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Underworld RAW novel - Chapter (96)
저승의 왕은 피곤하다 96화(96/140)
아레스와 포세이돈의 재판 – (3)
떠나가는 포세이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제우스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내게 손짓을 하길래 나 역시 옆자리에 앉았다.
제우스의 신력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막이 생겨나고, 소리가 차단된다.
“포세이돈도 고생이 많겠군.”
“자식 문제로?”
“그렇지, 자식에게 애정을 주는 방식이 조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지만… 간섭하기에는 조금 그렇고, 나도 그리 자식농사를 잘 지은 것은 아닌 거 같아.”
제우스의 말은 얼마 전, 신들을 속이려 했던 탄탈로스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놈이 신격을 얻었으면 디오니소스를 뛰어넘는 진짜 광기의 신이 탄생하지 않았으려나.
“…너 정도면 자식들은 잘 봤다고 생각하는데. 아폴론이나 아테나, 헤파이스토스 정도면 그래도…”
“아까 포세이돈이 아레스에게 망나니라고 부를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형님은 아나?”
“…?”
“아레스의 성정이 난폭한 것은 사실이니 반박하지 못하겠더군. 내가 너무 모범을 보이지 못했나도 싶고…”
제우스의 입에서 나오는 약한 소리. 그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항상 자신감 넘치고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던 신들의 왕이 품던 어두운 마음.
그의 진지한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신력으로 이루어진 막 때문에,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바깥에 절대 들리지 않겠지.
내게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부담이 조금 있는 건가.
“예언 때문에 인간 영웅을 만들기 위해 이승에 자주 돌아다녔더니 헤라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어, 별자리가 된 칼리스토의 경우나… 소로 변해 고생하던 이오에게도…”
제우스에게 아름다운 이성을 탐하는 욕망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분명 그의 행동은 크게 보면 신들에게는 이득이다.
최고신의 피를 받은 페르세우스 같은 대영웅들이 간혹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 여성에게 일일히 구애해 아이를 낳기에는 제법 시간이 흐르기에 강압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제우스 자신도 예언의 영웅을 탄생시키기 위해 나름 노력하는 거겠지.
“알면 헤라가 싫어할 짓은 좀 하지 말아라. 너 때문에 저승에 오는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기도 하니.”
“하하… 기가스들을 전부 처리하고 가이아 할머님께 지배권을 인정받으면 생각해보지.”
씁쓸한 미소와 함께 턱수염을 매만지는 금발의 남신.
우리의 대화가 길게 이어지자 주변의 신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억지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태양의 신격을 비롯해 수많은 영역을 관장하는 제우스의 자랑스러운 아들인 아폴론. 재판 결과에 적당히 만족하면서도 찜찜하다는 분위기인 아레스.
청춘의 여신인 헤베와 대화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어보이는 헤스티아 등…
이 모든 신들을 관할해야 할 제우스의 마음이 제법 무거운 것도 이해된다.
티탄 신족은 타르타로스에 갇혀서 복수를 꿈꾸고 있으며, 가이아 할머니는 우릴 인정하지 않고 있지, 신들의 대적인 기가스가 있는데도 아직 예언의 영웅은 보이지도 않고..
“제우스, 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으면 된다.”
“음?”
“…여태까지 너는 충분히 잘해주었다. 지금처럼 네 자식들과 후손들 앞에서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옥좌에 있어라. 너는 그게 어울린다.”
“하. 하.. 으하하하! 이 제우스를 위로해 주는 것인가, 형님?”
그가 밝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이제 조금은 왕다운 얼굴로 변했네. 신들의 왕이 그리 침울해서야 되겠냐?
사실은 나도 멘테에게 말했던 것처럼 불완전한 면모가 많지만…
“급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저승에 연락해라. 그렇다고 웬 인간이 괘씸하다고 타나토스를 데려가거나 하지는 말고.”
“무슨 소리! 저승에서 바쁜 형님의 손을 빌릴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다음에 또 보자구.”
번쩍- 쿠르르릉!
주변을 감싼 신력의 막을 없애고 일어난 신들의 왕이 가슴을 펴고 하늘로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본 제우스의 얼굴은 아까에 비해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 * *
재판이 끝나고, 자신의 정실 부인인 암피트리테를 비롯한 많은 신들과 함께 바다로 돌아가던 포세이돈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들을 따라오던 몇몇 바다의 하위 신격들이 의아한 눈으로 바다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텅 빈 공터를 향해 말하는 포세이돈.
“이만 나오시오. 가이아.”
가이아? 지금 올림포스 신들과 적대중인 프로토게노이의 이름이 아닌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주변의 신들이 경악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공터에서 매혹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졌기 때문.
과연 포세이돈이구나. 오케아노스의 영역을 장악한 주신다워.
“…아까부터 데메테르의 것이 아닌 대지의 신력이 느껴지더군. 입바른 소리는 그만하시고, 왜 나를 찾았소?”
