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8)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8화(8/82)
생명의 이야기 – (3)
저승의 왕, 하데스가 다스리는 지하 세계는 오늘도 분주하다.
특히나 지금은 곧 지상을 쓸어버릴 대홍수에 대비해 모든 신들이 총동원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대홍수가 시작되면 저지대에 있는 작은 짐승들부터 먼저 죽어나갈 걸세.”
“우선 이 명부(冥府)를 살펴보았을 때 우리가 최우선으로 방문해야 할 도시는..”
“아케론 강의 뱃사공 카론이 고생하겠구먼.”
“영혼들을 시켜 이 부분을 비워두고 자리를 옮기게 해야겠어..”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대비하는 저승 관리들의 필사적인 몸부림.
그리고 그들이 올리는 모든 보고를 받으며 업무를 처리하는 나, 하데스.
대홍수로 인해 저승으로 올 영혼들의 배정과 심판, 그리고 그들이 거주할 저승의 공간 마련.
거기에 휘하 신들의 통솔과 효율적인 역할 배분 및 저승에서 일어날 각종 문제 예방책 등.
내가 손대야 할 부분은 거의 모든 부분.
각 영역을 맡은 신들의 관할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한다.
지금은 점점 잊혀져 가는 21세기의 그리스 신화 지식에서 하데스의 이야기가 적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데스님, 엘리시온 평원(Elysian Fields)쪽으로 저승의 범위를 더 늘린다면..”
“카론을 도울 뱃사공을 더 뽑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역시 올림포스에 지원을 요청드리는 편이..”
이렇게 일이 많으니까 도저히 저승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지.
참고로 엘리시온 평원이란 죽은 영혼들 중 생전 놀라운 위업을 세웠거나 선행을 보인 이들을 살게 하는 낙원이다.
그곳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는 대다수의 영혼은 나의 지하 세계에서 거주하게 되는 것이고.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이승의 평범한 초원처럼 태양도 있고 동식물도 충만한 신비의 공간, 엘리시온.
그곳에 들어간 영혼은 신들의 축복이 가득한 초원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 어떠한 물질적인 쾌락을 뛰어넘는 정신적인 충족감을 가지게 된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식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데스님! 지금 저승에 제.. 제우스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 내 집무실로 뛰어온 영혼이 밖에 제우스가 찾아왔다고 한 것 같았는데.
“주신 제우스께서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 님과 함께 저승에 방문하셨습니다!”
아까 이리스를 통해 불쾌감을 전달했지만 그 자존심 높은 제우스가 여기까지 찾아온다고?
고갯짓을 하자 영혼 병사에 의해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내가 아는 금발 머리의 남신이 나타났다.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오는 제우스와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는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
“흠. 흠. 오랜만이군, 하데스 형님.”
진짜 이 어두운 곳으로 직접 왔네.
* * *
신들의 왕이 다른 3주신이 다스리는 권역으로 직접 와 사과를 한다니.
혹시 지금 권력이 불안정하기라도 한 걸까, 올림포스에 뭔가 문제라도 생겼다던가..
“미리 대홍수에 대해 말하지 않은 내 실수야. 저 파렴치한 인간들을 징벌할 생각에 미처 형님과 상의하는 것을 잊어먹었거든.”
제우스에게 손짓해 반대편에 놓인 의자를 권했다.
이제라도 직접 사과하러 왔으니 마음이 풀리긴 하네.
“크흠. 저승의 권위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어. 이번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준비한 것들이 좀 있는데..”
“사과의 의미라면?”
“우선 대홍수 기간 동안 저승에 닥칠 과도한 업무량을 대비하여 올림포스의 시종 일부와 내 딸, 아테나를 파견하는 것과..”
오.. 이건 꽤나 좋은 소식.
일처리에 있어서 지혜의 여신은 일당백, 저승의 막대한 업무량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겠지.
“그리고 다시는 저승과 논의하지 않은 올림포스만의 결정으로 하계의 생명을 멸종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야.”
그건 당연하지. 암.
“이건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제우스가 사과를 위해 이곳 저승까지 왔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누그러진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다가 그대로 멈췄다.
스틱스 강에 대고 하는 맹세는 신들이라도 절대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효력.
그래 뭐, 반성은 하고 있는 것 같네.
아무리 제우스 욕을 해도 그는 신들의 왕으로서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물론 내가 만만한 하급신이 아닌 것도 이런 결정에 보탬이 되었겠지만.
“그리고 나와 넥타르나 한잔 하는 건 어때? 오랜만에 이야기할 것도 많고..”
나는 피식 웃으며 집무실 위에 있는 서류들을 잠시 치웠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가 눈치 빠르게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무지개에서 꺼내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좋아, 오랜만에 한잔 하자고.”
* * *
집무실에서 제우스와 내가 넥타르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자 저승 이곳저곳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주로 저승의 하급 신들이나 관리, 영혼들이 속삭이고 있었다.
