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165)
제165화 흔적(2014.08.07.)
예부터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음)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에 있는 천당에 비할 만큼 아름다운 곳.
그곳이 바로 소주와 항주다.
절강성(浙江省)에서 가장 아름답고 번화한 항주.
그런 항주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서호(西湖)에 초류향이 등장한 것은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여기다.]“…….”초류향은 이틀 동안 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다.물 한 모금조차 입에 대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전력으로 질주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라 하더라도 이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었다.
하나 초류향은 그런 데는 관심도 두지 않고 그저 멍하니 노을 져 가는 서호의 강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억이…… 난다.”초류향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곳에 도착해서 이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
단편적인 기억이 또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서호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 바람이 찹니다, 주군.”운휘는 초류향의 옷깃을 단단히 여미어 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피로한 기색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적들의 끈질긴 추격으로 인해 화경의 고수인 그도 탈진해 버린 것이다.
운휘가 이렇게까지 지친 이유는 간단했다.
초류향과 화령을 보호하느라 쓸데없는 동작들이 많아서였다.
그는 몸 여기저기에 자잘한 부상을 입었지만 자기 상처들은 돌볼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초류향의 안위만을 살폈다.
이곳저곳 꼼꼼하게 초류향의 전신을 살펴본 운휘는 안도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설핏 웃으며 말했다.
“주군께서 기억이 없으시니 오히려 주군과 더 많은 말을 나누게 된 것 같습니다.”초류향은 그런 웃는 낯의 운휘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마주 웃어 보였다.
그 해맑은 웃음을 마주하자 운휘는 자신도 모르게 초류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스윽-
초류향은 급하게 손을 떼는 운휘의 팔을 덥석 잡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운휘를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운휘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초류향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운휘가 말했다.
“제가 제일 처음 주군을 모시면서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초류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운휘는 그런 초류향의 머리를 정돈하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 저는 앞으로 남아 있는 제 모든 시간을 소교주님께 드리겠다고 했습니다.”“…….”초류향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 내며 한 걸음 떨어진 운휘가 말했다.
“이제 그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주군.”갑작스레 운휘가 떨어지자 초류향이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하나 운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저 혼자 가야 합니다, 주군.”운휘는 초류향의 뒤쪽에 묵묵하게 서 있는 화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미끼가 된다. 뒤로 가서 흔적들을 다 지우고 가겠다.”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임을 그녀도 알았던 것이다.
지금으로써는 초류향을 살리는 것이 그들의 최우선 목표였으니까.
이제 운휘와는 살아서 만날 확률보다 죽어서 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화령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부탁한다, 화령.”“걱정 마세요.”화령은 허리춤에 있던 끈을 풀어 초류향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초류향을 업어 그 끈으로 자신의 몸과 초류향을 단단하게 조인 후 입을 열었다.
“보중하세요, 운휘 님.”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분고분하게 화령의 등에 업혀 있는 초류향을 바라보며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적어도 저보다 먼저 가시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주군.”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초류향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운휘를 만지려 했다.
하나 닿지 않았다.
등을 보이며 그에게서 멀어져 가는 운휘.
그것이 초류향이 이곳에서 본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초류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두 주먹을 움켜쥐고 바닥을 거세게 밟았다.
콰아아아앙-!
바위가 산산이 부서지고 주변에 있던 나무와 풀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솨아아아-
초류향은 그것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며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타오르는 무언가를 애써 억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걸 아무거나 부숴 버리고 싶었다.
‘나는 한심하다.’이 자리에서 웃으며 운휘를 떠나보낸 스스로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운휘는 이 자리에서 떠날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초류향은 운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쩔 거냐고 물었나?”[그래.]“뻔한 것 아니야?”다음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찾아야 했다.
운휘가 마지막으로 간 방향이 이쪽이니 그 뒤를 따라가 봐야 할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흔적을 찾을 순 없겠지만 최대한 수소문할 생각이었다.
‘반드시 찾겠다.’살아 있을 것이다.
운휘라면, 그라면 살아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화경의 고수였으니까.
초류향이 알고 있는 운휘는, 어떤 위기가 닥쳐도 쉽게 죽어 줄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 옆에 없었던 것은 단지 길이 엇갈렸기 때문이다.’초류향은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며 운휘가 사라졌던 방향을 더듬어 가며 걷기 시작했다.
* * *
초류향이 운휘의 흔적을 쫓아 걷고 있는 사이, 어느샌가 서호는 여기저기 화려한 밤의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다는 서호의 밤이 찾아온 것이다.
길거리는 색색의 불빛들이 가득해졌고, 골목 어귀마다 남녀가 즐겁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왁자지껄하고, 흥청망청한 분위기의 거리를 초류향은 묵묵하게 걷고 있었다.
[과연 인간들이로군.]막수는 인간들의 유흥을 지켜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그렸다.저급하고 미개하게 노는 모습이 볼썽사나웠던 것이다.
막수가 초류향을 향해 말했다.
