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87)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87화(87/140)
사랑과 불 – (2)
일단 급히 에로스와 함께 죄인들의 고문장으로 떠나려는 헤파이스토스를 불러세웠다.
“…헤파이스토스.”
“예?”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대장장이의 신.
그래… 조카는 내게 바이던트도 주었고, 종종 무구를 수리해주었으며 심지어 카론의 배도 만들어주었다.
그럼 내가 그의 결혼 문제 정도는 해결해 주어야 균형이 맞을 터.
“너는 아직도 아프로디테에게 미련이 있느냐? 현실적으로 잘 생각해서, 신중히 대답하거라.”
“…으음.”
“만약 네가 원한다면 아프로디테의 미모에 그리 뒤지지 않는 여신을 찾아주마.”
깊이 고민하는 헤파이스토스.
그의 눈동자에 혼란과 슬픔, 애정과 아쉬움 등이 잔뜩 스쳐지나간다.
“아프로디테는 아레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남신들과 관계를 맺더군. 태어난 아이의 수도 많고…”
“하지만 저는…”
“그래, 미련이 많겠지. 하지만 부부관계란 일방적인 한쪽의 구애로는 성립되기가 어렵다. 비록 제우스가 너희를 강제로 이어놓았지만,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
“이번에 네가 벌인 일도 분명 아프로디테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고개를 푹 떨구는 대장장이의 신. 그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대로 얼어붙은 것만 같던 헤파이스토스의 귀에 에로스의 말이 들려왔다.
“저기… 헤파이스토스 님.”
“왜 그러냐, 에로스.”
“그으. 제가 사랑의 신이라서 아는데… 어머니는 이미 마음이 떠난…”
“하아…”
저승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던 헤파이스토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결국 씁쓸한 웃음과 함께 입에서 나온 말은 체념.
“하하하… 큰아버지. 저와 아프로디테는 더 이상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그래.”
그렇게 헤파이스토스가 결국 아프로디테와의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길 포기하고 떠난 지금,
나는 제우스를 설득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프로디테와 헤파이스토스의 결혼은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결정한 일.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의 여신을 놓고 신들끼리 싸움이 일어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겠다! 지금부터 미의 여신의 남편은 헤파이스토스요!”
최고신의 권한으로 강하게 선포했으니, 그 결정을 뒤집으려면 어지간해서는 힘들다.
적절한 이유와 근거, 다른 신들의 동의도 필요하다.
제우스를 설득하려면 신들의 다툼을 막을 방법과… 포세이돈의 협력을 받아야겠군.
그런데 아프로디테의 공식적인 남편이 사라진다면 다른 남신들이 눈이 돌아가 달려들겠고…
잠깐, ‘남’신이라… 생각해보니 명분은 이쪽에 있다.
제일 중요한 포세이돈은 지금 올림포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지금 당장 구름 위의 신궁으로 향해 신들을 설득해야겠다.
* * *
올림포스 신궁.
평화롭던 구름 위의 생명들이 나를 보고는 술렁인다.
“잠깐… 저승의 왕이시잖아…!”
“하데스 님?! 혹시 저번에 데메테르 님의 딸을 저승으로 데려간 문제 때문인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메두사라는 하급신에 대한 일로 오신 것일수도…”
포세이돈은 어디 안쪽에서 넥타르나 마시고 있는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대충 근처에서 넥타르를 나르던 어린 여시종을 불러세우고…
“어. 어. 하, 하데스 님을 뵙습니다!”
“포세이돈은 어디에 있지?”
“바다의 주인께서는 저.. 저쪽에..”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시종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올림포스 신궁에서 못보던 얼굴인데… 잠깐, 남자 같기도 한데?
“네 이름이 무엇이냐? 새롭게 태어난 하급신인가?”
“저는… 가니메데스(Ganymedes)라고 하는 트로이의 왕자였고… 제우스 님께서 저를 올림포스에 데려오셨습니다. 저승의 주인이시여!”
내게 엎드려 인사하는 이 소년?을 보았다.
어지간한 여신에 뒤쳐지지 않는 얼굴인데 소년이라고?
그리고 잠깐, 제우스가 데려와? 이거 설마…
“제우스가 혹시 너를 강압적으로 데려왔느냐? 그렇다면 작게 고개를 끄덕여라, 이승으로 돌려보내주마.”
“그… 그것이 아닙니다. 제우스 님께서는 제게 잘 대해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하는군. 올림포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티가 난다.
특별한 힘이나 혈통을 가진 것도 아닌 것 같고… 외모만 보고 냅다 납치했나?
아니, 트로이라면 제법 큰 국가인데… 그곳의 왕자를 데려오다니 이게 맞는 일인가.
심지어 중요한 영웅이거나 대업에 필요해서도 아니고 그냥 아름다워서 데려온 거 같은데.
“그래, 알겠다. 네 할 일이나 계속하도록.”
“예…!”
제우스를 설득할 때 저 소년의 이야기도 꺼내면 되겠네.
가만… 마침 헤라에게도 잘 말한다면 제우스의 설득이 쉬워지겠군.
생각을 거듭하며 구름 위를 걷다보니 포세이돈이 보이기 시작했다.
옆에 놓인 넥타르를 들이키며 리라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 푸른 머리의 남신.
곧장 그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포세이돈, 의논할 것이 있다.”
“하데스? 무슨 일로…”
“헤파이스토스를 이혼시키고 새 부인을 찾아줘야겠는데, 제우스를 설득하는 일에 힘이나 좀 보태다오.”
“으음.”