“세상에.. 제우스 님이 저승에..”
“하데스 님과 형제라지만 저렇게 친분이 돈독한 사이셨던가?”
“갑자기 벼락이 떨어지는 일은 없겠지..?”
내 말을 이리스에게 듣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했나보다. 이렇게 급하게 찾아와 저승의 민심을 살필 줄이야.
“나 말고도 다른 신들이 대홍수에 대해 불만을 나타낸 적이 있었구나.”
“포세이돈이 사실 제일 문제라니까. 자꾸 내 지위를 넘보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은근히…”
제우스의 한탄 아닌 한탄을 들으면서 암브로시아를 입에 집어넣었다.
판도라를 통해 지상을 쓸어버릴 명분을 얻었지만 대홍수에 의구심을 가진 신들도 있고 반대하는 신들도 있었나보다.
하소연을 일삼는 제우스에게 말했다.
굳이 꼭 신들의 왕이라는 자리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지.
“너도 그렇고 포세이돈도 그렇고 올림포스의 주인이라는 위치 따위가 무엇이길래..”
“하하하! 혹시 하데스 형님도 이 자리가 탐나는 거요?”
제우스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입가에서 넥타르 잔을 떼었다.
네가 날 알고 나도 널 아는데 불필요한 의심을 할 이유는 없지, 그냥 농담일거다.
“농담이요. 농담. 하지만 형님도 올림포스 신궁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알고 있지 않나? 난 오히려 권력 따위에는 전혀 관심없는 형님이 신기한데.”
올림포스 신궁, 즉 구름 위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는 것.
나를 비롯해 제우스와 포세이돈 등 여섯 신들은 티탄 족과 싸우기 이전에 모두 그 경치를 보았다.
확실히 그 느낌은 정말 압도적이였다.
절대자가 보는 풍경이 이러할까,마치 온 세상이 내 손 안에 들어온 듯한 전능감과 고양감.
내가 티탄 족과 싸우기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기도 하고.
그런데 그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힘도, 직위도 있으면서 왜 포세이돈과 다르냐고 한다면..
“내가 올림포스의 황금 옥좌에 오르면 이곳에는 머무를 수 없게 되니까.”
“칙칙한 저승보다는 올림포스가 훨씬 좋을텐데.”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야 하는가?
내가 만약 신들의 왕 자리를 찬탈해 올림포스 산으로 가면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우선 내게 검을 만들어준 고마운 스틱스 여신을 자주 볼 수 없겠고..
매일 같이 영혼을 수확하느라 고생하는 타나토스 역시 올림포스로 올라오지 않겠고..
저승의 일을 도와주는 휘프노스와 모로스 & 케레스도, 망각의 여신 레테도.
마지막으로 지금 저승에 거주하며 내 통치를 따라주는 모든 백성들까지도 전부 떨어져야 하겠지.
항상 집무실 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 코스타리스는 지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죽어 기억이 지워졌음에도 환생하기를 거부했다.
저승의 연회 때마다 내 곁에서 넥타르를 따라주는 여인, 네르디스 역시 사악한 무뢰배들에 의해 험한 꼴을 당하고 사망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제우스가 잠시 내 말을 끊었다.
아마도 인간들의 사연팔이로 들어가자 많이 지루했던 모양.
그런데 황금의 남신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우스에게서 아주 오랜만에 드러나는 왕권의 신 다운 면모. 그의 진면목이 잠시 보였다.
“과연, 이제야 알겠어. 형님은 이미 진정으로 왕이기 때문에 신들의 왕 자리가 탐나지 않는 것이였군.”
그 말이 맞다. 나는 저승의 왕.
신들 중 제일의 권력자가 되는 것 따위는 지금의 내 위치에 걸맞는 소임을 다하거나 백성들을 돌보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쩌면 어둡고 칙칙하기만 한 이곳에 정이 들어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면 너도 신들의 왕으로서 무뢰배 같은 강간은 그만 좀 하지 그러냐?
강간뿐만 아니라 불륜도 대체 몇 번째냐. 그러면서 권력은 또 지키고 싶냐고.
대충 적당히 하라는 말을 부드럽게 순화하여 전달했다.
“글쎄? 나는 올림포스 신족을 번성시켜야 할 의무가 있거든. 그리고 사실 지금도 이리스의 아리따운 자태가 아른거리는..”
제우스가 짐짓 엄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이리스의 몸매를 말하는 그의 눈에는 음흉한 기색이 가득했다.
헤라가 두렵지 않은 것이냐, 제우스.
입버릇처럼 말하는 올림포스 신족의 번영이고 뭐고 그냥 제 사심을 채우는 명분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자기 누나들에 친척들까지 전부 관계를 맺을 이유가..
“으음,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거야?”
놈이 찝찝한 눈길로 내 시선을 피한다.
그냥 ‘우라노스’ 해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