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137)
제137화 변정훈(2014.05.01.)
건안왕은 평소에 그 넘치는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다재다능한 천재였고, 인품 또한 모나지 않았기에 항상 그의 주위에는 인재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곁에 모인 인재들은 모두가 건안왕을 위하여 일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덕분에 건안왕은 항상 필요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쓸 수 있었고, 그 점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필요하다.”“어떤 자가 필요하십니까?”“무공이 대단히 뛰어난 자가 필요해. 적어도 나보다는 나아야겠지?”건안왕의 오른팔이자 왕야의 개인 참모직을 맡고 있는 변정훈(辨政勳)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상태로 입을 열었다.
“왕야의 무공이 이미 절정의 수준에 닿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한데 그보다 더 뛰어난 인재를 찾으신다 함은 화경의 고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화경의 고수라……. 그래, 그 정도라면 든든할 것 같군. 구할 수 있겠나?”“……태사와 관련된 일인 것입니까?”“그래. 사부와 관련된 일이다. 그러니 나 역시 이렇게 신중하게 준비하는 거지.”건안왕은 후원에 앉아서 마테오 리치가 묵고 있는 숙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부는 나보다 더 무림에 관심이 많아. 그는 비록 무림인이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도 사람을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혜안(慧眼, 지혜로운 눈)을 지니신 분이다.”건안왕은 저 먼 바다 건너에서 온 색목인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방대함에는 감히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건안왕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인재들을 보아 왔지만 마테오 리치처럼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성취를 보이는 천재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사부가 판단하기에 오늘 이곳에 방문했던 손님들 중 하나는 나보다 윗줄의 고수라고 했다.”“……!”“내가 나보다 강한 고수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알겠지?”“명을 받듭니다.”“혹시나 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사람을 구하기 어려우면 내 신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도 좋다. 외부에 드러나도 관계없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알겠습니다.”“그럼 부탁하마.”변정훈은 왕야를 향해 넙죽 엎드린 상태에서 몸을 일으켰다.
왕야가 그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최대한 빠르게 화경의 고수를 구해 오는 것이었다.
다행히 변정훈은 근방에 있는 화경의 고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 왕야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도.
* * *
주호유는 자신을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윗분들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만…….”“알고 있소. 하나 사안이 워낙에 중대해서 결례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그대를 찾아오게 된 것이오.”주호유는 고심했다.
상대방은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 않았기에 신분상으로는 주호유보다 아래였지만, 그는 황족인 건안왕이 수족처럼 부리는 자였다.
당연히 주호유로서도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화경의 고수를 내달라고 하는 것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언제 어느 시점에 대규모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 마당에 중요한 전력을 외부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왕야는 그대들이 이곳에서 비밀리에 특별한 작전을 수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오.”“…….”변정훈의 말에 주호유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황실에서도 황제를 제외하면 정말로 극소수의 관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무림 말살 계획.
이 비밀스러운 계획을 대체 건안왕이 어떻게 알았을까?
“왕야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시오. 주 학사, 그대의 능력이 뛰어남을 알고 있기에 왕야께서는 그대와 대장군이 하고 있는 이번 일을 모르는 척해 주고 있는 것이오.”“…….”무림 말살 계획.
이것은 분명 황제의 허락을 받긴 했다.
하나 아무리 황제가 허락했다지만 절대 겉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명령이었다.
현재 관직에 있는 모두가 이 무모한 계획에 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건안왕이 이것을 공식적으로 거론한다면 자칫 계획 전체가 백지화될 수 있었다.
그만큼 현재의 황제가 가지는 절대 권력이 많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주호유는 그 사실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패가 너무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쩌시겠소, 주 학사?”“……화경의 고수를 데려가서 어떻게 쓰려 하시는 것입니까?”“일에 대해서는 말해 줄 수 없음을 이해하시오. 그래도 왕야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니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거나 무모하게 일을 진행해서 그쪽에게 피해가 가도록 하지는 않을 것을 장담하겠소. 기간도 그리 길지 않을 게요. 어차피 우리 역시 다음 일정이 있으니 그 전까지만 왕야의 곁에서 보필해 주면 되는 것이외다.”주호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족의 유희인가?’황족들은 가끔 그 삶이 무료해지거나 하는 일이 없어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이상한 짓들을 하곤 했다.
수만금을 들여서 금으로 정원을 꾸민다든가 보석으로 만든 꽃들을 심는다든가……. 평범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도 힘든 짓을 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곳에 귀중한 전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주호유였지만 지금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은 이미 이쪽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을 예상하고 접근해 왔다.
그에 비해 자신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난타를 당하고 있는 셈이었으니…….
“이건 도리가 없겠습니다. 태 공공.”주호유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듯 말하자 갑자기 그의 뒤쪽 공간이 일렁거리며 하늘하늘한 새하얀 장포를 걸친 아름다운 사내가 걸어 나왔다.
“쯧, 저쪽이 완전 작정을 하고 왔으니 대책이 있을 리가 없겠지. 다녀올게.”“예. 몸조심하세요. 궁에서 어르신들이 나오실 때까지는 다치시면 곤란합니다.”태 공공은 특유의 나른한 얼굴로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고는 변정훈에게 다가갔다.
