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170)
제170화 의식(2014.08.25.)
금빛 머리카락.
비췻빛 눈동자.
오 년이라는 시간은 소녀를 여인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공손아리.
그녀는 이제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고,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되었다.
“린.”“네, 소군주님.”“바깥은 요즘 어때?”린과 령.
공손아리의 수신호위인 그녀들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가 있을 예정이래요.”“무슨 회의?”린은 잠시 망설였다.
가급적 공손아리가 외부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공손아리도 꼭 알아 둬야 하는 일인 것이다.
“……초류향 소교주님을 축출하고 새로운 교주님을 선출하려는 목적의 회의예요.”공손아리는 멈칫했다.
그러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예.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지요.”린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이화궁에 갇힌 채 오 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공손아리.
그녀는 지금 인질이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에 하나 백치가 되어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초류향이 교로 복귀하게 되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옭아매기 위한 인질인 것이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 사방에는 사대 세가의 고수들이 그녀를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었다.
“호법 할아버지들은 정말 최선을 다하셨어.”“예.”“하지만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는 문제겠지?”회의 결과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약 정말로 초류향을 축출하기로 결정이 된다면 천마신교에서는 그를 죽이기 위해 고수들을 파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이들을 모두 말살하려 들 것이다.
공손아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공손아리는 전대 교주의 혈육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정식적인 교주 승계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교주가 즉위하게 된다면 보통은 제일 먼저 죽을 운명이었다.
“아빠는 거짓말쟁이였나 봐.”“공손천기 교주님이요?”“응.”공손아리는 약간 풀 죽은 음성으로 대답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아빠는 얌전히 사고 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거든. 그럼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교주님이 그런 말을 하셨어요?”공손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린과 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죽으면 린과 령은 슬프겠지?”“…….”“너무 괴로워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 이건 린과 령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알겠지?”“…….”린과 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프다?
‘정말 단순히 그런 감정만이 들까?’아주 어릴 때부터 공손아리의 곁에서 함께 지내 왔던 린과 령이었다.
사천 지역에 공손아리가 나가기 전까지는 단 한시도 떨어져 본 적 없이, 셋은 자매처럼 자라 왔다.
그렇게 애지중지 지키고 돌봐 온 공손아리가 죽는데 단순히 슬프기만 할까?
린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먹먹해졌기에 고개를 돌렸고, 령 역시 고개를 떨궜다.
그녀들의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공손아리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나 무기력한 그녀들과는 다르게 공손아리를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힘이 있었다.
“누구 맘대로 소군주님이 죽어요?”이화궁의 후원.
공손아리가 따로 머물고 있는 별궁 입구에 늘씬한 미녀가 나타났다.
선우초린.
그녀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린과 령을 노려보았다.
“제가 있는데 소군주님이 왜 죽어요? 절대 그런 일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링링…….”“지금 회의 결과가 나왔어요.”선우초린은 자신 앞에서 바짝 긴장해 있는 린과 령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척살령이 떨어졌어요. 소교주…… 아니, 이제 그냥 초류향이군요. 그 녀석을 죽이기 위해서 본 교의 고수가 파견될 거예요.”“……그렇게 되었구나.”“예. 놈은 죽겠지만 소군주님은 걱정 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살려 낼 테니까.”선우초린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차라리 지금 상황이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위급한 상황이 온 덕분에 자신이 공손아리의 신변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주지 않아.’사대 세가에서도 선우초린이 직접 나서서 공손아리를 관리하겠다고 한다면 말릴 명분이 없었다.
선우초린은 단순히 사대 세가의 일원이 아니라 천마신교 십대 무력 단체 중 하나인 이화궁.
그곳의 궁주가 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죽어라.’선우초린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꼬맹이 초류향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 * *
황실에서는 안휘성으로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안휘성은 정도맹의 중심부와 매우 가까워서 이곳을 무너뜨린다면 정도맹의 기세는 상당히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정도맹 역시 황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이곳이 앞으로의 전쟁을 판가름할 최대 분수령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쾅-!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그는 무당파를 상징하는 검은 소나무가 새겨진 도복을 입고 있었다.
사내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책상을 내려친 후 입을 열었다.
“이게 정말 사실입니까?”“그렇다더군. 제갈세가에서 올라온 보고서니까 믿을 만하지.”“감히 마교 놈들이…… 미쳤군.”뿌드득-
사내는 낮게 이를 갈았다.
그의 이름은 유설빈.
구주십오객의 하나이자 태극검황의 후계자인 사자검군 유설빈이었다.
“일단 수라마군, 그 녀석 단독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니까 조금 더 지켜봐야지.”“지켜볼 게 뭐 있습니까? 제가 가서 놈을 처리하고 오겠습니다.”상관중달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전력의 핵심이 될 수 있는 화경의 고수를 함부로 외부로 돌릴 순 없었다.
“너무 경거망동하지 말게. 지금은 가장 확실할 때만 움직여야 하니까. 놈이 정말 그 수라마군이 맞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야.”“끙…….”유설빈은 수긍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일단 놈이 마교의 졸자가 맞는지부터 확인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은 저기보다는 안휘성 쪽이 문젠데…….”상관중달은 탁자에 놓여 있는 지도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실 때문에 요즘 정도맹은 정말 미칠 듯이 바빴다.
주호유는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치밀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초반에 그에게 무차별적으로 당한 덕분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와해 직전까지 갔던 정도맹이다.
