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52)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52화(52/82)
헤파이스토스의 이야기 – (3)
올림포스 신들에게는 렘노스 섬에 며칠 내려간다고 말해놓고 축제에 참여했다고?
뭔가 미심쩍은 냄새가 난다…
일단 단상 위의 헤파이스토스를 살폈다.
“모두들 잠시만 날 따라와 주신다면 내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오!”
“예술 작품? 대장장이 신이 만든 작품이라…”
“헤파이스토스 님은 무기는 잘 만드시지만 예술이라면?”
“조금 크기가 있는 작품인가?”
신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수근대자 암브로시아를 먹던 제우스가 그에게 말한다.
“헤파이스토스, 네가 이렇게 자신만만하니 기대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아버지, 저기 아폴론도 제 작품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 어떤 걸 만들었길래 그러는 거냐 조카야.
설마 내 바이던트 같은 무기를 만든 건 아닐테고…
예술의 신을 이길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자신만만하다 못해 광오한 발언,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더욱 커지지만 아폴론은 궁금증이 더 큰지 호기심 어린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그래? 그리 말하니 한번 보러갈까, 안내해라.”
“예, 아버지. 보고 싶으신 분들은 모두 저를 따라오십시오!”
제우스가 일어나고, 포세이돈도 흥미로운지 걸어나갔다.
헤파이스토스가 대장장이로서 명성을 날리는 걸 원하긴 해도,
예술 분야에서 굳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진 않았는데…
잠시 고민하자니 스틱스 여신님이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하데스, 헤파이스토스가 저리 말하는데 어서 보러 가요.”
“뭔가 이상한데… 예, 그러시죠.”
헤파이스토스를 따라간 신들이 도착한 곳은 올림포스에 있는 그의 거처였다.
본인의 거처에 예술작품이 있는 것일까?
곧 자신의 침소 앞에 선 헤파이스토스가 몸을 돌려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잠시 목을 풀더니 방문 손잡이를 잡고 입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예술, 아니 그리스식 예술. 작품명은 [사랑과 전쟁] 입니다!”
그와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리고…
예술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문이 열린 헤파이스토스의 침소 안에 보이는 건…
놀랍게도 방금까지 정사를 치른 듯, 침대에 뒤엉킨 두 남녀.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였다.
“아.. 아닛!”
“헤파이스토스…?! 분명 렘노스 섬에 내려간다고…”
불륜을 저지르던 알몸의 두 남녀는 헤파이스토스를 보자마자 도망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들의 몸 주변에 얇은 청동 그물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이..이익! 이게 왜 안 끊어지는…”
“으으….”
“제 예술 작품이 어떻습니까? 아폴론을 뛰어넘을 만하지 않습니까?”
다들 말문이 막혀 멍하니 이 장면을 보고만 있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괴력조차 쉽게 풀 수 없는 청동 그물은 그렇다 쳐도…
밑에 깔린 아프로디테의 자태가 너무나도 황홀했기 때문에.
아레스와 알몸으로 뒤엉킨 미의 여신의 아름다운 몸.
어느 곳 하나 모자라지 않는 부드러운 살결과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많은 신들 앞에서 불륜 장면을 보였다는 배덕감과 부끄러움으로 묘하게 달아오른 얼굴.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어떻게든 가슴팍과 하반신을 가리려는 손길.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절대적인 미(美)를 나타냈다.
짝. 짝. 짝.
갑자기 들리는 박수 소리를 따라가 보니 아폴론이 멍하니 양 손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의 코에서는 신들의 피, 황금빛 이코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우리 신들은 인간과는 달리 흥분을 좀 한다고 피를 흘리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의 예술관이 산산히 깨지면서 신격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인정하지, 헤파이스토스. 나는 도저히 네 예술을 따라잡을 수가 없군.”
“음. 너도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제는 예술의 신이 아니게 된 아폴론이 아프로디테의 자태에서 멍한 눈을 떼지 못한 채,
코 밑을 훔치며 헤파이스토스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하아… 이런 미친…”
다른 신들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한마디씩 덧붙였다.
