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77)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77화(77/82)
페르세포네의 후일담
페르세포네와 에로스가 저승에 온 뒤.
원래 저승에서 일하던 신들의 복지가 크게 향상되었다.
밤낮으로 활을 당기며 중죄인을 고문하는 역할을 맡은 에로스는 물론이고…
놀랍게도 페르세포네가 놀라운 열의를 보이며 저승의 일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일에 서투르면서도 열심히 다른 신들을 돕는 봄의 여신.
그저 내게 반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이유가 부족한 것 같아서 직접 다가가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서류 작업을 맡은 신들이 일하는 곳으로 가까이 가자 곧 들려오는 고통의 소리들.
양피지를 한가득 들고 다니는 신들이 비일비재했고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바삐 지나가는 신들도 보였다.
다들 고생하는구만…
“으으… 이건 대체 언제 끝내야 하는거야..”
“앗. 하데스 님 오셨습니까.”
“넥타르… 넥타르 한잔만 마시고 싶다.”
그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것은 긴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신이였다.
길다란 책상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양피지 더미를 천천히 넘겨가며 깃펜을 놀리는 조카.
도저히 생기발랄한 봄의 여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퇴폐적인 느낌이 드는데…
“페르세포네.”
“아, 하데스 삼촌…! 잠시만요. 영혼들 주거 구역에서 올라온 문서만 잠시 처리하고…”
“…? 그래.”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황금빛 눈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다니.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댕- 댕- 댕-
“으으음! 목이 뻐근해…”
“잠시만 눈 좀 붙일테니 다시 종이 울리면 깨워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산더미와 같은 양피지 더미는 줄어들고 짧은 휴식 시간이 돌아왔다.
아무리 저승이라 해도 잠깐의 휴식도 없이 일을 시키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문제없는 불노불사의 신들이긴 하지만,
점심과 저녁 시간에 휴식을 취하던 전생의 기억 덕분에 주기적으로 종을 울려 저승에 여가 시간을 주고 있었다.
물론 카론이나 타나토스, 중죄인들의 경우에는 조금 많이 다르지만…
“헛. 하데스 님?! 언제 여기에…!”
“혹시… 아. 페르세포네 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그제서야 나를 알아본 신들이 예를 갖추려 하지만 손을 내저으며 페르세포네를 바라보았다.
신들이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고, 나는 여신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누가 너에게 저승에서 일하는 것을 강요하더냐?”
“네? 아니요?”
“그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지? 너는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딸이니 편의를 봐줄 생각은 있는…”
“피… 하지만 업무에 서투른 여신은 하데스 삼촌 취향이 아니잖아요? 저는 그저 노력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건 또 당최 무슨 소리니. 내 취향에 언제부터 워커홀릭이…
페르세포네가 가슴을 쭉 피며 어딘가를 강조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스틱스 여신님도, 그 멘테라는 하급신도 그러던데요?”
“…?”
“고작 이 정도도 못하면 눈길도 안 주신다는데요. 하데스 삼촌을 노리는 여신들도 다들…”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거야?
그렇다고 내가 일일히 여신들을 찾아다니면서 정정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애초에 너는 주기적으로 저승의 외곽에 힘을 불어넣어야 하는 일을 맡고 있으니 쉬어도 문제없…”
“달라요! 그건 포상이고, 이건 경쟁이죠!”
“…?”
“흥~ 흥~ 사소한 것이니 몰라도 돼요. 삼촌. 히히!”
댕- 댕- 댕-
“앗, 다시 일할 시간이다! 나중에 저녁때 봐요!”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 * *
“…그럼 이건 므네모시네 여신님께 맡기고… 내가 결제할 사안이 더 있나?”
“방금 말씀하신 것이 마지막입니다. 하데스 님.”
“좋아, 모르페우스 자네도 이만 돌아가서 쉬게. 내일부터 또 고생해야 할 테니까…”
끼익.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이제 조금 쉬려는데 알현실의 문이 슬쩍 열리더니 한 여신이 들어왔다.
아까 내가 찾아갔던 조카, 페르세포네가 들어온 것.
“스틱스 여신님도… 레테 님도 없고… 히히!”
“…? 페르세포네?”
이승의 필멸자들이 간식거리로 먹는 대추야자와 무화과 등을 들고 온 그녀.
페르세포네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옥좌 옆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삼촌, 할 일 없으시면 저랑 얘기라도 하실래요?”
“그런데 이제 이승으로 슬슬 올라갈 때가 되었지 않았니?”
이제 데메테르와 약속한 때가 되었다.
사실 기한이 좀 더 지난 것 같은데…
“저는 저승도 좋은데… 싫어요오! 조금만 더 있다가 갈래요…!”
볼을 부풀리며 귀엽게 투정부리는 조카.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올라가야 할 텐데. 네 엄마가 걱정하지 않으려나.
최근 몇 개월 동안 그녀 덕분에 저승의 일이 상당히 편해졌으니 잠깐의 시간을 내주는 것 정도는…
뭐, 적당히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돌아가겠지?
“잠시 동안이면 상관없겠지만…”
“헤헤… 그럼 삼촌, 제 얘기 먼저 들어보실래요? 제가 이승에 있었을 때…”
이승의 님프들과 에트나 산 근처에서 놀며 내기를 한 이야기…
신들에 대해 추측하며 즐겁게 대화한 이야기, 그녀의 어머니이자 나의 형제, 데메테르에 대한 이야기 등…
페르세포네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의외로 베짜기나 연극 관람 같은 정숙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에.. 너무 저만 말하는데요. 삼촌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
“마음에 드는 여신의 외모라던가, 아니면 이성에게 매력적인…”
눈을 반짝이며 질문하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얘는 또 뭐라는 거니…
“그런 거 없다.”