어느새 트리아이나를 소환해 손에 쥔 포세이돈이 공터를 노려보며 경계했지만,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너를 설득하러 왔지 않겠니? 나 역시 너와 제우스의 아들에게서 일어난 다툼을 들었단다.
가이아는 대지 그 자체, 데메테르보다 대지의 지배권에 우선권을 가지는 프로토게노이.
땅 위에서 일어난 일은 가이아의 눈을 피하기 어렵다.
제우스의 아들이 네 아들을 죽여버렸을 때, 나도 그것을 보았단다. 아레스였나? 제우스의 아들이 휘두른 검이 정확히 네 아들의 목을 베고 지나갔지. 뒤이어 싸늘한 주검이 내 위에 흩뿌려졌고 차갑게 식은 피가 흘러나오더구나. 분하지 않니?
“…지금 나와 제우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오?”
포세이돈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진다.
바다를 다스리는 주신의 심기가 점차 불편해지자, 바닷바람의 비린내와 함께 공기가 요동친다.
그럼에도 가이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간질? 이게 어째서 이간질이니? 네 아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리고 천공과 바다, 지하의 지배권은 너희 3형제가 제비뽑기로 정한 것이 아니더냐?
“……”
나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들을 몰아낼 생각이란다. 만약 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암피트리테가 불안한 얼굴로 포세이돈의 한쪽 손을 슬며시 잡았다.
주변의 하위 신격들은 이제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만약 3주신 중 하나가 가이아의 편에 붙는다면, 과연 올림포스에 승산이 있을까?
그들은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주신의 결정을 기다렸다.
신들의 왕 자리 정도는 네게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물론 천공의 지배권 역시 말이다.
포세이돈은 눈을 감았다.
과거, 티탄 신족에게 승리하고 세계를 나눠 가지던 그 순간의 기억…
하데스는 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는 늘 천공의 지배권을 가지고 싶었다.
그리하여 반란도 일으켰었고, 제우스와는 종종 견제하는 관계가 되었지.
분명 신들의 왕 자리와 천공의 지배권은 탐이 난다. 하지만…
“크… 크하하하하! 이 포세이돈을 너무 얕보셨군.”
“…?”
“지금 나더러… 권력을 위해 당신의 편에 붙으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그의 목에서 울려퍼지는 장중한 노호성.
아주 오래전… 포세이돈이 아폴론, 헤라와 함께 일으켰던 반란.
그는 반란에 성공해도 제우스를 유폐하거나 타르타로스에 가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우스는 자신의 형제이며, 크로노스의 뱃속에서 꺼내준 은혜도 있기 때문에.
천공의 신격을 빼앗아 추방할 생각이였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만약 가이아가 올림포스를 쓸어버린다면 제우스를 비롯한 그의 친족들은 어떻게 될까?
“당신은티탄 신족 대신,올림포스 신들을 전부 타르타로스에 가둘 생각이 아닌가! 아무리 권력이 탐이 난들, 그 크로노스와 같은 짓거리를 내가 할 것 같소!”
…내 제안을 거절한다고? 조금은 말이 통할 줄 알았건만….
“그 입 닥치시오! 가이아!!!”
포세이돈이 자랑하는 삼지창, 트리아이나의 끝 부분이 대지를 향했다.
양 손으로 높이 들어올린 삼지창이 결국 대지에 내리꽂히자, 지진이 일어나며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분노를 담아 힘껏 내리친 주신의 힘에 트리아이나의 권능이 더해지자 그 위력은 가히 발군.
그를 중심으로 사방이 완전히 파헤쳐지고 대지의 속살이 드러난다.
지진의 여파는 점점 더 커져가며… 강렬한 굉음과 함께 대지에 보이는 모든 것을 뒤집어 엎기에 이르렀고…
갑작스러운 재앙에 휘말린 수많은 생명들이 헛되이 목숨을 잃었다.
“으드득…이 포세이돈이… 저따위 말에 넘어갈 줄 알았다는 말인가.”
암피트리테를 비롯한 다른 신들은,분을 삭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자신의 아들이 죽어 아레스에게 화를 낼 때보다… 더욱 커보이는 분노.
후우웅-
“포세이돈 큰아버지…!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누군가와 싸우기라도 하셨습니까?”
이변을 알아채고 하늘에서 다급히 날아온 헤르메스가 그의 뒤에 내려섰다.
도시 하나 정도는 가볍게 파괴할만한 신력의 흐름에 기겁한 전령신의 얼굴에서 땀 방울이 떨어진다.
포세이돈은 전령신의 질문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르메스. 너는 지금 즉시 올림포스로 돌아가, 가이아가 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려라.”
“무슨…! 큰아버지…”
“로데. 네가 헤르메스에게 알아서 설명하고 돌아오거라.”
포세이돈과 암피트리테의 딸 중 하나, 로데(Rhode)가 포세이돈에게 고개를 숙이고 전령신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바다의 주인은 당황하는 헤르메스를 지나쳐, 조용히 바닷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