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79)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79화(79/82)
벨레로폰의 이야기 – (2)
페가수스를 데리고 엘리시움을 나와 성채로 돌아오니 스틱스 여신님이 반겨주셨다.
내가 자리를 잠시 비운 틈을 타서 급한 일들을 처리하시고 잠시 쉬고 계신 모습.
“이제 왔나요. 하데스… 페가수스를 데리고 왔군요.”
푸르륵!
월권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티탄 신족과의 전쟁에서 우리를 도와주신스틱스 여신님에게 감사의 의미로 권한을 부여한 것은 바로 나.
그렇기 때문에 종종 내가 저승에 없으면 여신님이 최종 결정권자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여신님의 독단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잠시 보류하고 나를 기다려 주셨지만.
“이제 이걸 영웅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헤르메스나 아테나를 시킬까 하는데…”
“올림포스로 서신을 보낼까요?”
“예,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데 스틱스 여신님의 모습이 눈길에 잡혔다.
긴 흑발의 머리카락과 피곤함이 묻어나는 푸른 눈동자. 손에 들린 양피지.
생각해보니 여신님께 정말 많은 신세를 졌구나.
아주 오래전, 티탄 신족과의 전쟁 때… 저승의 일을 도와주시고 내가 미숙했던 시절을 지탱해 주시기까지.
허리춤에 매여 있는 스틱스 검의 감촉이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진다.
스틱스 여신님을 비롯해 레테 여신님, 멘테나 페르세포네…
부족한 나를 좋아해주는 고마운 이들이지만 내가 변변찮은 보답을 한 적이 있었던가?
여신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신뢰와 믿음, 애정이 가득 차 있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여신님께서 피식 웃으며 말한다.
“풋. 하데스. 뭘 그리 뚫어져라 바라봐요? 제 미모에 넋이 나가기라도 했나요?”
“…네. 오늘따라 아름다우시군요.”
“네…?! 네헤엣?! 뭐…뭐라…”
스틱스 여신님의 손에서 양피지가 툭 떨어지며 얼굴이 귀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한 손을 들어올려 입을 가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
그리고 나 역시 조금은 긴장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산책일 뿐이야… 그래, 보답. 그런거다… 별 의미는 없어… 아마도.
“페가수스가 이승으로 나가는 김에 저와 함께 하늘을 돌아다녀 보시겠습니까?”
“흐읍!… 다… 다… 당장 준비하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도도도… 콰직!
황급히 날 스쳐 지나가며 말을 남긴 여신님의 발끝에 알현실 문이 걸렸다.
물론 강건한 신의 육체에 걸린 문의 일부는 그대로 부서졌다.
조금 부서진 문의 잔해가 알현실 바닥에 널부러진 것을 보며 드는 생각은…
‘나도 옷이라도 갈아입어야 하나?’
* *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스틱스 여신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나가서 알아봐야 하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다급한 기색의 스틱스 여신님이 뛰어왔다.
그녀는 방금까지 누군가에게 쫒기기라도 한 듯 허리를 굽히며 손을 무릎에 대고 헐떡거렸다.
그 누가 감히 저승에서 스틱스 여신을 이토록 다급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지?
설마 기가스와의 전면전이라도 일어난 것인가?
“헉… 헉… 어서 나가요. 하데스…!”
“무슨 일이십니까? 올림포스에서 전쟁이라도 터졌답니까? 아니면 포세이돈이 또 반란이라도…”
“그게… 헥.. 아니라… 레테 여신이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자꾸 따라다녀서 저승을 한바퀴 돌았거든요… 헤엑.”
“…일단 물이라도 한잔 하시지요.”
스틱스 여신님의 말을 천천히 들어보면…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스틱스 여신님을 발견한 레테 여신님이…
“스틱스… 어딜 가려고 그렇게 입어요..?”
“레.. 레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가 수상해요…”
그때부터 한동안 졸졸 따라다녀서 업무를 한가득 안겨주고야 벗어날 수 있었다고.
작게 한숨을 내쉰 스틱스 여신이 설명을 마쳤다.
“으으… 레테가 얼마나 끈질기던지…”
“그리 옷을 입고 계시니…”
방금까지 입고 있던 평복과는 달리, 가슴팍과 다리가 상당히 노출된 키톤을 입고 있는 그녀.
올리브 오일과 벌꿀을 바른 얼굴은 윤기가 감돌았고, 살짝 달아오른 귀에는 황금 장신구가 걸려있었다.
“…하데스.”
“…네?”
“그렇게 너무 바라보시면…”
살짝 달아오른 홍조까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미모를 나타냈다.
“저와 함께 나가주시겠습니까. 여신님.”
“…! 물론이죠.”
그렇게 스틱스 여신님과 함께 잠시 이승으로 나왔다.
물론, 페가수스도 데려왔고.
히이잉!
오랜만에 이승에 나온 것이 기쁘다는 것처럼 한동안 주변을 뛰어다니던 페가수스.
나는 천마를 멈춰세운 다음, 말의 등에 올라타 스틱스 여신님께 손을 내밀었다.
“이리 타시죠.”
“…네!”
