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94)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94화(94/140)
아레스와 포세이돈의 재판 – (1)
테베의 일을 수습한 나는 스틱스 여신님과 함께 업무를 보며 담소를 나누던 중이였다.
내가 종종 저승을 떠날 때마다 일이 너무 밀리지 않는 것은 다 여신님 덕분이지…
“스틱스 강에 맹세코 진실만을 말하건데, 오늘도 여신님의 머릿결은 윤기가 흐르는군요.”
“으… 당사자 앞에서 자꾸 이상한 맹세하지 말라고요…! 한동안은 안 그러시더니 또…”
오늘도 앞에서 맹세하는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스틱스 여신님이다.
하지만 마치 아테나가 짠 실크와 비견되는 아름다운 흑발이 눈앞에서 일렁이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잠시 양피지를 내려놓고, 내 앞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물결을 멍하니 쳐다보자니…
살짝 홍조를 띤 여신님이 입을 열었다.
“…그럼 만져… 볼래요? 조금만이라면…”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내 옆으로 다가와 몸을 붙이는 맹세의 여신.
코 끝에서 느껴지는 것은 산더미와 같이 쌓인 양피지 향기일까, 아니면 그녀에게서 풍기는 올리브 향기일까.
이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억지로 고개 숙여 업무를 보는 그녀의 머리칼에 손을 올렸다.
손 안에서 흘러내릴 것만 같은 여신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자 알 수 없는 묘한 기류가 느껴진다.
“으읏…”
지금 나는 행복함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고되고 바쁜 저승의 업무에도 불구하고 여신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덜컥.
“하데스 님! 저승의 입구에 아레스 오라버니가… 어?!”
“크흠… 무슨 일이냐?”
“앗…!”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봄과 씨앗의 여신, 페르세포네.
집무실 안을 빠르게 살펴본 그녀가 달라붙어 있던 나와 스틱스 여신님을 보자마자 입을 삐죽이며 허리에 손을 올린다.
“피… 또 스틱스 여신님이랑만 같이 있고, 저는 아예 눈에도 보이지 않나요? 하데스 님?”
“이제는 삼촌이라고 부르지도 않는구나…”
“그야 결혼하면 당신이라고 불러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랑은 대체 언제 이승으로 함께 나가실건가요?”
“…? 너와 내가 이승으로 함께 나가다니?”
“에이~ 또 모른척하신다. 자꾸 그렇게 나오실 거에요? 하데스 님이 마음에 둔 여신들과 함께 이승에 나들이 나간다는 소문은 이미 저승에 파다하게 퍼졌는걸요. 스틱스 님이나 레테 님도 그렇고 그 멘테라는 하급신과도 시간을 보냈으면서 왜 저하고만…”
제발. 조카야…
물론 신들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심리적인 저항이 조금…
아무래도 내게는 너의 존재가 조금… 많이 이른 듯 싶다.
아름다운 봄의 여신 덕분에 생각을 고쳐먹은 계기가 되었지만, 정작 그녀와의 관계는 꺼림칙하니…
일단 화제를 돌릴까.
“…아레스가 저승의 입구에 왔다는 이야기는 무슨 소리냐?”
“아. 그거요? 포세이돈 작은아버지랑 크게 다툰 일로 재판을 여는 일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포세이돈이랑 아레스가 크게 다퉜다고?
그들이 충돌했던 적은 이전에 포세이돈의 반란 때밖에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 * *
그렇게 나는 알현실에 걸어들어오는 남신을 보게 되었다.
철갑같은 탄탄한 근육질,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신의 갑옷, 허리춤의 보검.
내 조카이자 전쟁의 신인 아레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홍수 이후부터 저승이라면 기겁하던 아레스가 무슨 일로?
“하데스 큰아버지, 안녕하십니까.”
“…그래.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너랑 포세이돈이 크게 다투다니 무슨 일이냐? 그리고 왜 저승으로 온 것이고?”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것이냐면…”
아레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포세이돈의 아들인 할리로티오스(Halirrothios)라는 반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였다.
포세이돈과 에우리테라는 님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인 할리로티오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포세이돈이라는 사실을 믿고 아테나가 주신으로 있는 도시, 아테네에서 망나니짓을 일삼았다고 한다.
“여어! 아테나 여신님을 모시는 무녀라서 그런지 겉보기에도 나쁘지 않구만?”
“이… 이러지 말아주세요. 저희는 모두 순결을 맹세한…”
“순결 맹세? 그게 뭐 어쨌다고? 내가 누군지는 알지?”
상습적으로 아테나 신전의 무녀들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희롱하지 않나…
퍼억- 콰당탕!
“뭐?! 돈이 없으니까 나가라고 했나? 지금 나한테?”
“당신이 아무리 포세이돈 님의 자식이라 해도… 크윽!”
“아니지. 아니지. 너야말로 바다의 은혜를 그리 받았으면서 감히 나를 이따위로 대해?”
아테네의 여러 식당과 여관 등에서 돈을 내지 않고 물건을 가져가거나, 행패를 부렸으며…
“잠깐!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건 아테나 여신님을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
“뭐 어쩌라고?! 나의 아버지는 포세이돈 님이시다.”
드드드… 쿠웅!
아테나 여신을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를 닥치는 대로 벌목해 아테나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단다.
