅에 트리아이나를 강하게 박아넣은 포세이돈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올림포스 산에 울려 퍼지고 기가스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땅 밑으로 몸이 빠지잖아! 일단 후퇴하자!”
“젠장할, 제우스. 두고보자!”
지상에서 놀라운 재생력과 전투 지속력을 보여주던 수많은 기가스들은 엄청난 지진으로 싸우기 힘들 정도가 되자 일시적으로 물러갔다.
* * *
격렬했던 기가스들과의 전투가 끝나고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르는 제우스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가이아께서 우릴 몰아내기 위해 대체 뭘 만드신건지, 이 사태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아는 것이 있는지.
제우스의 앞에서 포세이돈과 함께 질문을 던졌다.
“사실 예언이 있었어, 큰형님.”
“예언이라면.. 운명의 세 여신에게서?”
밤의 여신 닉스의 딸들인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Moirai)들.
과거를 관장하는 클로토(Clotho), 현재를 관장하는 라케시스(Lachesis), 미래를 만들어내는 아트로포스(Atropos).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 명의 여신들이 정하는 운명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라서 어떠한 신조차 그들에게 거스를 수가 없었다.
클로토가 운명의 실을 뽑아내면 라케시스가 인생의 길이를 정해 운명의 실을 감거나 짜고, 아트로포스가 그 실을 자르면 생명이 거둬진다.
“우리 신들이 위대한 인간 영웅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예언이였거든.”
“인간..? 그런 종족이 있었나?”
“인간이라는 종족이 없다면 만들면 될 일. 우리에게 투항한 프로메테우스에게 우리의 모습을 본뜬 인간을 만들라고 해야겠어.”
“어쩐지 바다로 온 놈들도 자신만만하더니 예언의 영향이 있었을 수도..”
“그리고 저 기가스들은 우라노스가 크로노스에게 성기를 잘렸을 때, 거기서 나온 피로 할머니가 잉태해서 생긴 신족들이야.”
“불사성은 없지만 신의 힘을 다루던 놈들이야. 우리도 경계해야 해.”
“흥.. 그래봐야 우리 올림포스 신들에게 미치지는 못해.”
모두 올림포스 신궁에 앉아 자세한 대비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다시 운명의 세 여신들을 찾아가 예언을 살짝 비틀어 달라는 말부터 할머니 가이아께 찾아가서 설득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일단 그 인간이라는 걸 탄생시키고 생각해보자고.”
“인간 외에 다른 생명체를 만드는 방향도..”
“신들의 숫자도 너무나 적어. 이대로는 패배할 뿐.”
“다음에 놈들이 언제 침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로 밀려오겠지.”
아직까지 이성적으로 보이는 제우스가 미치광이 강간마로 돌변하는 것이 지금쯤부터였을까?
인간 영웅의 예언도 그렇고, 전쟁을 겪다보니 신들의 수가 모자라서 전력보충을 위해… 그래도 근친 강간은 제발 좀 하지 말아다오.
회의가 점점 길어지고 적당히 다른 신들과 말을 나누다 다시 지하로 떠나려고 하는 나를 누군가 붙잡았다.
“하데스, 잠시만 이쪽으로.”
내 옷깃을 잡아끄는 작은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작은 여신이 있었다.
연갈색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가정과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Hestia)다.
그녀가 화로 안의 장작더미를 부지깽이로 휘저으며 나를 주시했다.
신들의 회의에도 한쪽 구석에 앉아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던 그녀가 무슨 일이지?
일단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옆에 앉았다.
“혹시 저승에도 화로를 만들면 안 될까?”
저승과 화로라,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이건 다른 신이 관할하는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다.
내가 지켜본 헤스티아는 분명 생각이 없거나 무례한 신은 아니다.
가정을 수호하는 그녀의 상징물을 저승에 갖다 놓는다니,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헤스티아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그게.. 우리들 신 이외의 생명체들을 만든다고 했잖아?”
그렇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인간 영웅이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인간들의 생존 유지를 위해 다른 생명체도 많이 만들 것이겠고.
“제우스는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는 것을 싫어하니까 새로 만들어지는 생명은 불사성이 없겠지?”
물론 그렇겠지. 하늘을 다스리는 신들의 왕이니 뭐니 하면서 제우스가 우리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나야 권력 따위에 큰 관심은 없다만 포세이돈은 불만이 꽤 쌓인 것 같았다.
새로운 생명체들은 제우스의 권위를 위협할 수 없는 불사성이 없는 필멸자로 창조될 가능성이 높다.
원래 신화에서도 그랬으니 이곳도 별 다를 바는 없겠지.
“그럼 이제부터 네 백성들이 늘어날 텐데, 저승에 간 불쌍한 영혼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을 조금이라도 보듬어주고 싶거든.”
우리는 죽음을 겪지 않는다.
그리스 신들은 완벽한 절대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영원불멸.
그런데 그녀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선신(善神). 처벌보다는 보상이, 외면보다는 동정이 더 가까운 신이다.
포세이돈이 만들어낸 지진에 휩쓸린 나무들에 동정심을 가지던 헤스티아는 생명체의 죽음이라는 것에 생각이 닿은 모양이다.
“입구만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 레테 강에서 모든 기억을 잃는다지만 저승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에도 새겨졌을 거야.”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손을 모으고 부탁하는 선신.
그래 뭐, 성채 밖의 저승 입구만이라면 상관없겠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낯빛에 붉은 기운이 돌며 환하게 웃는다.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다음에 내가 직접 저승에 방문해서 화로를 만들어 줄게.”
저승은 이제 생각보다 칙칙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