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127)
제127화 초류향의 노림수(2014.03.27.)
운휘가 몸을 일으킨 것은 그 날의 사고 이후로 대략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멍하게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문 앞을 지나가다가 불쑥 들어왔다.
“어라? 복면, 이제 살 만하냐?”“…….”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등장한 사내.
노진녕이었다.
침상에 앉아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휘가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은?”역시나 그가 가장 먼저 묻는 것은 초류향의 안부였다.
“무사하시다. 내가 곁에 있었는데 털끝 하나 다칠 리가 있겠냐? 음하하핫!”노진녕이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로 콧바람을 내쉬며 말하자 운휘의 눈가에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저 꼴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저런 농담을 하는 걸 보면 천성이 이런 놈인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운휘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노진녕이 새삼 신기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근데 이제 몸은 좀 괜찮은 거냐? 너 거의 반송장이었는데 이렇게 일어나서 말도 하는 걸 보니…… 약제당주가 정말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네.”운휘는 잠시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힘이 없고 나른한 점 외에는 딱히 불편한 곳이 없었다.
운휘 정도나 되는 화경의 고수가 거의 한 달여를 자리보전해야 할 만큼 큰 부상이었다.
말 그대로 그는 생사의 경계를 오간 것이다.
만약 그때 초류향의 시의적절한 응급조치가 없었고, 천마신교에서도 최고의 의술을 지닌 선우조덕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멀쩡하게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운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노진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저거…… 아니, 저분은 어째서 여기에 누워 있는 거냐?”저분?
운휘가 노진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작은 바구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바구니 안에 새하얀 토끼 한 마리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운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운휘는 막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도 알고 있었냐?”노진녕이 묻자 운휘는 오히려 노진녕을 바라보며 복잡한 시선을 던졌다.
이 둔한 녀석까지 저 토끼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린 모양이다.
“교주님께서 제압하시긴 했는데…… 보통 괴물이 아니더라구. 네놈도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해라, 복면.”“교주님이 제압을 하셨다고?”이건 또 무슨 소리지?
운휘가 묻자 노진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교주님께서 제압하신 다음부터 계속 잠만 잔다더니……. 여기서 자고 있었군.”노진녕은 새삼 신기하다는 얼굴로 자고 있는 토끼의 부드러운 볼을 만지작거렸다.
하나 그렇게 만져도 토끼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고 있을 때는 제법 귀여운데 말이야…….”노진녕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팟-팟-!
운휘와 노진녕은 거의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이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마어마한 기운 두 개가 충돌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건…….’하나의 커다란 기운은 모르겠지만 다른 하나의 기운은 매우 익숙했다.
노진녕과 운휘는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교주님이다.’이건 분명히 소교주님의 기운이었다.
운휘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소교주님은 지금 싸우고 계신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야 했다.
노진녕은 비틀거리면서 벽을 짚고 걸어가는 운휘를 물끄러미 보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운휘를 한쪽에서 부축하며 말했다.
“이거 달아둘 거다. 나중에 꼭 갚아라.”“…….”맨 처음에는 거부의 몸짓을 보였지만 운휘는 결국 몸을 맡겼다.
일단 소교주님의 안위가 너무도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깥으로 나감과 동시에 막수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감았다.
* * *
초류향은 달려다가다 돌연 제자리에 멈춰 서서 전력을 다해 빈 허공을 후려쳤다.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주먹질.
‘패력수라권.’임제학은 거의 동시에 정면을 향해서 칼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을 본능적으로 막은 것이다.
쩌어어엉-!
거대한 얼음이 깨어지는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임제학의 칼끝에 뭉쳐져 있던 붉은 강기가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손천기가 빙긋 웃었다.
“자세가 좋다.”그래도 역시 힘은 부족했다.
아무래도 몸뚱이가 따라가 주지 못하니까 지금으로서는 저것이 한 번에 뿜어낼 수 있는 힘의 한계일 터.