하지만 아테나는 감히 포세이돈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가 없어 적당히 야단만 쳤다고…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나는 아레스에게 질문했다.
“이것들은 네가 아테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냐?”
“맞습니다. 그 쓰레기 같은 놈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군요.”
“…일단 계속 말해봐라.”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는 반신인 딸이 하나 있었다.
알킵페(Alcippe)라고 하는 그 소녀는 아테네 근처의 들판에 풀을 뜯고 있었는데…
운이 나쁘게도 망나니,할리로티오스를 마주했다.
“내가 누군지 알겠지? 날 따라와라, 나와 혼인하는 것은 네게도…”
“누.. 누구세요! 꺄아아악! 아버지!”
“조용히 못하겠냐! 내 아버지는 포세이… 컥!”
촤악- 데구르르.
“알킵페, 괜찮으냐?!”
“아… 버지… 흐윽. 감사합니다…”
강제로 알킵페를 취하려던 할리로티오스는 딸의 비명을 듣고 달려간 아레스와 마주했고…
당연하게도 자신의 딸을 강간하려던 미친놈을 본 아레스는 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잘라버렸다.
자신의 아들이 죽자, 포세이돈은 아레스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아레스! 이 개망나니 같은 놈이! 내 아들의 목을 잘라?!”
“뭐라고요?! 포세이돈 큰아버지의 자식이 내 딸을 강간하려 했단 말입니다!”
“그래도 이놈이!”
“나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다툼이 점차 격렬해지자,
제우스를 비롯한 다른 신들이 이를 중재하기 위해 재판을 열기로 하였다… 라.
“…그래. 네 딸을 강간하려 한 놈은 아마 미노스 3형제를 거쳐 처벌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승에는 왜 온 것이냐?”
“모두가 말하길, 하데스 큰아버지야말로 재판관에 걸맞다고 했습니다! 제발 정당한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내 앞에서 열변을 토하다가 감정을 듬뿍 담아 날 바라보는 전쟁의 신.
저승에 있는 나보고 판결을 내려달라?
* * *
“네 딸을 겁탈하려 한 놈은 이미 죽었으니 내 관할이지만, 포세이돈과 너의 다툼은 제우스가 할 일이 아니냐?”
이건 분명히 이승의 문제.
제우스가 알아서 판결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한테 이 문제가 넘어왔다는 것은…
“그것이… 제가 말씀드렸듯이 모두가 하데스 큰아버지를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라.”
아레스가 들려준 올림포스의 상황은 이러했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그들의 다툼이 격해지자 아테네에서 재판을 열기로 하였고,
다른 신들 역시 그 재판에 참석할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후우… 그럼 이 제우스가 양쪽의 말을 들어보고 판결을 내려 보겠…”
“제우스. 이런 일은 당신이 아니라 하데스에게 부탁하는 편이 더 낫지 않나요?”
“그건 헤라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하데스가 저승에서 항상 이런 일을 맡지 않았겠어요?”
“…제 생각에도 판결이 익숙한 하데스가…”
재판관 역할을 제우스가 맡겠다고 하자, 여신들이 그에 반대하며 날 추천했다고 한다.
헤라와 헤스티아, 아프로디테가 의견을 내자 다른 여신들이 동의했고…
“하! 그래, 차라리 하데스에게 맡기자고.”
“저도 상관없습니다. 하데스 큰아버지보다 공정한 신은 없으니까요.”
“흐음. 그럼 다들 하데스 형님에게 재판관을 맡기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오?”
심지어 포세이돈과내 눈앞의 아레스조차 제우스보다는 내가 더 재판관에 어울릴 것이라 했다고.
아레스의 설명이 모두 끝나고, 나는 조카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큰아버지.”
“…이제는 이승의 일도 내게 맡기는 것이냐.”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큰아버지가 도와주신다면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와 비슷한 효능인 반지를 하나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딸이자, 카드모스의 아내인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착용한 대상에게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신물.
하지만 우리 신들은 불멸자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
그래도 젊음의 반지라…
마음에 드는 인간에게 내려주거나, 수집용으로는 쓸만하겠군.
“음…”
그나저나 포세이돈의 아들이 하필 아테나의 도시인 아테네에서 난동을 부린 것은.
놈이 정말 망나니일 수도 있겠지만, 포세이돈이 일부러 묵인하거나 시킨 것은 아니겠지?
아테나와 포세이돈은 워낙 사이가 좋지 못하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제우스가 재판을 맡겠다고 했을 때, 다른 여신들이 내 이야기를 한 이유도 짐작이 가고…
그런 의견에 제우스가 순순히 물러난 이유도 알겠다.
원래대로면 포세이돈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이 재판관을 맡겠다고 했겠지만,
분명 내 성격이라면 아레스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짐작했겠지.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을테고.
포세이돈은 그나마 제우스보다 내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으려나.
일단 이것은 아레스에게 들은 이야기.
양쪽의 이야기를 전부 다 들어보고 생각할 문제다.
“…그래. 알겠다. 내가 어디로 가면 되지?”
“감사합니다. 큰아버지! 내일 아테네 근처의 한 언덕에서 재판이 열릴 예정이니 그때 참석해주신다면…”
후유.. 그래. 또 신들끼리 싸움이 일어났으니 중재하던가 해야지.
아레스에게 죽고 저승의 백성이 된… 그할리로티오스의 기억을 살펴보고 재판에 나가면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