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75)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75화(75/82)
조금은 달라진 테베의 이야기 – (2)
“광기에 잠식된 첩자다! 죽여라!”
“으아아아! 흐아아!”
카캉! 챙!
이곳은 어느새 창칼이 난무하는 싸움터로 변했다.
눈이 붉어지며 병사들에게 달려든 남성이 그 근육을 십분 활용해 병사 하나를 베어넘겼기 때문.
촤아악-
붉은 피가 평온하던 방 안에 뿌려지고 사방에 놓인 가구들이 부서진다.
필라토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거는 단 하나, 남자의 상태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과 병사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해 보인다는 것.
“으아아아!”
“큭. 힘이!”
“사제님! 놈을…”
그는 빠르게 병사들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빠르게 광인의 뒤로 돌아간 필라토스는 허리춤의 칼을 뽑고 높게 들어올렸다.
평소 단련한 검술의 초식대로 미쳐버린 남성의 어깨를 거세게 내리치는 그.
숫돌로 잘 갈아둔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이며 싸늘한 빛을 내뿜는다.
“흡!”
푸확-
스파르타에서도 유명했던 그의 괴력에 근육질 남성의 팔이 잘려나가며 피분수를 일으킨다.
허나 광기에 빠진 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달려든다.
다시 칼을 회수해 휘두르려 하지만, 너무나 가까이 다가온 광인.
필라토스는 기이할 정도로 강한 괴인의 힘에 놀랐다.
“크윽!”
간신히 칼로 광인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것뿐.
한쪽 팔이 잘린 놈이 이토록 강한 힘을 쓸 수 있는 것인가?
이대로 타나토스를 만나야 하는 것인지 이를 악문 그였지만…
“흐아아! 아…”
털썩.
갑자기 광인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며 힘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을 내밀던 한 사제의 입이 열렸다.
“휘프노스 신의 권능을 영원히 버틸 수는 없지요.”
잠의 신, 휘프노스의 사제였구나.
광인은 그 자리에서 병사들에게 끌려갔지만, 그는 아직 경계받고 있었다.
“쯧. 한동안 안 오더니만.. 하기야 슬슬 올 때가 되었으니..”
중년 사제가 그에게 신비로운 돌을 내밀었다.
“마지막이 자네인가? 어서 돌에 손을 올려놓게, 멀쩡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으음… 알겠소. 나는 맨정신이니..”
파아앗-
앞서 통과한 이들과 같은 하얀 빛. 광인의 증거인 붉은 빛이 아니다.
작게 안도하는 필라토스와 경계를 푸는 병사들.
“지금부터 내가 이들을 안내하겠네. 자네들은 이제 볼일 보게.”
“예. 사제님.”
“그럼 저희도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 이상한 시험에 통과한 이들은 고작 셋.
그들은 병사들을 모두 물리고 셋을 혼자 안내하는 중년의 사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대체 이 이상한 시험은 무엇이고, 광인은 또 뭐였을까?
영웅이 되려하는 자들에게 신들은 왜 이런 시험을 치르게 만들었을까?
* * *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신전 제일 깊숙한 곳의 방 안이였다.
이곳까지 오는 데에 삼엄한 경비를 거친 셋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자, 모두 이 양피지를 보게.”
“이것은 또 뭡니까?”
“세번째 시험일세. 그 양피지를 잘 읽고 거기 적힌 모든 내용을 지키겠다고 스틱스 강에 맹세하면 되네.”
“뭐.. 뭐라고요?! 스틱스 강이요?!”
“아니, 이거 꼭 필요한 겁니까?”
스틱스 강에 맹세는 절대로 어길 수 없는 불변의 법칙.
그런데 이 양피지에 적힌 제약은 너무 많았다.
“지금부터 보고 들을 모든 것에 대한 발설 금지에, 글이나 그림 등 간접적으로 알리는 것도 불가능…”
“한번 서명하면 영웅으로서 발걸음을 내딛기 전까지는 통제에 따라야 한다? 거기에…”
“저, 저는 안되겠습니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시험에 통과한 셋 중 하나가 손사레를 치더니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른 이 역시 너무 많은 금지 조항을 살펴보다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래, 둘은 거절했군. 그럼 테베에서 지금까지 받은 시험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알리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가면 되네.”