“저번에 헤라 님께서… 불륜은 이제 그만하라고 말씀을 하셨지 않으셨나?”
“하르모니아도 낳았으면서 아직까지…”
“예술의 축제에 걸맞는 대단한 광경이군.”
“제우스, 어떻게 생각하나?”
“거… 적당히 좀 할 것이지. 쯧쯧.”
멍하니 박수를 치던 아폴론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헤르메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두 신 모두 아프로디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가 부럽나? 아니면 아레스가 부럽나?”
“아폴론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질투하는 헤파이스토스가 부러운지… 아니면 무안당하는 아레스가 부럽냐는 말이지.”
“당연히 둘 다 부럽습니다. 그물이 훨씬 더 질겨서 영원히 갇혀있고 싶군요…”
그들의 대화를 듣자하니 내 머리가 더욱 아파왔다.
하계에서 우리를 숭배하는 인간들은 신들의 이런 면모를 알까?
“으으… 이런 망측한…!”
내 옆에 있는 스틱스 여신님의 얼굴이 터질 것만 같더니, 후다닥 자리를 피해 나가버렸다.
멀어지는 기척을 보아 급하게 저승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아레스, 아프로디테. 너희는 하르모니아까지 낳았으면 이제 적당히 할 때도 됐지 않았나?”
제우스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쉰다.
매우 떨떠름한 얼굴로 둘의 불륜 현장을 적발한 포세이돈이 대장장이 신에게 말했다.
그 역시도 이번 일이 그리 내키지 않는 듯했다.
“헤파이스토스, 내가 책임지고 저 둘에게 적절한 사과와 보상을 받아낼테니 이만 풀어주도록 해라…”
하지만 그런 포세이돈도 아프로디테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예… 뭐, 그렇게 말씀하시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헤파이스토스가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 몇가지 장치를 조작하자 그물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아마도 자신이 오래도록 자리를 비우면 아프로디테가 아레스를 부를 것을 예측하여 거짓 소문을 퍼뜨린 모양이다.
어쩐지 올림포스 신들이 헤파이스토스가 렘노스 섬에 내려간거 아니냐고 당황하더라…
* * *
청동 그물이 풀리자아레스는 자신의 신전이 있는 트라키아로 도망갔다.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키프로스 섬으로 떠났다.
키프로스 섬에는 몸을 담그기만 하면 여자의 처녀를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처녀의 샘이 있다.
거기에 몸을 담그고 처녀성을 회복할 생각이겠지.
그런데 어차피 다시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처녀성이 깨질 텐데 의미가 있나?
일단 약속대로 무구를 점검해주겠다는 헤파이스토스를 따라 대장간에 왔다.
그가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집중해서 내 바이던트를 살피는 모습을 보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헤파이스토스, 그런데 오늘 같은 일을 벌이면 아프로디테가 더욱 너를 싫어하지 않을까?”
대장장이 신의 등이 파르르 떨린다.
“저는 사실… 반쯤 포기했습니다. 크흑…”
“그렇다면 너도 다른 여신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 제우스에게 한번 찾아가서 얘기를…”
이 정도쯤 되면 가정이 파탄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제우스가 직접 주관한 결혼식이라고 해도,
오늘 일을 본 제우스에게도 심경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나도 옆에서 한마디 보태고 부부가 모두 이혼을 원한다면 가능하지 않으려나.
아프로디테에게 눈독을 들인 신들끼리 싸움이 나는 것이 문제라면,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
“하지만 반 정도는…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아른거립니다…!”
아…
“어떻게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아오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미래가 보입니다! 이미 아프로디테는 아레스 놈에게 넘어가서 하르모니아까지 낳았는데! 저는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아내에게 버림받고 이런 보복만을 꾀하는 것이 전부라니…!”
아니 이건 진짜 뭐 어떻게 해야 하지.
삼자 대면이라도 해야 하나.
“크흐으윽! 아레스 그놈은 언젠가 불길로 얼굴을 태워버릴 겁니다!”
아무래도진짜 여자 문제 때문에 개판이 나겠어.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와 함께 아프로디테를 만나러 가자.”
“예?”
