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84)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84화(84/140)
망각의 여신, 레테 – (1)
오늘도 평화로운 저승.
이제 이승으로 떠난 봄의 여신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페르세포네도… 내게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
봄의 여신에게로 생각이 흘러가자 이어서 데메테르가 떠올랐다.
“너와 그 아이가 결국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코레를 잘 부탁한다.”
자신의 딸을 잘 부탁한다는 데메테르의 부탁.
내게는 조카지만… 일단 페르세포네를 생각할 여유는 아직 없는 듯 하다.
지금 결연한 표정으로 들어오시는 레테 여신님처럼 내 주변엔…
“하데스! 저.. 저랑도 이승으로 나가요!”
“네?”
생각을 멈추고 은발머리를 휘날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짐짓 비장해 보이는 표정인 망각의 여신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듯 한쪽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아앗… 이게 아니라… 올림피아에서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제전이 열린다고 해서요! 한번 인간들의 상황이라도 살필 겸, 저랑 함께 나가는 것이…”
올림피아 지역에서 열리는 제전은 최고신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사의 일환.
4년에 한번, 5일간 진행되며 많은 신들도 올림피아 제전을 관람하곤 한다.
올림피아 제전 때만큼은 모든 전쟁이나 분쟁 행위가 금지되며, 아레스가 벌이던 전쟁 역시 휴전하게 된다.
만약 이를 지키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적절한 신벌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필멸자들이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사니까 당연하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제안드렸어야 하는 건데. 금방 준비해서 나가지요.”
“뭐라고요? 하데스가 먼저…?!”
“마침 여신님과도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는 듯이 그대로 얼어붙은 망각의 여신에게로 다가갔다.
의문과 당혹, 기대가 뒤섞인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간 제가 너무 무심했었던 모양이지만… 이제는 달라지려고 합니다.”
“네헤…”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조금만 더 경험하면 알 수 있을까?
* * *
이승으로 올라온 우리는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전이 열리는 올림피아 지역으로 향했다.
이곳은 완전히 제우스의 영역권, 내가 잠시 들렀다고 인사라도 해야겠지.
정체를 숨긴 신이 도시에 돌아다니는 일은 제우스도 반기지 않을 것이다.
“제우스의 신전으로 먼저 가시죠.”
“여기까지 온 김에 얘기라도 나누려고요?”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모습을 감춘 우리가 제우스의 신전 내부로 들어섰다.
역시 최고신 제우스의 신전답게 엄청난 규모의 건물과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테베에 있는 내 신전과 규모를 비교한다면 어떨까?
일단 지금은 곧 올림피아 제전이기 때문에 수많은 관광객과 상인, 선수들이 몰려든다는 걸 감안하면…
“위대하신 천공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은혜에…”
“여기 있는 소들은 제가 잘 길러낸 건강한 놈들입니다. 제우스 신의 신전에 기부하고 싶습니다만…”
“제우스 님의 상징인 독수리를 조각한…”
길게 늘어선 줄을 한참 지나고, 인간 경비병들과 사제들을 지나 더욱 안쪽으로 다가갔다.
정갈히 손을 씻으며 향로를 옮기는 신도도 지나고… 넓은 구역으로 나오면…
마침내 거대한 제우스의 신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번개를 들고 왕좌에 앉은 제우스 신상의 크기는 사람 수십 명을 합쳐놓은 것만큼 거대했다.
양쪽에 깔린 대리석 기둥을 지나 제우스 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목재 골격을 상아와 금으로 덮었고, 백향목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옥좌.
제우스의 신도들이 올림포스의 옥좌를 제법 잘 표현했구나.
터억.
신상의 옥좌 부분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곳은 제우스의 힘이 제일 잘 미치는 곳 중 하나, 이런 방식으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다.
“…제우스.”
“이 목소리는… 하데스 형님?! 형님이 왜 올림피아의 내 신전에 있나?”
“인간들이 네게 바치는 제전이나 구경할까 해서 잠시 나왔다.”
“아… 그렇군. 내 사제들에게 잘 대접하라 이르겠…”
“아니, 그건 됐다. 조용히 구경하다가 돌아갈 생각이거든.”
제우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옥좌에서 손을 뗐다.
기가스의 위협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이번 제전은 자신이 직접 참관한다고?
그리고 페르세포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자신의 딸이지만 잘 부탁한다느니… 결혼식은 언제 할 것이냐니…
데메테르가 요즘에는 올림포스에서 표정을 풀고 다닌다는 소리도 함께 온갖 소식을 전해들었다.
제우스와 오랜만에 대화해서 그런 것도 있겠고, 마침 무료하던 모양이였나 보네.
그때,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레테 여신님이 날 부른다.
저기 아까부터 이상하다는 듯이 이쪽을 지켜보던 인간 때문인가?
새하얀 머리, 나무 지팡이와 손에 들고 있는 향로, 곧 저승으로 올 날이 머지않아 보이는 늙은 필멸자.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그가 제우스가 총애하는 대사제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겠지.
투욱.
“혹시… 시.. 신이십니…!”
“쉿.”
제우스에게 받은 축복 덕분에 명백하게 이상함을 깨달은 노인이 말한다.