“…알겠습니다. 저는 이 ‘시험’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것을 스틱스 강에 대고…”
“저 역시…”
둘이 돌아왔던 길로 나갔지만 필라토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영웅이 되고자 스파르타에서 그 먼 길을 걸어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난 이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지킬 것을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하겠소.”
“오호… 그래도 한 사람 영웅이 있었군. 물론 아직은 아니지만…”
“그런데 이제 맹세도 했는데 여태까지의 과정에 대해 알려줄 수는 없겠소?”
그의 질문에 중년의 남성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알려줄 수는 없지만… 아까 자네가 보았던 돌은 디오니소스 신의 힘이 깃든 돌이네.”
“광기의 신의 힘이…?”
“물론 멀쩡한 사람을 광기에 빠뜨리는 것은 아니고, 이미 광기에 잠식된 자들이 견딜 수 없도록 하는 물건이지.”
“그래서 첩자라는 표현을 썼구려. 무슨, 다른 신이라도…”
“예전에 그리스 전역에 나타난 뱀 괴물에 대해 알고 있겠지? 그쪽에서 보낸 첩자라고 생각하면 되네.”
뱀 괴물, 기가스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리스 전역에서 신전을 부수고 영웅이나 반신을 죽인 강력한 괴물들에 대해서는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괴물이 인간을 광기에 빠뜨려 첩자로 써먹는다?
분명 신들 간의 복잡한 싸움에 휘말린 것일 터.
“젠장… 신들의 일에 관여하면 안되는데… 어쩔 수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거…”
“허헛. 잘 생각했네. 근 한달만에 드디어 한 명 나오는구만.”
중년의 사제가 방 안쪽 문을 열었다.
아래로 향하는 돌계단이 그들의 앞에 보였고 양 벽면에는 횃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있었다.
“이리로 날 따라오게.”
“무슨 의식이라도 하는 장소같군.”
“일단 날 따라와보면 아네, 허허.”
터벅. 터벅.
그리하여 지하 어딘가에 도달한 필라토스의 눈에는…!
고오오오-
딱 보아도 심상찮은 기류가 요동치는 공간, 아니 균열이 나타났다.
공간이 통째로 깨져 어딘가로 이어진 것처럼 검은빛을 내뿜는 균열이 사람 몇은 지나갈 정도의 크기로 열려있었다.
“이… 이게 뭐요?! 난생처음 이런 것은 처음보는데…! 올림포스 신의 힘인가?”
“저승으로 가는 문이네. 이 안으로 들어가면 자네는 영웅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을 수 있어.”
“저.. 저… 저승?!”
저승. 혹은 명계.
플루토 신의 권역인 그곳은 죽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 아니였던가?
이곳에서 영웅을 육성한다니. 플루토 신전의 지하에 이런게 만들어진 까닭이…
멈칫거리는 그에게 사제의 조언이 들려왔다.
“발설 금지의 조약이 붙은 스틱스 강의 맹세도 하였으니 나는 강요하지 않겠네.”
“으음!”
“그저 자네가 영웅이 될 재목이라면 이것을 통과해 넘어가겠고, 아니라면 포기하겠지.”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도 쉽사리 발을 뗄 수 없는 필라토스.
저승에 어떻게 산 자가 넘어간단 말인가.
“하지만 저승의 음식을 먹으면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오?”
“물론 자네들이 먹을 음식은 이승에서 일정 주기별로 갖다놓는 것이지.”
“저편에는 이승에서 가져온 음식들이 한가득 쌓여 있겠군.”
영웅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꼭 저승에서 수련을 해야 할까?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도…
“…다른 이들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이오?”
“물론. 여기까지 온 누군가는 포기하고 누군가는 저 안에서 훈련을 받고 있지.”
“플루토 신이 자신의 권역에서 직접 영웅을 육성하다니 이게 무슨…”
아연실색하는 그에게 태연한 기색의 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큼 신들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이 아니겠나? 선택은 자네가 하는 것이네.”
“저승으로… 으음…”
이 사제가 그를 속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플루토 신의 신도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저승에서의 심판.