내가 페가수스의 고삐를 잡고 올라탔고, 바로 뒤에서 스틱스 여신님이 내 배를 감싸며 머리를 기댄 형국.
부드러운 감촉이 등에서 닿을 듯 말 듯하며 어색함을 가중시킨다.
페가수스의 윤기나는 하얀 갈기를 쓰다듬으며 명령했다.
신수로 태어난 영민한 천마는 내 뜻을 알아듣겠지.
“올라가자. 저 하늘 위로, 하지만 올림포스까지 닿지는 않을 정도로만.”
히이잉!
* * *
페가수스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말의 새하얀 날개가 크게 펄럭이며 바람을 일으켰다.
후웅-
위로, 더 위로 올라갔다.
조금 떨어진 산 언저리에서 우릴 바라보는 님프들이 보인다.
손을 내저어 필멸자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가린 다음, 뒤에 타고 있는 스틱스 여신님께 말했다.
“구름이나 전차를 타고 하늘을 질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때로는 말을 타고 바람을 느끼는 것도 괜찮더라고요. 이 광경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고보니 하데스, 당신이 티탄 신족과 싸운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했었나요?”
“예. 정확히는 올림포스의 정상의 풍경 때문이지만 말입니다. 이 경치도 비슷하니…”
히이잉!
점점 더, 구름이 우리 옆을 떠다닐 정도로 올라왔다.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올림포스 신궁과 동등한 높이.
하지만 나는 올림포스로 올라갈 생각은 없었기에 고삐를 당겼고, 페가수스는 내 의지대로 천천히 비행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보이는 것은 넓은 평원과 수많은 점으로 보이는 인간들의 도시.
“거의 항상 저승에 있어서… 이런 풍경은 많이 보지 못한 것 같네요.”
“이제는 저승의 일도 많이 안정되었으니, 종종 시간이 나실 겁니다.”
“…고마워요. 하데스와 함께해서 그런가 하늘의 외유도 즐겁네요.”
슬쩍 뒤를 돌아보자 내게 가까이 붙은 스틱스 여신님의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천천히 눈을 감는 그녀.
누구라도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리라.
붉고 고운 여신의 입술. 만약 이 한 발자국을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유유히 천공을 날아가던 페가수스를 정지시키고 고개를 돌려 천천히 다가갔다.
점차 커지는 심장 고동소리가 제우스의 천둥보다도 크게 들렸다.
주변에 시끄러운 바람 소리, 새 소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내 눈과 귀는 오직 가까이 있는 여신에게만 집중될 뿐.
“후우…”
어쩐지 조급하지만 거칠게 들리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나 역시 남성이라 나를 좋아해주는 여신님들이 싫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것도 한 명의 여신도 아니고 여럿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는 내 편견이며, 두려움이고, 망설임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게 갈등에 휩싸여 주저하던 그 때, 명백히 인위적인 돌풍이 불어왔다.
휘우우웅-
“어맛!”
“음?!”
페가수스가 그 돌풍에 휘말려 비틀거린다.
자연히 눈을 감고 있던 스틱스 여신님과 망설이던 내 몸도 흔들렸다.
비틀거리는 페가수스를 조종하느라 한 손에 쥔 고삐에 힘이 들어갔고,
다른 손은 위태로워 보이는 여신님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거센 바람에 가까이 붙어있던 우리는…
쪽.
부드럽게 맞닿는 입술의 감촉. 달콤한 벌꿀의 향기와 함께 느껴지는 여신의 채취.
하늘 위에서 일어난 사소한 사고는 내 등을 떠밀었다.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눈을 뜬 여신은, 곧 더욱 커지는 동공을 숨기지 못했다.
나 역시 붉어지는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휘이이잉-
누가 갑작스러운 돌풍을 불러왔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고개를 끄덕이며 날아가는 남신이 멀리서 보였기 때문에.
따뜻함과 비를 가져오는 바람의 남신, 에우로스(Euros).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이자 동풍을 담당하는 그가 벌인 일이였다.
아마 세상에 동풍을 불어주기 위해 지나가던 찰나, 우리를 보고 적당한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겠지.
네가 무슨 중매의 신이냐…
* * *
이제 슬슬 돌아가려는데 어디론가 날아가던 전령신과 만났다.
헤르메스가 페가수스에 탄 우릴 보더니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한다.
“어라? 하데스 큰아버지 아니십니까? 그리고 그 뒤에는 스틱스 여신님?”
“…헤르메스.”
“하늘에는 어쩐 일로… 아! 설마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고 계셨던 겁니까? 이런, 제가 방해를 했군요. 하하!”
“……”
나와 스틱스 여신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야 아직도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남아있는데…
“…정말입니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페가수스의 고삐를 줄 테니 그 영웅에게 가져다줘라.”
“네? 아… 페가수스를 빌려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페가수스는 지상에 내리면 풀어줄테니 네가 알아서 적당한 곳에 데려다놓고.”
키마이라를 죽일 영웅이 페가수스를 다룰 수 있을지 시험해야지.
그가 고삐를 쥐고 페가수스 위에서 버틴다면 능히 빌려줄만하니까.
“네, 저도 그럴 생각이였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정말 무슨 일이라도…”
“…시끄럽다.”
쓸데없이 눈치만 빠르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