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135)
제135화 결단(2014.04.24.)
운휘는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어슴푸레 하늘이 밝아져 오는 것이 보였다.
딱 좋은 시간이었다.
운휘는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으로 감각을 넓혀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다.’때가 되면 찾아와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노진녕도 없고, 곁에서 몸 상태를 확인해 주던 선우조덕도 없었다.
완벽한 혼자.
‘아니, 혼자는 아니군.’고개를 힐긋 돌려보자 옆에 놓인 바구니에 쥐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막수가 보였다.
이 녀석은 대체 어디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줄곧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운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자신이 누군가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너는 지금 단전뿐만 아니라 십이정경, 임독양맥 전체가 아예 말라 버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말라 버린 정도가 아니라 크게 손상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니 화경의 고수라는 놈이 지금은 보통 사람보다도 못한 상태가 된 거지. 그래도 본래 이루었던 경지가 있으니 용케 목숨은 건진 게다. 그러니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요양하거라. 네 몸은 두 번에 걸친 충격에 지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침을 놓아 주며 몇 번이고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선우조덕을 떠올린 운휘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은 넉넉하게 일 년으로 잡자. 그것보다 짧게 잡으면 네 몸을 너무 혹사시키게 될 터이니 그건 피하는 게 좋다. 네놈이 아무리 화경의 고수라도 몸뚱이가 쇠붙이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니까. 수명을 단축시키고 싶지 않으면 내 말을 들어라.]일 년?운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너무 길다.’몸 안의 모든 기운이 다 타 버린 상태.
그것이 구휘의 일격을 감당한 대가였다.
당시의 몸 상태가 완전했다면 거의 피해 없이 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균형이 한 번 무너져 있던 상태라 너무도 큰 피해를 당했다.
으득-
운휘는 자존심이 상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괜찮았을 거라는 말은 사실 비겁한 변명에 불과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적들은 자신의 상태를 보면서 공격해 오는 게 아니니까.
운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다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 년이나 초류향의 곁을 비워 둘 순 없었다.
그의 작은 주인은 항상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곁에서 지켜야 했다.
노진녕.
그 얼간이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수명이 줄어든다고 했던가?’운휘는 피식 웃었다.
줄어드는 것이 단순히 수명뿐이라면 상관없지 않은가?
아까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천천히 가부좌를 틀고 침상에 앉아 운휘는 눈을 감은 채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잠시 후.
‘후우우.’농도 짙은 탁기가 입안에서 바깥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깊은 명상에 빠진 운휘는 최대한 길게 호흡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서서히 호흡법에 매달리던 운휘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괴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항상 바다와도 같은 막대한 내공이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었던 운휘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각조각 끊어져서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기운들을 하나씩 찾아내야 했다.
사실 그 작업은 쉽지 않았다.
근육과 뼈마디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을 쥐어짜내듯 긁어모아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 작업은 상상도 하기 힘든 고통을 동반했다.
‘한 달……. 적어도 그 안에 몸을 원상태로 회복시킨다.’그것이 운휘가 스스로에게 내린 과제였다.
운휘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로 고통을 참으며 몸 안의 내력들을 조심스럽게 통제했다.
그런 운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작은 바구니에 담겨서 며칠째 움직이지 않고 있던 새하얀 토끼는 운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무리하는군. 인간.’항상 복면을 쓰고 다니던 저 인간의 몸 상태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부가 정말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보통이라면 열 번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상태다.
그런데도 요양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렇게 무리하게 기운을 끌어모으는 것을 보니 지극히 멍청해 보였다.
‘하긴, 지금 나도 남 욕할 처지가 아니지.’괴물 같은 공손천기.
그놈과 그 제자인 안경잡이 꼬마를 떠올리니 저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막수 역시 지금 너무 극심하게 힘을 소진하여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때문에 정말로 쥐 죽은 듯이 잠만 자야 했다.
가끔 머리 노란 계집이 찾아와서 귀찮게 쓰다듬고 안아 주곤 했지만 몸을 움직여 저항할 힘도 없었다.
그래도 근래에 이렇게 가끔씩 눈이나마 뜰 수 있게 된 것도 인간들이 하는 저 이상한 ‘호흡법’ 덕분이었다.
‘길게 세 번 들이쉬고…… 두 번 내뱉는 건가?’저 당장 죽을 듯이 비실비실한 인간이 틈만 날 때마다 하는 숨 쉬는 방법을 조금 흉내 내서 따라 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조금씩이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막수에게 이것은 퍽이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답답할 정도로 느린 속도였지만 확실히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빠르게 힘이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에게 이런 방법을 배우게 될 줄이야…….’그동안 인간을 벌레처럼 무시해 오던 막수였다.
한데 근래에 너무도 엄청난 괴물들을 만나다 보니 인간을 보는 시각도 조금쯤은 달라지게 되었다.
인간이라고 우습게만 볼 게 아니었다.
특히나 이 독특한 호흡법.
‘대기 중에 흩어져 있는 기운을 인위적으로 끌어모아서 몸 안에 비축하다니…….’이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가?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답게 자연스럽지 못한 요상한 방법들을 연구해 온 모양이었다.
편법이었고, 대단히 불안정한 방식이었지만 지금의 막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막수는 본래의 힘을 회복하는 데 대략 수십 년이 걸릴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만큼 힘의 공백이 컸으니까.
한데 지금 이 편법을 사용하며 초류향 곁에서 여의주의 힘을 조금씩만 흡수할 수 있다면, 어쩌면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힘을 회복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막수는 그런 밝은 미래를 그리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힘을 회복하면 더 이상 하찮은 인간들과 드잡이질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놈들과 싸워서 남는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창피만 당했다.