시끄러워지는 것은 질색이기에 그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제.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모습을 감췄다.
저 인간의 눈에는 나와 레테 여신님이 그대로 사라진 것처럼 보일 터.
다른 신들께서 제우스 신전에 다녀가셨다니 어쩌니 하는 말이 퍼지려나?
* * *
둥. 둥. 둥. 둥.
“모두 안녕하십니까! 이번 제전을 진행하게 된…”
나와 레테 여신님은 넓은 원형 모양의 경기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정확히는 올림피아 제전이 열리는 경기장의 한쪽 관객석에 앉아 있다고 보면 되겠지.
“먼저 위대하신 제우스 신을 기리는 제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이번에 올림포스에 바칠 제물은 어린 양 100여 마리와…”
원형으로 된 경기장은 인파들로 가득 찼고, 진행자가 쉴 새 없이 떠드는 중이었다.
나와 레테 여신님은나무열매가 들어간 파이와 말린 과일을 씹으며 구경했다.
“우움…”
우물거리며 말린 과일을 집어드는 레테 여신님은 무언가 불만스러워 보이시네.
아무래도 주변이 너무 시끄러운 탓이 아닐까?
“여신님.”
“이렇게 주지 마세요…”
“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아.”
작은 치즈 하나를 내밀자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망각의 여신.
마치 입을 벌리고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와 같은 모습을 취하시길래안에 치즈를 넣어 주었다.
그런데 치즈는 드셨으면 제 손가락은 입에서 놓아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우움… 하데스도 아…”
치즈인지, 내 손가락인지를 먹은 여신이 작게 입을 벌리더니…
이번에는 내게 파이를 내민다.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손이 떨리는 그녀지만 이 순간에도 멍한 눈동자.
저승을 휘감는 다섯 강 중 하나의 주인이자, 닉스의 손녀이기도 한 망각의 여신은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망각의 힘이란 것은 원래 그렇다.
애끓는 슬픔도, 거세게 타오르는 분노도,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까지도…
그 모든 감정을 포함하고 있는 기억을 잃어버리면 꺼진 불처럼 사그라드는 법.
망각의 여신의 표정에서 감정이 희미한 것 또한 그런 것이겠지.
“뭐해요… 빨리… 아~”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오래도록 함께 지내다 보면 그녀가 마치 봄과 같은 소녀의 감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두를 평등하게 멍한 어조와 무표정한 말투로 대하는 그녀가…
나에게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신들이 세계의 패권을 쥐었을 때, 여전히 내가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해서?
아니면 천방지축인 내 형제들과는 달리, 여신들을 탐내지 않아서?
그도 아니면 처음으로 신과 엮인 인간에게 직접 판결을 내리고 편의를 봐주었을 때?
그조차 아니면…
“우으… 저 팔 아픈데요…”
“예전에 처음 뵀을 때가 기억나는군요.”
“…?”
“제가 저승의 주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 말입니다. 그때…”
눈을 감고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아주 오래된 기억, 나는 저승의 강을 둘러싼 다섯 개의 강을 살피고 있었다.
티탄 신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내가 다스릴 저승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던 중, 망각의 강에서 한 여신을 만났다.
강가에서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있던 은발의 여신.
그녀에게 다가간 나는 망각의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데스라고 합니다. 혹시 망각의 여신이신…”
“…저리 가주세요.”
비록 첫 단추는 좋지 못했지만 꾸준히 찾아간 결과,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는 생물들. 필멸자의 역사를 집어삼키는 망각.
배고픔의 여신인 리모스(Limos)는 가만히 있어도 주변의 모든 생물을 허기로 몰아넣는다.
신이면 저항할 수 있지만 그 역시 지속적으로 힘이 소모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와 비슷한 이치로 망각의 여신 역시 필멸자에게 두려움을 사고, 불멸자 사이에서도 그리 환영받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그녀 스스로가 실의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자꾸 찾아가니 반응해줬지만…
“저희 신들은 망각의 힘에도 저항 가능하지 않습니까? 함께 저승에서 지내시는 편이…”
“…왜 계속 이러시는 건가요?”
“그야 항상 이곳에서 혼자 지내시니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공사다망하신 주신이 이렇게 제게 찾아오는 건…”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 그냥 답답해서 솔직히 말해버렸던가?
“이것도 제 의무입니다.”
“뭐라고요…?”
“기피당하는 권능을 지녀 우울한 여신을 돕는 것도 저승의 주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처음으로 그녀의 고개가 들어올려지면서 약간의 감정을 내비쳤다.
“망각을 좋아하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냥 저를 내버려…”
“…제가 좋아합니다.”
“뭐라고요?…”
그날 이후로 망각의 여신은 저승의 성채에서 머물게 되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레테 여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감정이 담긴 미소가 자연스럽게 얼굴에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왜 웃어요. 하데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 역시, 살짝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처음과는 정말 많이 달라진 표정 변화. 저승에서 오래도록 일한 덕분일지도…
아니, 아니다. 피하지 말자.
나는 그녀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다.
아프로디테도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 사랑 때문이겠지.
“…그냥 여신님을 보니 미소가 나오는군요.”
“으읏… 이거나 더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