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134)
제134화 이마두(2014.04.21.)
“내가 이런 걸 걱정한 거다, 제자야.”“스승님…….”공손천기는 창가에 서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라. 할멈도 거기까지만 하고.”[……교주.]“할멈은 원래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사라져.”공손천기가 손을 한 번 휘젓자 눈앞에 있던 신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녀는 사라지기 직전 초류향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초류향은 무언가 묵직한 것을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는 분이십니까?”초류향이 묻자 공손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한 사람이었지.”“믿을 만한 사람인겁니까?”“헛소리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살았을 때도 그랬는데 죽어서 다르겠느냐?”초류향은 방금 전 신녀가 했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는 공손천기를 바라보았다.
공손천기 역시 그런 제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설마 저 할멈의 말이 사실이라 생각하는 게냐?”초류향은 고개를 저었다.
진실이든 아니든 사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스승님을 곁에서 떠나보내는 것은 단 한 번으로도 충분하니까.
두 번 있어선 안 된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건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초류향은 불안정한 얼굴로 그의 스승을 바라보았다.
절대로 보낼 수 없다.
그건 정말로 용납할 수 없다.
그 시선에 담긴 복잡한 심경을 읽은 공손천기는 툴툴 웃으며 초류향의 머리를 헝클었다.
“제자야, 나는 우화등선이라든가 하는 고급스러운 건 알지 못해.”품 안에서 연초를 꺼낸 다음 그것을 입에 물며 공손천기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이미 죽어 버린 할멈의 헛소리라고 생각해라.”“……정말 그리 생각해도 되는 것입니까?”“그래.”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초류향의 시선도 뚜렷하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 모습을 보던 공손천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조금 어린아이 같구나.”“예?”“항상 네 녀석을 보면 신기했었다. 어린 녀석이 만사에 너무 덤덤하지 않느냐? 세파에 찌든 노인들도 네 녀석처럼 침착하지 못할 텐데……. 쯧, 나는 그 부분이 늘 염려스러웠다.”침착한 것은 좋은 게 아니었던가?
초류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공손천기가 입을 열었다.
“너무 고요한 물은 큰 흐름을 만들 수가 없지. 가끔은 격한 파도도 일으키고 거센 물살로 주변을 휩쓸어 버릴 힘도 있어야 하는 법.”공손천기는 제자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좋아. 그러고 보니 제법 재미있는 것이 하나 생각났다.”재미있는 것?
초류향은 공손천기의 입가에 그려져 있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며 살짝 불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이제부터 너에게 숙제를 내 주마.”숙제?
초류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과거 그에게 제일 처음 숙제라는 것을 내주었던 사람은 조기천 스승님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손천기가 숙제를 내준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던 것이다.
“왜? 싫으냐?”초류향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싫을 리가 있겠는가?
‘과연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초류향은 잔뜩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공손천기를 바라보았다.
과거 조기천 스승님도 그러했고, 지금의 공손천기 스승님도 마찬가지지만, 현재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계신 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숙제도 엄청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이미 한번 겪어 보지 않았던가?
조기천 스승님께서 내주었던 진법에 대한 숙제는 처음 겪어 보는 초류향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신선했으며, 쉽게 해결되지 않는 난해한 맛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어려움이 있을까?
두근두근거리며 기대하고 있을 때 공손천기 스승님이 꺼낸 말은 초류향에게 다소 실망스럽게 다가왔다.
“보름 동안 최대한 많이 웃어 보아라. 그것이 너에게 내리는 첫 번째 숙제다.”많이 웃으라고?
고작 그게 숙제라는 말인가?
초류향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할 때 공손천기가 입을 열었다.
“숙제가 너무 쉬워 보이느냐?”“……예.”공손천기는 제자의 대답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너는 모든 문제를 너무 머리로만 받아들이려 하는 경향이 있지.”머리로만 받아들인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럼 머리가 아니면 대체 어디로 받아들이라는 말이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공손천기가 자신의 주먹으로 초류향의 심장 부분을 가볍게 쳤다.
“머리 말고 가슴으로 느끼라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웃음으로 받아넘겨 보거라. 기한은 보름. 그 기간 동안 얼마나 웃었는지 네가 스스로 그 횟수를 적어 나에게 보여라.”“알겠습니다.”별로 어려울 것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공손천기 스승님께서 내주시는 첫 숙제였다.
분명 어딘가 그 의미가 있을 터.
초류향은 그렇게 생각하며 보름 동안의 숙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면사로 눈만 빼놓고 얼굴 전체를 가린 공손아리와 선우초린은 담벼락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여기까지 쫓아오는 내내 선우초린은 공손아리를 말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의지가 너무도 확고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라고 했던가?’발음도 이상한 이름이었다.
혀가 몇 번이나 꼬이는 이 괴상한 이름을 되뇌며 선우초린은 어제 새벽에 받아온 자료를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본래는 소리 소문도 없이 죽이려고 했었다.
그게 선우초린이 생각하는 최선의 대처였으니까.
한데 그러질 못했다.
이곳에 있는 색목인은 조금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제법 고위 관료들과 관계가 있었다.