‘다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당시에는 적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상대방은 이쪽에 대해 훤히 알고 있는데 이쪽은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던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겨우 주호유에 대해 알아내어 대응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조금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놈들의 이번 목표는 안휘성이 확실합니까?”“거의 확실하지. 문제는 어느 정도의 전력이 오느냐인데, 그 점을 모르겠어.”“안휘성에는 남궁세가가 있지 않습니까?”“그들만으로는 부족해.”“들어보니 남궁윤호 선배님도 나오셨다는데…….”“화경의 고수 한 명으로는 부족하지. 황실에서 이번에 나온 화경의 고수는 밝혀진 것만 해도 셋이거든.”“세 명이요?”“그렇지.”사자검군 유설빈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화경의 고수가 셋이라니?
이건 정말 감당이 안 되는 숫자이지 않은가?
“……아주 작정을 했군요, 그놈들.”“애초에 그 정도 준비도 없이 무림 말살 정책을 펴겠다고 나섰겠는가?”황실의 주호유.
그를 상대하고 있는 것은 정도맹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상관중달이었고, 그는 정말 이래저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며 촘촘하게 그물을 짜고 있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
때문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수라마군이라는 이름은 그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수라마군은 잘 짜인 그물을 한 번에 찢어 버릴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이걸 우리에게 유리하게 써먹을 수는 없을까?’사실 상관중달은 이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자네는 안휘성으로 가 주게.”“가서 남궁세가를 도우라는 말씀이십니까?”“그렇지. 남궁세가가 분명 강하긴 하지만 단신으로 황실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겠지. 하나 자네가 돕는다면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 만할 걸세.”버틸 만하다?
유설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황실이 어느 정도의 전력을 투입할지 모르는 이상 버티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저와 남궁세가가 언제까지 버티면 되는 겁니까?”이것이 가장 중요했다.
유설빈의 질문을 받은 상관중달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은거하신 자네 사형인 태극검황과 본 정도맹의 현재 맹주님이신 신승 공야 대사가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되네.”유설빈은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신승 공야 대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태극검황이라니?
그의 사형은 분명 무공의 완성을 위해 은거한다고 공언하지 않았던가?
잠시 그 말뜻을 되새김질하던 유설빈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사형이 은거를 푸셨습니까?”상관중달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최고의 극비사항이었다.
삼황의 하나.
태극검황이 드디어 오 년간의 은거를 깨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깨달음이 있으셨다더군. 본인이 직접 기대해도 좋다고 하셨네.”유설빈의 눈가에 빛이 번뜩였다.
“드디어 극의를 얻으신 모양입니다.”“그러셨겠지. 검황께서 자신감이 없었다면 애초에 나오지 않으셨을 테니까.”상관중달의 설명을 들은 유설빈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전 먼저 안휘성으로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최후의 싸움을 위해…….”“최후의 싸움이라…….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 신승 공야 대사님과 검황 백무량 님께서 함께 간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겠어.”상관중달은 미소 지었다.
정말 계획대로 된다면 이번 싸움으로 확실하게 황실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도맹이 다시 과거의 전성기 때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유설빈을 배웅하며 상관중달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떨려오는 것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 * *
창천검군 남궁윤호는 혼자만의 숙소에 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어떠한 소음도 허용되지 않는 그 고요한 마음에 그는 한 자루의 검을 세워 보았다.
고색창연한 검.
그것은 마음속에서 두 개가 되었다가 세 개로 늘어나며 자꾸 그 숫자를 불려 나갔다.
마침내 사방이 검 그림자로 가득 차서 엄청난 검의 폭풍이 몰아쳤지만 남궁윤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것이 아니다.’방금 보인 것은 창천무애검법의 궁극이었다.
하나 이것은 오래전에 이루었다.
그때 이미 끝에 도달했다고 느꼈는데 사실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위에 무언가가 더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얻어온 것보다 더욱 크고 거대한 무언가.
그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연마하고 있었는데 가문에 일이 생겨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지금 남궁윤호의 머릿속은 온통 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궁극을 뛰어넘어야 한다.’궁극의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직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그것을 얻게 되면 아마도 삼황이 이루어 놓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손끝이 간질거려 왔다.
깨달음이라는 녀석이 잡힐 듯 코앞까지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조급해하지 말자.’여기서 조급한 마음을 먹으면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남궁윤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차분하게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은거를 풀고 나서 세상에 나온 후.
갑자기 접하게 된 엄청난 양의 정보.
그것들을 조용히 정리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많은 정보의 대부분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 외의 무림 정세나 가문의 위기는 사실 남궁윤호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못했다.
‘가족…….’그가 오랜 기간 은거를 하고 있는 동안 식솔들이 많아졌다.
가문의 핏줄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식솔들 중에 재능 있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기뻤다.
가만히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던 남궁윤호는 불현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옥빈……?’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릴 때 이상하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뭘까?’남궁윤호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남궁옥빈.
이 아이의 재능은 핏줄 중에서도 가장 특출했다.
이대로만 잘 자란다면 어쩌면 그 아이는 가까운 미래에 벽을 뛰어넘을지도 몰랐다.
유난히 그 아이 주변만 빛이 반짝였던 것이다.
한데 단지 그것뿐일까?
‘뭐였지?’분명 그 아이에게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
그게 뭘까?
남궁윤호는 의식을 집중했다.
그가 놓친 무언가가 남궁옥빈 ‘주변에’ 있었다.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반드시 잡아내야만 하는 무언가.
‘무엇이냐?’남궁옥빈 주변에 강하게 의식을 집중하던 남궁윤호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기억 속, 남궁옥빈의 바로 옆에 어떤 청년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가 강하게 ‘의식’하자 비로소 보였다.
남궁윤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