“너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아레스와 만나는지 들어보는게 어떠냐?”
진솔한 대화를 하도록 시키는 수밖에.
* * *
무구 점검이 끝나자마자 헤파이스토스와 곧장 키프로스(Cyprus) 섬으로 향했다.
아프로디테의 시종인 여자 님프에게 우리가 기다린다고 말을 전하라 한 뒤,
잠시 기다리자 목욕을 마친 미의 여신이 걸어왔다.
헤파이스토스에게 눈치를 주자 그가 떠듬떠듬 말을 꺼낸다.
“대체 무엇이 그리도 불만이길래 자꾸 아레스를 부르는 거요?”
“흥… 뭐가 불만이냐고요?”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구겨진다.
“그야 당연히 이 결혼 자체죠, 애초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다고요!”
“아버지의 뜻대로 나와 결혼했으면서, 아레스와 아이까지 만들어놓고 아직도 이러는 건 너무한 거 아니오?”
“헤파이스토스야말로 매일 대장간 일에 몰두하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잖아요! 상식적으로 정이 붙겠어요?”
아프로디테가 잘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부인에게 신경은 써야 하지 않나?
“나는 대장장이 신이라 어쩔 수가 없소. 하지만 당신과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흥…”
아프로디테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 고개를 슬쩍 돌린다.
대장장이 신은 올림포스 신들이 요청한 물건을 밤낮으로 만들어주느라 바쁘지만,
미의 여신과 결혼한 뒤부터는 종종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아프로디테의 성에는 차지 않은 것 같지만…
“하지만 어떻게 올림포스의 회의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나를 꺼려할 수가 있소? 저번에도 내가 부탁했건만,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더군! 어차피 당신과 아레스가 사랑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 일부러 그러는 거요?”
서로에게 불만이 많이 쌓인 듯, 내가 옆에 있음에도 말이 점점 거칠어진다.
하지만 한번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그런 자리에서만 체면을 챙기기 위해 나를 찾는군요. 당신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내 외모만을 보고 결혼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어요?”
“뭐라고?! 말 다 했소? 그러는 당신야말로 필요할 때만 내게 물건을 만들어달라고…!”
둘의 감정이 점점 고조되며 힘이 충돌한다.
키프로스 섬이 흔들리고 주변의 모든 생명을 매혹시키는 신력이 사방으로 발산된다.
헤파이스토스의 발 밑에서부터 불길이 일어나 공간을 뜨겁게 달군다.
이대로면 섬의 생명들이 죽어나갈 테니 개입해야겠다.
“그만, 거기까지 하지.”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의 사이로 끼어들어 주위를 환기시켰다.
탄내와 매혹적인 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싸늘한 저승의 기운이 모든 것을 흐트러뜨린다.
“헤파이스토스, 대장장이 일이 아무리 바빠도 아내에게 신경을 더 써주는 것이 좋겠구나. 다른 신들이 네게 불만을 토로하면 저승으로 찾아오라 해라.”
“예… 알겠습니다.”
헤파이스토스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조금 물러났다.
다음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미의 여신 차례.
한숨을 쉬며 아프로디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마주쳤다.
“아프로디테, 너는 사랑의 여신이 아니냐? 그런데 네게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의 간단한 부탁 하나도 못 들어준다는 것이냐? 심지어 다른 남자를 침소로 끌여들여 아이까지 낳았음에도 너를 사랑하는 신이 여기 있는 헤파이스토스인데?”
“그게… 저…”
아프로디테가 슬쩍 뒤로 물러서려 하지만,
이번에 확실하게 말을 해야 둘의 갈등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사랑의 여신에게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결혼했다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부부처럼 행동하도록 노력해라.”
“으읏.. 네… 알았어요…”
어째서인지 작게 눈물이 맺힌 채, 붉어진 얼굴로 서둘러 이 자리를 뜨는 아프로디테.
제대로 이야기를 해놨으니 이제 좀 괜찮아지려나 싶어서 다시 고개를 돌렸는데…
“크흡…”
헤파이스토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비통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역시… 세상은 얼굴이 전부군요… 아버지 제우스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