일격을 날린 뒤 초류향 역시 아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조금 모자란가.’확실히 꿈속에서 막수와 싸웠을 때랑은 달랐다.
그때는 몸이 성인의 몸이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지 않은가?
의도했던 대로 힘이 뿜어져 나갔다면 방금 전의 그 한 방으로 승부가 갈렸을 것이다.
‘위험했다.’임제학은 손아귀가 저릿거리는 엄청난 힘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작해야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꼬마아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힘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둘 모두 신중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먼저 움직인 쪽은 임제학이었다.
시간을 주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의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뇌전 강기가 초류향의 허리를 베어 왔다.
쫘자작-!
그것을 바닥에 거의 닿을 듯이 허리를 뒤로 꺾어 피한 초류향은 곧장 튕기듯 몸을 비틀어 일으키며 왼발을 올려 찼다.
완벽한 철판교(鐵版橋, 몸을 수평으로 뉘어 공격을 피하는 수법)의 한 수에 이은 강력한 원앙각이었다.
워낙에 가까운 거리였기에 임제학은 무릎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쾅-!
단단한 무릎과 초류향의 발끝이 부딪치자 임제학은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고 뒤로 밀려 나갔다.
‘잡았다.’초류향의 눈에서 맑은 빛이 번뜩였다.
순간적이었지만 상대방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게 보였던 것이다.
그 찰나의 치명적인 빈틈.
그것을 노리고 앞으로 쏘아져 가는 초류향을 위쪽에서 지켜보던 공손천기가 난간을 갑자기 으스러져라 부여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제자가 너무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급함은 항상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과연 지금이 그랬다.
빠르게 다가와 주먹을 내뻗는 초류향을 보던 임제학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초류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대방이 언제 균형을 잃었나 싶을 정도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칼을 올려쳤기 때문이다.
그가 올려치는 칼에는 붉은색 강기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뒤로 주르륵 밀려난 초류향은 바닥에 착지한 후 곧장 한 움큼이나 되는 피를 토해냈다.
“우웩!”바닥에 고이는 피 웅덩이에는 검붉은 핏덩이가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일격을 먹인 임제학은 잠시 복잡한 얼굴로 초류향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건가?’방금 전에는 정말 완벽하게 기회를 잡았었다.
그런데…….
‘베지 못했다? 내 칼이?’이건 정말 이해 못 할 일이었다.
강철도 두부처럼 잘라 버리는 칼이다.
그런데 저런 여리여리한 어린아이의 몸뚱이조차 베지 못하다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임제학의 표정이 복잡해질 때.
지켜보던 공손천기만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인도법이군.’신체를 가장 완벽하게 다루는 월인도법이다.
월인도법은 그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신체를 강철보다 단단하게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게 지금 초류향을 살렸다.
‘뛰어 내려갈 뻔했다.’공손천기는 순간적으로 초류향이 위기에 몰리자 자신도 모르게 싸움에 개입할 뻔했다.
초류향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놓치지 않았기에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부끄러운 짓을 할 뻔했군.’공손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힐끔 주변을 살펴보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곁에 있던 호법들 모두가 그와 비슷한 얼굴을 한 채 초류향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차하면 뛰어들 듯한 얼굴들.
‘다들 어른은 못 되겠구만.’그렇게 생각할 때쯤.
탁탁-
초류향은 부러진 오른팔을 왼팔로 끼워 맞추며 얼굴을 찡그렸다.
고통보다는 방금 전 자신의 행동에 마음이 상한 것이다.
‘어리석었다.’내부에서 월인도법의 기운이 용암처럼 들끓으며 내력이 미친 것처럼 널뛰기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닥쳐온 큰 충격에 기운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
‘너무 서둘렀어.’임제학이 칼을 뻗는 그 순간에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위기를 직감하는 순간 월인도법의 기운이 맺히며 팔을 단단하게 보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이 부러져 나갔다.
임제학은 방금 일격이 막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일격을 허용한 것이었다.