“내가 왕야께서 찾고 있는 화경의 고수다. 안내해라.”변정훈은 태 공공을 한 번 힐긋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처음부터 태공공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이곳에 현재 나와 있는 화경의 고수는 태 공공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하실 일에 대해서는 별장에 도착하면 왕야께서 직접 설명해 주실 겁니다.”“부디 재미있는 일이기를 기대해 보지.”“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왕야께서는 그릇이 크신 분이시거든요.”변정훈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태 공공은 자신의 붉은 입술을 혀로 한 번 핥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하시는 기행(奇行, 기이한 행동)에 대해서 평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재미있겠군.”황족의 유희는 평소 궁에서도 지겹게 보아 왔던 태공공이다.
건안왕은 그런 황족들 중에서도 황제를 제외하면 발군의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
과연 얼마나 커다란 유희를 즐길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 * *
“아! 이거 정말 곤란한데.”엄승도는 자신에게 올라온 문서를 받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공손아리와 선우초린.
그녀들이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 워낙에 선우초린이 이런 면에서 경계를 착실히 했기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사고를 쳐도 아주 대형 사고만 골라서 치는구만. 하필 건안왕이랑 엮일 건 또 뭐야…….”엄승도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이러다가 오십 줄에 들어서기도 전에 대머리가 될 판이었다.
그의 얼굴이 복잡해질 때쯤.
뜻밖에도 선우초린이 먼저 그를 불쑥 찾아왔다.
“묻고 싶은 게 있어.”엄승도는 갑자기 찾아온 선우초린을 힐긋 바라보며 팔짱을 끼었다.
“물어보시든지.”
둘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과거 엄승도는 선우가의 가주인 선우강진의 부름을 받고 갔다가 그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선우초린에게 개 맞듯이 처맞은 적이 있었다.
‘기습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었지…….’억울했다.
사실 무공 수위를 보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엄승도와 선우초린은 서로 엇비슷했다.
선우초린이 미세하게 앞서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실낱같은 차이였다.
오히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실전 경험이 많은 엄승도가 유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과거에 선우초린에게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바닥에 매다 꽂힌 적이 있던 엄승도로서는 그녀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자 체면에 뭐라고 할 수도 없으니 속앓이만 해 온 것이다.
선우초린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엄승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쫌생이.”“뭐?”엄승도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날 때.
선우초린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질문했다.
“건안왕이 움직였다면서.”“……귀는 열어 두고 사는군.”“소군주님에게는 알리지 않았어.”“어째서?”말려야 했다.
그래야 만약의 사고를 줄일 수 있으니까.
선우초린 역시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초에 공손아리를 말릴 마음이 없었다.
그랬기에 엄승도를 힐긋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군주님이 원하는 건 그대로 다 할 수 있게 내버려 둘 참이거든.”“……미쳤군.”소군주님.
즉, 공손아리가 사실을 알게 되면 상당히 실망하겠지만 이번 일은 그녀를 설득해서 바깥출입을 통제하는 것이 옳았다.
“방법을 생각해 봐.”엄승도는 선우초린을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선우초린 역시 그런 엄승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엄승도의 얼굴에 차츰 경련이 일어났다.
“……네년 뻔뻔한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그게 부탁을 하는 사람의 태도냐?”선우초린은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
“이쪽이 사고를 치면 골치 아픈 건 너야.”“……끙.”분하지만 선우초린의 말이 맞았다.
저들이 사고를 치면 항상 뒷수습은 엄승도의 몫이었던 것이다.
엄승도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인정했다.
다행히도 일이 커지기 전에, 알게 되었으니 그것을 최대한 축소하고 이왕이면 사고가 터지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 엄승도가 해야 할 일이다.
‘방법이 없나?’엄승도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냥 확 교주님에게 알려?’그게 제일 편하긴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교주 공손천기가 움직이면 일이 너무 커지게 된다.
뒷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는 황족이었다.
만약에라도 공손천기가 그를 상하게 한다면 그 후의 일은 정말 걷잡을 수가 없다.
‘젠장! 누구 없나?’적당한 사람이 필요했다.
움직이더라도 딱히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 사람.
다만 그 힘만은 확실히 압도적이어야만 했다.
엄승도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하고 있을 때.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교주님에게 부탁해 봐.”선우초린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소교주님과 함께 움직이라는 말인가?”엄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진녕님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셨고……. 소교주님 그분도 강하시니까. 게다가 여차하면 진법도 사용할 줄 아시고…….”선우초린은 엄승도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좋은 방법이긴 했지만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꼬마와 동행이라니?
잠시 이런저런 요소들을 고려해 가며 저울질하던 선우초린은 결국 마뜩잖은 얼굴로 엄승도를 바라보았다.
“일단은 소군주님의 안위가 최우선이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엄승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예상보다 이 괴팍한 녀석이 순순히 동의한 것이다.
그때 선우초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소교주님을 움직일 방법이 있어?”엄승도는 피식 웃었다.
“물론이지. 소교주님은 반드시 움직이실 거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내가 말해놓지.”선우초린은 잠시 미심쩍은 얼굴을 해 보였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엄승도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였다.
이 사내는 비록 속은 좁을지언정 이런 일에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