“…치이. 아니면 옛날 이야기라도 해주세요! 삼촌은 오래 사셨으니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잔뜩…”
오래 산다고 뭐가 좋겠냐만… 네 말대로 아는 이야기는 제법 많구나.
태초부터 존재하던 아버지 크로노스의 이야기부터…
“너는…”
“네?”
“너는 올림포스 산의 정상에 올라가 본 적이 있느냐?”
“어어.. 딱 한번 있어요! 올림포스에는 엄마가 많이 데려가주질 않아서…”
“…나는 그 풍경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려 눈을 감았다.
페르세포네는 내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내가 태어나 올림포스 산의 정상에 처음 올라간 순간…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오래도록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을 때…
티탄 신족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이유.
우리 모두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이유는 바로 그 야망 때문이였다.
지금은 제우스가 다스리는 하늘을 모두가 노리던 이유 역시 그것 때문이였지.
그래, 저 드높은 하늘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는 전능감…
그때를 기억하며 페르세포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와아… 모두가 초탈하다고 말하는 하데스 삼촌도 그런 시기가 있었네요.”
“그때는 그랬지. 저승을 다스리다 보니 이곳이 점차 좋아졌지만.”
잠시 과거의 일을 되새기며 페르세포네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이제 정말로 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니? 조카야?
그리 생각하던 도중, 알현실의 문이 열리더니 전령이 뛰어왔다.
“하데스 님!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님께서 페르세포네 님을 받아가겠다며 찾아오셨습니다!”
데메테르가 직접 왔다고?
아무리 그녀의 딸이 조금 늦게 이승으로 올라온다 해도…
대지의 여신이 직접 움직일 정도는 아닐텐데.
“무언가 내게 직접 할 말이 있어서 왔겠군. 알현실로 안내해라.”
그 이야기를 듣고 페르세포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 네 엄마가 오기 전에 조용히 도망칠 모양이구나.
“어.. 음.. 그럼 하데스 삼촌, 업무가 바쁘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헤헤..”
“데메테르와 마주쳐 잔소리를 듣는 것이 싫다면 다음부터는 제 시간에 이승으로 돌아가라…”
* * *
그녀가 이승으로 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이 도착했다.
짐짓 싸늘해 보이는 무표정한 인상과 화려한 외모, 연갈색과 노란빛의 아름다운 머릿결.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저승에 온 것이다.
“하데스, 내 딸은…”
“방금 네게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도망쳤다. 아마 지금쯤 이승에 올라가 있겠지.”
“…그래.”
역시나 예상했다는 듯, 데메테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딸이 이곳에 없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걸 보아 할 말이 있구나.
신력을 움직여 주변의 소리를 차단한 대지의 여신이 작게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나와 눈을 마주하던 데메테르의 고개가 옆으로 슬쩍 돌려졌다.
“…내가 왜 코레에게 이리도 극성인 줄 아느냐?”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약간의 슬픔이 느껴지길래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돌아오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어나간다.
“내 딸, 코레는 너무 아름답다. 단 한번이라도 얼굴을 마주한 자들은 코레의 외모를 칭송하지.”
저번에 헤파이스토스가 말했던 것처럼 페르세포네는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보다 확실하게 미모가 뛰어난 여신이라고 해봐야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뿐.
미를 관장하는 여신 정도가 아니면, 페르세포네의 미모와 비견될 이는 거의 없다.
데메테르가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이 그리스에서 아름답다는 것은…”
“그래, 축복이 아닌 저주지. 나도 잘 알고 있다.”
강간과 불륜, 비열한 수작이나 속임수를 써 관계를 맺는 무뢰한들이 넘치는 그리스에서…
아름다움은 축복이 아닌 저주. 아프로디테 역시 그 미모 때문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었지.
페르세포네는 어머니의 지나친 과보호를 갑갑해하지만,
그런 데메테르가 없었더라면 진작 험한 일을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 딸에게 추파를 던지는 이들은 셀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고, 아버지는 제우스인데도 말이야.”
“페르세포네는 아름다우니까.”
“이대로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였지. 나는 항상 그 아이를 걱정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물론이고,
데메테르도 페르세포네 옆에 계속해서 붙어있을 수는 없다.
“…저승의 주인이내 딸에게 한눈에 반하여지하 세계로 납치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내가 페르세포네를 저승에 계속 데리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데메테르의 입에서 나왔다.
이승의 인간들에게서 내가 에로스의 화살을 맞고 조카에게 반해 납치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일부러 잘못된 소문을 정정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알려질수록…
“하데스. 네 덕분에 코레에게 접근하던 자들이 사라졌다. 감히 저승의 주인이 점찍은 이를 건드릴 머저리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그녀의 눈에는 고마움이 묻어나왔다.
“네가욕구에 미친 다른 남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코레가 아직까지도 순결을 유지하고 있으니…”
“……”
“너와 그 아이가 결국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코레를 잘 부탁한다.”
대지의 여신이 아닌, 딸아이를 가진 어머니로서의 부탁.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데메테르의 눈을 슬쩍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만 이승으로 돌아가야겠다. 오늘 일은 코레에게는 비밀로 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