이승의 죗값을 공평하게 저승에서 치룬다고 믿는 플루토의 신도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간다.
영웅이 되기 위한 한 발자국.
“…저승으로 가겠소. 나는 기필코 영웅이 되어 그 기가스라는 것도 죽일 것이오!”
“오호. 무운을 빌지.”
기이한 공간의 틈새가 점차 가까워지고 그는 이를 악물며 발을 내딛었다.
* * *
스아아아-
균열을 통과한 필라토스는 저승의 풍경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저승인가?!”
그가 상상했던 저승과는 다른 느낌.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죽음의 공간을 각오하고 발을 디뎠으나,
사방에 돌로 이루어진 협곡과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심지어 어느 정도 빛도 비추고 있었다.
바닥에는 초원처럼 녹색 풀이 자라고, 심지어 나무도 있는 공간.
너무나도 저승답지 않은 느낌에 그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죽고 엘리시온으로 온 것인가…?!”
“물론 아니지! 하하! 진짜 엘리시온은 이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면 반투명한 켄타우로스 하나가 보였다.
죽은 망자임이 분명한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필라토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다… 당신은?”
“나는 케이론이라고 하네. 이제부터 자네의 선생이 될 켄타우로스지.”
“현자 케이론?!”
케이론의 위명은 그가 죽고 나서도 여전했다.
이제서야 왜 저승에서 영웅을 육성하는지 깨달은 필라토스.
“헌데 이곳이 저승이 맞습니까? 어째서 이승과 비슷한 풍경이…”
“그야 생자들이 저승에 적응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신 봄의 여신을 비롯한 여러 신들께서 힘을 써주셨기 때문이지. 저기 보이는 결계의 끝만 넘어가지 말게.”
“페르세포네 여신께서… 그렇군요.”
과연 저 너머에 보이는 공간부터는 온통 검은 공간으로 가득한 저승의 풍경이 보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 경계를 넘어간다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이승에서 온 영웅 지망생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이 협곡 주변뿐이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공간으로도 충분하다.
현자 케이론이 직접 가르쳐준다니, 테베로 오길 잘했구나!
그런데… 그 감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았다.
슈웅- 콰앙!
“커어어억!”
저 멀리서 날아온 한 인영이 피를 뿌리며 바위에 처박혔기 때문에.
방금 날아온 자는 그와 같은 영웅 지망생으로 보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필라토스의 눈에 보이는 것은…
“크아아악!”
“아니, 죽어서 약화되었다고 들었는데 뭐 이리 강해!”
“생각 좀 해라! 우리가 아폴론 신이냐고!”
“으아아아! 좀 죽어라!”
캬아아아아!!!
“힘 좀 써봐! 너는 반신이라며!”
“아까부터 전력을 다하… 커억!”
“젠장! 프로토스가 당했어!”
콰직- 콰아아앙!
엄청나게 거대하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력한 기세를 내뿜는…
반투명한 뱀 괴물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영웅 지망생들을 꼬리로 대충 후려치고 있었다.
그저 툭툭 건드는 것뿐인데도 사람이 날아가고, 방패가 부서지는 등 난리도 아니였다.
카캉! 팅!
“이런 빌어먹을! 활을 쏴서 눈을 맞춰!”
“좀 뒈져라, 젠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며 달려드는 영웅들.
하지만 괴물에게 공격이 통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아. 저건 왕뱀 피톤(Python)일세. 하데스 신께서 영웅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빌려주셨지.”
“아니 그… 아폴론 신이 직접 죽이셨다는 피톤이 맞습니까?”
“그 피톤 말고 다른 피톤이 있는가?”
무려 신이 나서서 죽일 정도의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에 어이를 상실한 그가 질문했지만,
오히려 다시 반문하는 케이론.
“저런 괴물을 상대해야 합니까?”
“…? 영웅이 되고 싶어서 저승으로 온 것이 아니였는가?”
“하지만…”
분명 충만한 용기를 가지고 저승으로 발걸음을 내딛은 것은 맞다.
하지만… 하지만…
“아, 참고로 저승에서는 플루토 신의 은혜로 잘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
“…죽을 수조차 없다고요?”
그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