관료들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야 새삼 두려울 것도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만, 조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황실 직계 자손 중 하나인 건안왕(建安王)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확실히 곤란한 문제였다.
건안왕이 각별히 그의 건강을 신경 쓰고 있었고, 거의 매일 그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그랬기에 선우초린조차도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하필 건안왕이랑 친분이 있다니…….’황족들 중에서도 건안왕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대부분의 황족들이 황제가 되지 못하면 사치와 향락에 빠져 덧없이 세월을 보내곤 했지만 건안왕은 아니었다.
매일 같이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무예 수련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황족들치곤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재능이 있었다.
조금만 노력해도 모든 것을 쉽게쉽게 배웠기 때문이다.
워낙에 다방면에 재주가 뛰어난 건안왕이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항상 뛰어난 인재들이 넘쳐흘렀다.
인품 또한 무던해서 그에게 몰리는 사람들의 숫자는 해마다 늘어날 정도였다.
하나 그 엄청난 인재들 가운데서도 저 색목인은 특별했다.
건안왕이 특별히 사부(師父)라 칭하며 그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대체 정체가 뭐야?’정보를 캐오면 캐올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공손아리를 위해서 마테오 리치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조사한 선우초린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혼란스러움만 남게 되었다.
“아직 안 나오셨나?”공손아리는 담벼락 너머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안쪽에 있는 정자를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오늘은 안 나오시려나 봅니다. 그만 들어가지요, 소군주님?”“조금 더 기다려 보자, 링링.”선우초린은 제발 그 색목인 영감탱이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연관되는 건 좋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가 담벼락을 따라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공손아리와 선우초린의 시선이 동시에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반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색목인 노인이 서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선우초린의 눈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와 주셨구려?”“네.”공손아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테오 리치는 서둘러 그녀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들어가십시다. 바깥은 지금 너무 많이 춥소.”“네, 감사합니다.”공손아리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테오 리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선우초린 역시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어쩔 수가 없었다.
담벼락 안으로 들어가 정자를 지나고 나자 저 너머에 마두거(瑪竇居)라는 특이한 이름의 현판이 달린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머무는 곳이외다. 허허.”선우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이 색목인 노인의 또 다른 이름인 이마두(李瑪竇)라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마두거라는 이름은 ‘마두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니 정말로 이 색목인의 거처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공손아리와 선우초린.
둘이 마테오 리치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마테오 리치는 미리 준비해 놓은 차와 과자를 대접하며 입을 열었다.
“춥지는 않으셨소?”“네.”공손아리는 마테오 리치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눈앞에 놓인 과자를 서슴없이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먹고 나와서 몹시 허기졌기 때문이다.
선우초린은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다과를 마구 먹는 공손아리를 보며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모를 위험에 너무도 무방비한 모습 때문이었다.
공손아리의 풀어진 머릿결을 뒤에서 세심하게 정돈해주며 선우초린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공손아리가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공손아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 선우초린을 바라보며 마테오 리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자리에도 앉지 않는 선우초린의 모습이 두 사람의 확실한 상하 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으시면 그쪽도 드셔도 되오.”선우초린은 마테오 리치가 차와 과자를 권유하자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원해서 있는 자리도 아니었으니 되도록 너무 깊게 저 사람과 관여되고 싶지 않았다.
한데 공손아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난 이탈리아(Italy). 이쪽 말로는 이태리(伊太利)라 부르는 곳에서 왔소.”“이태리…….”공손아리는 들어 본 기억이 있었기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많은가요?”마테오 리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 나와 같은 사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사람이요.”마테오 리치는 빙그레 웃었다.
역시 이 사람들도 자신의 특이한 외관에 관심을 가지고 호기심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외눈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소. 머리가 붉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금발이오.”“와…… 그럼 거기서는 그게 특이한 게 아니겠네요?”“물론이오.”오히려 그곳에 가면 동양인처럼 머리가 까맣고 갈색 눈인 사람들이 특이한 생물 취급 받는다는 사실은 굳이 말해 주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공손아리가 뒤에 있는 선우초린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 할아버지한테는 보여 줘도 되겠지?”“……개인적으로는 무척 말리고 싶습니다만…….”애초에 말린다고 들을 공손아리도 아니었기에 선우초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사실 그녀도 조금 궁금하긴 했다.
건안왕조차 사부라 부르는 이 괴상한 노인이 공손아리를 보며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둘이 수군거리는 것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녀들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다 보니 마테오 리치 역시 그녀들에게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강호에는 무슨 세력, 무슨 세력들이 많다고 들었는데…….’듣자하니 무림이라는 곳도 황실처럼 여러 가지의 단체로 나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서로 치열하게 힘 싸움을 하고 있는 모양새여서 그 틈바구니에 끼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라는 당부를 받고 나왔기에, 마테오 리치도 선우초린이나 공손아리가 소속된 단체가 어디인지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것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차분하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얼굴 전체를 둘둘 말고 있던 면사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마테오 리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면사에 가려져 있던 얼굴은 그가 예상하고 있었던 동양인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금발에 벽안(碧眼, 푸른 눈동자)의 미소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가진 친숙한 외모의 소녀가 그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손아리를 멍하게 바라보던 마테오 리치의 얼굴에 서서히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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