[너는 설마 그 복면 쓴 놈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것이냐?]“…….”초류향은 잠시 자리에서 멈칫한 다음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그리고 막수의 눈을 바라본 다음 말했다.
“죽었을 가능성이 더 낮다.”[어째서?]당연한 일이다.
초류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운휘의 모습을 그리다가 입을 열었다.
“운휘는 그런 사람이니까.”[……너도 대책이 없는 놈이다.]초류향은 막수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걸었다.
막수를 납득시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초류향은 그가 무조건 살아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 찾기만 하면 되었다.
그를 찾으면 그 이후의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될 것이다.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지금 가장 큰 문제는 운휘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고 확신은 하지만 어디에 있을지는 알 수가 없는 상황.
사실 혼자의 힘으로 그를 찾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초류향도 잘 알고 있었다.
대륙은 너무도 넓었으니까.
그래서 조력자가 필요했다.
사람을 찾는 능력이 뛰어난 아주 든든한 정보 조직.
그것을 이끌고 있는 사람을 만나야 했다.
‘과연 이 상황에서 나를 도와줄 만한 단체가 있을까?’잠시 궁리하고 있자니 머릿속에 두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둘 다 애매모호했다.
‘그래도 결정해야 한다.’한 명은 초류향이 찾아가면 곤란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할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초류향이 찾아오면 기쁘게 맞이하겠지만 반대로 초류향 본인이 힘들어질 사람이었다.
‘그럼 답은 나왔군.’초류향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초류향은 곧장 흑월회의 분타를 찾아갔다.
* * *
“누가 저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구요?”“엄승도라고 했습니다.”“엄승도요?”“예. 이름만 말하면 알 것이라고 했답니다.”적갈색의 풍성한 머리카락.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이지만 그 두 눈만큼은 밤하늘의 별처럼 밝은 여인.
냉하영.
그녀는 수하의 보고를 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아는 엄승도는 천마신교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왜?’그는 천마신교의 그림자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밖에 드러난 적이 없던 그 그림자가 이렇게 겉으로 대놓고 자신을 만나러 오다니?
‘천마신교 내부에 뭔가 큰 변화가 생긴 건가?’그렇다면 이건 확실히 중요한 정보였다.
자연히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가 지금 어디 있다고 하셨죠?”“절강성 항주 분타에 있다고 합니다.”절강성이라고?
사천성과는 완전히 반대쪽이 아닌가?
냉하영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녀답지 않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절강성 항주 분타에 엄승도가 있다구요?”“예, 군사님.”냉하영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톡- 톡-
검지로 탁자를 가볍게 치던 냉하영은 서서히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러고 보면 엄승도라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엄승도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번거롭더라도 그 얼굴을 아는 냉하영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 외에는 엄승도가 맞는지 확인해 줄 사람이 흑월회에 없는 것이다.
냉하영은 이 사실에 주목했다.
‘재미있는데?’만약의 이야기지만 엄승도와 그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사실을 얼마든지 써먹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냉하영은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말했다.
“저를 찾아온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용모파기가 있겠죠? 그것을 가져오세요.”“예.”냉하영은 쉽게 아무렇게나 움직일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흑월회라는 거대한 단체의 두뇌였고, 허투루 움직이는 것은 그만큼 큰 손해를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가장 확실할 때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잠시 후 수하가 건넨 한 장의 용모파기를 보던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얼굴이 무척 낯이 익었던 탓이다.
‘어디에서 본 거지?’그녀는 자신의 기억력을 믿었다.
분명히 이 얼굴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가만히 용모파기를 들여다보던 그녀는 그 종이를 살짝 옆으로 돌려보고 조금 떨어져서 보다가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아는 분이 맞으십니까?”“…….”냉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용모파기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확신이 없었다.
너무 많은 점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수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가 정말 저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나요? 분명히 무언가 말을 했을 텐데요?”단순히 이것만 가지고 확신할 순 없다.
비슷하긴 해도 용모파기 하나만으로 단정 짓고 움직이기엔 그녀의 위치가 가볍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그’라면 분명 하나의 단서를 더 주었을 것이다.
과연 수하는 조금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군사님께서 자신에게 전한 말이 정말 없냐고 확인차 물어보신다면 이 말을 전해 주라고 했습니다.”“그가 무어라 했나요?”“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너와 거래를 하고 싶다. 라고…….”냉하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확실했다.
절강성에 있는 사람은 분명 그가 맞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찾고 있었던 이가 아닌가?
‘이제 강호가 변할 것이다.’지금 이 시점에서 그의 등장은 아주 많은 것을 바꿀 것이다.
천마신교는 아직까지 단단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지만 분명히 속으로 균열이 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냉하영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유는 불명확했지만 그 단단했던 천마신교에서 조금씩조금씩 정보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거기서 흘러나온 정보의 조각들을 모으고 모아서 얼마 전에 겨우겨우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 냉하영이었다.
‘공손천기는 더 이상 천마신교에 없다.’냉하영은 이 결론을 내려 놓고 고민했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이제 확신을 줄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만나면 완전한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