그가 마시던 넥타르를 한번에 들이키더니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왜, 이번에 헤파이스토스가 아테나에게 저지를 뻔한 일 때문에?”
“그렇지. 이러다가 아름다운 여신만 쥐어주면 가이아 쪽으로 전향이라도 할까봐 우려된다.”
“글쎄…”
“네가 헤파이스토스를 충동질했지 않았나?덕분에 아테나도 조금 욕을 봤으니 이용당한 조카에게 자비라도 베풀어라.”
“만약 내 조카가 가이아 쪽으로 붙으면 제우스의 통치력만 의심될 텐데? 내가 뭐하러 그래야 하지?”
슬쩍 웃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도 반란의 꿈을 포기하지 못했구만.
하기야 고작 아테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헤파이스토스를 충동질하기에는…
신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날수록 제우스의 통치력이 의심된다.
한동안 신들의 왕 자리에는 관심 없어 보이더니 또 이상한 야망이나 꿈꾸고 있던 건가?
“그따위 올림포스의 주인 자리가 뭐라고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아니,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하데스 네가 더 이해되지 않는데. 아무튼 나는 제우스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알아서 하게.”
“뒤엎을 생각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건가?”
“흥! 내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함께할 생각은 있고?”
작게 투덜대며 고개를 돌리는 바다의 주인.
음. 반란을 일으킬 생각까지는 아닌가 보네. 사소한 꼬장 정도겠구만.
그렇다고 해도 생각해보니 짜증이 나는군.
아니 이놈은 자기가 불쌍한 조카를 충동질해놓고 모른 척 하겠다?
맨날 필멸자들에게 패악질이나 부리는 놈이…
“…그럼 다르게 설득해보겠다. 헤파이스토스를 네가 충동질했다는 사실을 다들 믿어주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 말이 사실임을 내가 공인하면 어떨까? 그리고 네가 메두사를 강간한 덕에 지금 그녀는 저승에서 이를 갈고 있는데, 어디 한번 피해자를 올림포스에 불러와서 네 만행을 폭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지금 저승에 너한테 죽어나간 인간 피해자가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는데, 아주 일부분만 이승과 이어지는 훈련소에 시중으로 보내면… 다시 이승으로 올라갈 영웅들에게서 네 평판이 아주 바닥으로 치닫는…”
사실은 태반이 실제로 실행하기 꺼려지는 일.
메두사 본인이나 다른 피해자들의 의지를 존중해야 하니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포세이돈과 굳이 그렇게까지 대립할 이유도 없고…
사실 대립할 목적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되는데, 저승에서 일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쌓였나?
놈 때문에 저승에서 원한을 호소하는 피해자가 워낙 많아야지…
여기까지 말했을 때, 포세이돈의 얼굴이 붉어지며 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도 폭급한 성정 탓에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간 모양.
나중에 천천히 생각한다면 허세임을 알아차리겠지만…
“뭐, 뭐라! 하데스, 지금 나를 겁박하려는 거냐!”
그의 양 눈동자에서 푸른 신력이 일렁거리고 주변의 시선들이 이쪽을 주시한다.
채찍을 보여줬으니 이제 당근을 보여줄 차례. 너무 그리 화내지 마라, 포세이돈.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나, 만약 이번에 날 도와준다면 이미 죽은 자들을 만나게 해주겠다.”
“죽어간 자식들을 만날 수 있다?”
“네 사생아들도 전부, 너와 사랑했던 인간 여성들까지.”
“큼!”
포세이돈이 다시 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죽은 영혼에 대한 권한은 제우스도 내게 간섭할 수 없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이자, 제우스가 실수로 죽인 인간 여성인 세멜레.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제우스의 부탁도 거절했었지.
파에톤과 헬리오스의 사례와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죽은 자와 생자가 만나는 것은 세계의 균형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신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일.
자기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넘치는 포세이돈이기에 통하는 제안.
그가 투덜거리며 앉고, 다시 넥타르를 집어 입에 털어넣는다.
“거. 인간들에게는 자비의 신이라고 추앙받더니 형제에게는 아주 가차없군 그래.”
“그만큼 네 업보가 크다고 생각해라. 주기적으로 네게 당한 피해자가 저승으로 온단 말이다.”
“흥… 그깟 인간 놈들 때문에…”
“헤파이스토스도 아프로디테를 포기한 모양이다. 둘을 이혼시키고 조카에게 새 부인을 얻어준다면 네게도 무언가 보답하지 않을까?”
눈동자를 굴려가며 고민하는 포세이돈.
내 말에 찬동해서 얻을 이득과 거부했을 시의 손해를 계산하고 있구만.
“…네가 큰 도움을 주었다고 헤파이스토스에게 꼭 말해두지. 너도 괜히 조카에게 원한을 사고 싶진 않을 거 아니냐?”
“좋다. 대신 나는 적극적으로 도울 수는 없으니 그리 알아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헤라도 설득하러 가지.”
적당히 내 의견에 찬성하는 기색만 보이면 상관없다.
나와 포세이돈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 자체로 제우스의 생각을 돌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프로디테가 처음 나타났을 때 포세이돈도 그녀에게 구애했다고 들었는데.
아레스와 아이까지 낳아서 포기한 모양이구만, 아니면 정실인 암피트리테의 눈치가 보였을 수도 있고…
나와 포세이돈은 자리를 옮겨 신들의 여왕, 헤라에게 향했다.
적당히 큰 건물 안에서 올리브 오일을 얼굴에 바르던 아름다운 여신이 우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하데스와 포세이돈…? 설마… 반란을?!”
“…오해다.”
역시 그 생각부터 하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