‘이젠 쥐 죽은 듯이 지내며 힘만 회복해 주마.’확실하게 힘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복수는 그 다음인 것이다.
막수도 운휘의 옆에서 눈을 감고 천천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갔다.
* * *
“흐음.”머리를 뒤로 넘겨서 단정하게 묶은 사내.
천하제일 산법가 주호유.
그의 앞에는 엄청난 양의 문서들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다 검토한 주호유는 지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렵다.”문서들은 조기천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조사 결과.
그것들을 정리한 문서들이기 때문이다.
주호유는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생각에 빠졌다.
‘무림 말살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거기까지 생각하던 주호유는 갑자기 양손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운 얼굴을 해 보였다.
“으으…….”처음부터 다시 계획을 짜려고 하니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기천 선생님의 제자.
초류향이라는 이름의 소년.
그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지.’그런 일만은 기필코 막아 볼 생각이었다.
한데 조금 곤란하게 된 것은 대장군 척계광이 현재 무림에서 가장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공손천기라는 점이었다.
초류향은 그런 위험인물의 제자가 아닌가?
지금 주호유가 머리를 감싸 쥐며 고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떻게든 척계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주호유는 탁자에 놓여 있던 문서들 중 가장 위에 있던 것을 와락 구기며 중얼거렸다.
“무당파.”그들은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조사 결과 조기천 선생님의 직접적인 죽음은 무당파에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공도 모르는 조기천 선생님을 죽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주호유.
그가 지금부터 그렇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 * *
초류향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려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여인.
화령.
그녀의 처리를 어떻게 할지가 고민인 것이다.
초류향은 슬쩍 고개를 돌려 임학겸을 바라보았다.
조언을 구하는 시선.
그러자 임학겸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본 교의 율법대로 처리하신다면 죽이셔야 옳습니다만…….”임학겸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소교주님께서는 그러고 싶지 않으신 거지요?”“예.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죽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정말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게 초류향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임학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령 그냥 놓아 주신다고 하더라도 이 아이는 죽을 겁니다.”“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사대 가문에서 임무에 실패한 암살자를 그냥 살려 둘 리가 없었다.
여러모로 신경 쓰일 테니까.
분명 소리 소문도 없이 죽일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
초류향 입장에서는 놓아 줄 수도 죽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감금해 놓자니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초류향은 정말 심각한 난관에 부딪힌 셈이었다.
그때 임학겸이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소교주님만 괜찮으시다면 하녀로 거두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듯합니다.”“하녀요?”“예.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줄 수 있을 듯합니다만…… 본래 전문적인 암살자로 키워진 아이니 호위 목적으로도 쓸모가 많을 것입니다.”하녀라…….
그런 거추장스러운 존재는 솔직히 지금의 초류향에게 필요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부담스러운 짐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 언제까지 이렇게 어중간하게 살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초류향은 잠시 화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보세요.”화령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초류향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어서 대충 사정을 알 겁니다. 그러니 그쪽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초류향의 물음에 화령은 눈을 끔뻑거리며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내 의견?’애초에 그런 것이 왜 필요하지?
윗사람은 그냥 명령만 내리면 되는 것 아닌가?
죽으라 명령하면 죽으면 되는 것이고, 그 외에 어떤 일이라도 시키면 그대로 따를 뿐이다.
그것이 그녀와 같은 소모품이 할 일이었다.
화령은 난생처음 접해 보는 이 색다른 ‘명령’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화령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임학겸이 입을 열었다.
“널 죽이는 건 쉽다. 하지만 살리는 건 어렵지. 소교주님께서는 지금 너를 위해 그 어려움을 감수하려고 하시는 거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지금 말을 해라.”“…….”화령의 얼굴이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굳이 이런 어려움과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살려야 할 이유가 초류향에게는 없지 않은가?
‘대체 왜?’화령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즈음.
초류향이 드디어 생각을 정리했는지 안경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붉은색 거대한 눈동자가 초류향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심연술을 발동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제압하는 최고위의 술법.
“당신은 지금 죽고 싶습니까?”이글거리는 눈빛.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사람의 근원을 꿰뚫는 그 눈빛과 마주하자 화령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춥다.’왠지 모르게 한기가 전신에서 일어났다.
그 때문에 화령은 순간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동안 배워온 대로라면 당연히 죽고 싶어야만 했다.
임무에 실패했으니 자신은 폐기 처분 되어야 마땅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화령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행동에 화령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란 것은 지켜보고 있던 임학겸도 마찬가지였다.
‘임무에 실패한 살수가 스스로의 의지로 살기를 바란다?’이건 임학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대다수의 살수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게 세뇌되어 키워진다.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서 길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임무에 실패하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그것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보자 임학겸은 놀란 눈으로 초류향을 응시하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초류향을 바라볼 때.
초류향은 인형처럼 굳어 있는 화령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방금 그게 당신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소원대로 살려드리겠습니다.”초류향은 멍청하게 얼어 있는 화령을 뒤로하고 임학겸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을 제 하녀로 삼겠습니다. 현재로서는 그 방법밖에는 없어 보이는군요.”“……알겠습니다.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심연술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화령의 생각까지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직접적이고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었기에 심연술로 그녀의 정신을 순간적으로 흔든 것에 불과했다.
그러자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그거면 충분했다.
초류향은 엎드려 있던 화령을 일으키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화령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도 제대로 지금의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눈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의 모습만이 뇌리에 진하게 각인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