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7)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7화(7/82)
생명의 이야기 – (2)
“하데스시여, 제 휘하의 영혼들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나이다.”
“아무리 제우스 님이시라도 저승의 의견은 듣지 않고..”
“구름 위에 있는 신들에게 지하 세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인가?”
순식간에 저승의 연회장이 올림포스의 결정을 성토하는 자리로 변하자 무지개를 관장하는 아름다운 여신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간다.
나는 이 자리의 신들을 쭉 둘러보았다.
스틱스 강을 넘어오는 영혼을 안내하고 저승을 관리하는 하급 신들, 밤낮으로 수많은 영혼을 거두느라 고생이 많은 죽음의 신, 타나토스.
타나토스에게 부탁을 받아 깊은 잠을 불러일으켜 영혼의 수확을 돕는 그의 쌍둥이 형제이자 잠의 신, 휘프노스.
“대홍수로 인한 사망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죽음이 아닌가, 모로스?”
“무슨 소리, 인간들 대다수가 파멸할 때까지 징벌할 가능성이 높으니 네 담당이다. 케레스.”
타나토스와 같은 닉스의 자식이면서 또다른 죽음의 신들인 모로스(Moros)와 케레스(Keres).
“갑자기 너무 많은 영혼이 밀려와 강물이 말라버릴 지경이 되면 어떡하죠?”
밤의 여신 닉스의 손녀인 망각의 여신 레테(Lethe).
레테 강의 이름은 그녀에게서 따온 말이다.
“티탄 신들과의 전쟁에서 제일 먼저 달려온 대가가 이런 푸대접이라니.. 제우스 님도 너무하시네요.”
그리고 저승의 과중한 업무를 보다 못해 자발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선 스틱스 여신까지.
익숙하지도 않은 서류 작업을 맡았던 그녀가 울상이 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승의 왕은 분명 나지만 이들의 노고와 고충을 무시할 수는 없다.
눈을 감으며 조용히 한 손을 들어올리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이리스에게 전달할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
“하명하십시오, 하데스 님.”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잔뜩 주눅들어 한쪽 무릎을 꿇은 이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왜 올림포스에서는 대홍수에 대한 사실을 미리 전달하지 않았지?”
“그것이.. 인간들의 패악질이 너무 급속하게 심해진 까닭에 미처 언질을 드릴 시간도..”
아니야, 제우스는 애초에 인간들을 쓸어버릴 구실을 만들기 위해 판도라의 상자를 보낸 거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뒤부터 사악한 것들이 지상에 퍼져 저승으로 오는 영혼들이 급속도로 증가했어.
그 쪼잔한 제우스라면 분명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나눠준 것에 대한 징벌의 의미로 인간을 벌하려고 미리 생각했겠고..
그리고 그 구실로 인간들이 패악질을 일삼도록 일부러 판도라를 만들었을거다.
* * *
저승으로 오는 영혼을 관리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책임이니 대홍수로 늘어날 업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다만, 올림포스에서 나를 무시하고 인간들을 쓸어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불쾌하군.
아무리 신들의 왕은 제우스라 해도 우리 저승이 이런 중요한 안건을 상의가 아닌, 통보로 전달받아야 하는가?
제우스에게 다시 돌아가 전해라, 저승은 올림포스의 결정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 이리스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
“또 전달할 말이 있나? 무지개의 여신?”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승의 주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달하겠습니다..”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 짜증이 났는지 힘의 방출에 바닥이 갈라지고 몸에서 음산한 신력이 뿜어져 나왔다.
괜히 전령한테 화풀이를 한 셈이 되어버린 것 같아 표정을 관리하고 적당히 축객령을 내렸다.
자신의 권력에 민감한 제우스라면 내 뜻을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다.
여신 이리스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연회장을 나갔다.
그제서야 연회를 잠시 멈춘 다른 신들이 움직이며 대홍수로 인한 저승 포화의 사태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대홍수가 끝나고 생명이 다시 생길 때까지 머무를 장소를 추가로…”
“타나토스, 대홍수가 밀려올 때까지는 조금 쉬엄쉬엄 해라. 영혼을 데려오는 업무를 좀 더 돕도록 하지.”
“역시 내 동생밖에 없군. 그럼 부탁하겠네, 휘프노스.”
“케레스, 우리도 움직이자고.”
“모로스, 손에 든 넥타르나 내려놓고 말하지?”
제일 불쾌했던 사실은 이리스가 전달한 대홍수를 저승의 왕인 나와 미리 상의하지 않은 점.
대비할 틈도 없이 갑자기 대홍수와 같은 재해가 일어나면 저승의 공무원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겠지.
미리 저승과 상의라도 했었다면 휘하의 영혼들을 교대로 일에 투입하던가 최소한 그들에게 미리 알려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을 가지게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생각해보니 더 짜증나네.
저번에 기간테스랑 싸울 때도 난 직접 올림포스로 가서 도와줬는데 말이지.
* * *
이곳은 올림포스 신궁.
구름 위의 황금 옥좌에서 지상을 굽어보는 제우스는 이리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꽤나 격 높은 신인 이리스가 창백하게 질려올림포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이어진 그녀의 보고를 듣고서는 납득했다.
“그리하여 하데스 님께서 굉장히 격노하시며 올림포스의 결정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내가 형님을 잊고 있었군…!”