월인도법이 없었으면 팔이 잘려 나가고 곧장 몸이 세로로 쪼개졌을 테니까.
그만큼 임제학의 일격은 정확하고 강력했다.
‘크게 손해 보았다.’이제는 이런 요행을 바랄 수가 없었다.
몸을 단단하게 보호해 주던 월인도법의 균형이 이번 공격 한 방에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억지로 탈골된 뼈를 맞추며 초류향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시간을 끌수록 압도적으로 불리해졌다.
내력은 통제를 벗어났고, 몸 상태도 엉망이다.
게다가 갑자기 무리하게 혹사당한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전신이 덜덜 떨려왔다.
‘생각하자.’어떠한 경우에도 헤쳐 나갈 방법은 있었다.
초류향이 그렇게 머릿속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필사적일 때.
멈추어 있던 임제학이 움직였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꼬마는 퍽 독특한 무공을 익힌 모양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나 그것도 끝이었다.
마무리를 하기 위해 움직이며 임제학은 서서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뚜둑-
최초의 일격을 허용했던 팔꿈치가 불편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승부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천천히 다가오는 임제학의 모습이 초류향의 망막에 느릿느릿하게 맺혔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임제학이 취할 수 있는 수십 가지 동작들이 떠올랐다.
그 동작들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일일이 따지던 초류향의 몸에서 점점 떨림이 사라졌다.
문득 무엇인가를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잠시 머릿속을 헤집으며 방금 전에 떠올린 것을 확인하던 초류향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찾았다.’정답이 보인 것이다.
초류향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임제학의 발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상대방의 호흡을 읽고 있던 초류향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쏘아져 갔다.
귀신같은 움직임.
본래 수라환경에 존재하는 여덟 가지 보법들을 공손천기가 귀찮다고 하나로 압축시켜놓은 것.
‘수라귀영보.’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초류향을 보며 임제학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쳤군.’지금 상황에서 저렇게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다.
실제로도 이 녀석은 죽여 달라고 자신의 칼날에 목을 들이밀고 있지 않은가?
‘어린아이라고 칼에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된다.’이놈은 그저 덜 자란 마귀일 뿐.
더 크기 전에 그 싹을 잘라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으며 막 초류향을 두 토막 내기 위해 칼을 휘두르려던 임제학은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깜짝 놀란 얼굴로 갑자기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것을 초류향은 다시 빠른 속도로 따라 붙었다.
임제학은 쫓아오는 초류향을 떨치기 위해 다시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파파팟-!
한동안 임제학은 뒷걸음치고 초류향이 따라붙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모두가 이 황당한 상황에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일 때.
공손천기만이 눈을 빛내며 둘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녀석…….’공손천기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묘한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제법인데?’제자가 몸 상태도 엉망진창인 주제에 저렇게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이유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발끝을 노리는 건가?’칼을 뻗기 위해서는 발이 먼저 움직여야 했다.
무게와 강한 힘을 싣기 위해서다.
그저 팔만으로 휘두르는 칼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위력이 없었으니까.
초류향은 그 기본적인 상식을 지금 역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퍼석-
초류향의 발이 바닥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깔려 있는 두터운 대리석이 쩍쩍 갈라졌다.
엄청난 내력을 발끝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저런 것에 한 번 짓밟히면 발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질 것이다.
그렇다면 끝장이다.
부딪치려는 직전에 그것을 알았기에 임제학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괴로웠다.
계속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항상 힘이 터지기 직전에 꼬마의 발이 그보다 한걸음 빨리 움직였다.
쿠웅-
꼬마에게서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전해져왔다.
그것을 느낀 임제학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이제 참는 것도 한계였다.
스스로가 무기력하게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으니까.
갑자기 뒤로 물러서던 임제학이 이를 갈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동시에 오른발로 바닥을 강하게 디디며 칼을 휘둘러 왔다.
‘승부다.’초류향은 입가에 가느다란 핏줄기를 흘리며 미소 지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공격이 왔던 것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