왜 자신은 죽은 영혼들을 관리하는 하데스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숫제 식은땀까지 흘리는 이리스를 본 제우스는 이번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저승의 의견을 듣지 않고 대홍수를 일으킨다는 결정을 내렸으니 하데스가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낄 만도 했었다.
힘도 없고 영향력도 형편없는 다른 신이 감히 자신의 결정에 불복하거나 불만을 토한다면 권위로 찍어누르면 될 일이지만..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3주신 중 하나, 그것도 티탄 신족을 가둔 타르타로스 근처에 거주하는 신이라면 더욱 신중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천공을 다스리며 신들의 왕이라고 칭하는 제우스지만 그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자가 없지는 않았기에.
“제우스! 또 다른 여신이 좋다고 뛰쳐나간 건가요?!”
지금 막 이쪽으로 날아와 팔짱을 끼며 씩씩대는 자신의 오누이이자, 아내인 헤라 역시도 그러하다.
“아니, 그것은 오해요. 다른 여인들에게 잠시 한눈을 팔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이 제우스의 옆자리에 있을 만한 자는 그대뿐인 것을…”
“한눈을 팔 수도 있어요?! 으드득.. 방금 또 이리스를 꼬드기려 했었죠?”
제우스의 정실부인, 헤라가 관장하는 영역은 결혼과 가정.
아무리 제우스가 신들의 왕이라고 해도 바람이나 외도에 관해서는 그녀에게 물러줘야 하는 부분이다.
“아니오! 이번에는 정말로 오해요. 저승에 있는 하데스 형님께 대홍수에 대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는 신들의 왕.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헤라의 눈살은 점점 더 찌푸려져 간다.
“신들의 왕이라는 자가 매일 여신들을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 다른 신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간단한 이치도 잊어먹는 게 아니겠어요?”
“그것이.. 으음. 내 실수가 맞소. 저승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흥. 그렇게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면 메티스(Metis)의 딸에게 물어보시죠.”
“메티스의 딸이라면.. 옳거니, 이리스는 아테나를 데려오거라.”
크로노스에게 구토약을 먹여 신들을 토해내게 한 제우스의 사촌이자 첫 번째 아내인 메티스.
그녀와 제우스의 결혼은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Athena)의 탄생을 불러왔다.
메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제우스의 권좌를 위협할 것이라는 예언은 딸인 아테나가 태어남으로서 빗나가게 되었고,
아테나는 현명한 지혜의 여신답게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예언이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제우스를 안심시켰다
바로 스틱스 강에 맹세해 영원히 처녀성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제서야 제우스는 모든 의심을 멈추고 그녀를 무척 사랑하고 예뻐했다.
“아버지, 부르셨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제우스 앞에 무지개가 생기며 그 안에서 이리스와 아테나가 함께 걸어나왔다.
아테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황금빛의 단단한 투구와 갑옷, 창과 방패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발머리가 빛나는 아름다운 여신의 미모는 감춰지지 않았다.
고귀하고 현명한 지혜의 여신에게 제우스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하여 네 지혜가 필요하다. 좋은 의견이 있다면 들려다오.”
제우스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아테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꺼냈다.
“아버지께서는 큰아버지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걸 판단하기 어려우니 너를 부른 것이 아니냐. 기탄없이 말해보아라.”
제우스의 말에 갑옷을 차려입은 지혜의 여신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헤라와 이리스 역시도 조용히 그녀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이번만큼은 아버지께서 직접 저승으로 내려가 사과하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뭣이?! 이 제우스가 직접?!”
헤르메스나 이리스 같은 전령신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왕은 당황했지만 그가 아끼는 적장녀의 말을 계속 들어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지혜의 여신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왜 더 이상 말이 없느냐? 나의 사랑하는 딸아.”
“죄송합니다. 인간들의 사소한 패악질이 점점 심해져 결국에는 대홍수를 일으켜 멸망시켜야만 하는 이 사태에 대해 잠시 고심하느라..”
인간들의 패악질은 제우스 자신이 판도라의 상자를 통해 일부러 유도한 것이다.
그들이 부리는 선을 넘은 행패는 제우스에게 대홍수를 일으킬 명분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할 필요는 없다.
지혜의 여신이라는 아테나가 주신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빠질 정도로 아둔하지도 않고.. 그렇다면..
“큰 문제가 벌어지기 전에 차라리 과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조치로 미리 해결하는 편이 좋다? 이것이 네가 하고 싶은 말이냐?”
아테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곧 일어날 대홍수는 분명 제우스의 의도에 맞게 인간들이 선을 넘었고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하데스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언젠가 반기(叛旗)를 든다면?
여태까지 제우스가 보아온 그의 큰형은 사소한 일로 격분하여 자신과 싸움을 벌일 성격은 아니였다.
그러니 격노했다는 이리스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 저승의 왕으로서 올림포스에 항의를 한 것이겠지.
하데스뿐만 아니라 저승의 다른 신들에게도 민심을 잃어서는 그의 권좌가 위험했다.
특히나 저승 근처에 있는 타르타로스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직도 고민하고 있나요, 제우스? 바람을 피러 다닐 시간은 있고, 저승을 다독일 시간은 없다는 소릴 하는 것은 아니겠죠?”
헤라의 말이 깊게 고민하던 제우스에게 쐐기를 박아넣었다.
“좋소. 내가 직접 하데스 형님을 찾아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리다.”
그러고 보니 저승에 사는 형제를 만난지도 오래 되었으니 이참에 회포를 풀고 오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