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184)
제184화 과거의 인연(2014.10.13.)
다그닥다그닥-
질주하는 말들의 가장 선두.
빛나는 금색 장포를 걸친 미남과 그를 호위하듯 양옆에 붙어 있는 두 명의 젊은 미청년.
금색 장포의 미남이 꽤나 재미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척계광이 이렇게 도망가는 재주도 뛰어난지 내 미처 몰랐구나. 벌써 열흘 가까이나 도망 다니지 않았느냐?”왼쪽에 있던 선이 얇은 미청년이 송구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모두가 주호유라는 애송이의 수작질이옵니다. 녀석만 없었다면 진즉에 척계광을 사로잡았을 것이옵니다.”“주호유?”“예. 왕야를 만나기 전까지 그놈 때문에 고생깨나 했습니다.”왕야라 불리는 자.
그는 최근에 화경의 경지에 올라선 건안왕이었다.
건안왕은 미칠 듯이 질주하는 말 위에서 흥미롭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호오라? 저번에 내 앞에서 어설프게 진법을 사용했던 놈이 그놈인가 보구나.”“예. 만약 왕야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눈앞에서 놈들을 놓칠 뻔했사옵니다. 저희가 운이 좋았습니다.”그랬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
뜬금없이 산길에서 진법에 갇혀 있을 때.
절망적인 마음뿐이었는데 마침 부근을 유람 중이던 건안왕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그때 건안왕과 함께 있던 색목인 노인.
‘이마두, 아니, 마테오 리치라 했던가?’그는 황실의 고수들을 가둬 두었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진법을 단숨에 파훼해 버렸다.
그건 황실 금의위를 이끌고 있는 류대오에게는 실로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주호유라면 당금 세상에서 인정하는 천하제일 진법가가 아닌가?
그가 작심하고 펼쳐 놓은 진법을 단번에 파훼하다니?
존경을 넘어서 경이롭기까지 한 장면이었다.
“그 녀석 참으로 불쌍하구나. 하필이면 스승님과 마주치다니…….”건안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류대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맞장구쳐주었다.
“그렇습니다. 리 태사님과 마주친 건 놈들에게 불행입니다. 게다가 화경의 고수인 왕야와 함께하여 저희는 더욱 든든해졌습니다.”“내가 무슨 도움이나 되겠는가? 그저 구경이나 하는 거지.”류대오는 건안왕을 향해서 무한한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건안왕은 절정 고수 수준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몇 년 사이에 벌써 화경의 경지를 돌파하다니.
‘아마 황족으로는 황실 역사상 최초의 화경의 고수일 것이다.’대단한 업적이었다.
물론 다른 황족들은 이런 것에 관심조차 없겠지만.
“거의 다 따라잡은 거 같은데…….”“예. 놈들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말을 계속 바꿔 타며 추적하는 그들과는 다르게 척계광과 주호유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마차로 달리다가 얼마 가지 못해서 말이 지쳐 쓰러진 뒤로는 두 다리로만 달렸던 것이다.
“기대되는구만.”척계광.
그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쪽으로는 왜구들과 수십 차례 싸워 그들의 발호를 억눌렀던 구국의 영웅이요, 북쪽으로는 몽고의 오랑캐들을 무찌른 위대한 장수가 아니던가?
그가 지금껏 저술한 병법서가 한둘이 아니었고, 그가 조련한 병사들이 행한 업적 또한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 척계광이 반역을 했다?’맨 처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건안왕은 배꼽을 잡고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아마 황실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지. 아마 단 한 명은 모르고 있겠지.’당금의 황제인 만력제.
간신들의 혓바닥에 녹아난 그를 제외한다면 이번 일을 벌인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엉망진창이군.’건안왕이 이 반역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굳이 끼어들지 않은 것은 그도 지금 황실에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황족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몸을 움직이면 참수당하고 말 정도의 거대한 바람.
‘좀 더 허리를 굽히는 법을 알아야 했다. 척계광.’정치라는 것은 그러했다.
충직하고 올곧은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가끔은 눈을 감아 주기도 하고 융통성 있게 처세를 하면서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했는데, 척계광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너무도 꼿꼿했고, 모든 일을 원칙적으로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청렴함이 고위 관리들에게는 아니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쉽군.’건안왕은 사실 이 추적에 굳이 가담할 필요가 없었다.
저들이 도와 달라고 했지만 무시해도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추적을 못 이기는 척 따라온 것은 척계광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맨 처음 그와 마테오 리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주호유가 설치한 진법을 파훼해 주었다.
오랜 외유로 인해서 황실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진법 하나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주호유로서는 날벼락이 따로 없는 일.
‘서로 재수가 없었던 일이지.’그때 만약 건안왕과 마테오 리치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척계광은 무사히 국외로 도망을 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안하구만, 척계광.’그냥 가기엔 여러모로 찝찝했다.
구국의 영웅,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장군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다는 불명예는 절대로 얻고 싶지 않았던 건안왕이다.
그는 이 추적에서 표 나지 않게 척계광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없을까 고민 중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저 멀리 멈춰 서 있는 마차가 보였다.
‘저들인가?’마차 앞에 누군가가 홀로 나와 서 있었다.
큰 키에 뽀얀 얼굴.
흑발의 긴 머리를 뒤로 가볍게 묶은 앳된 얼굴의 사내.
조각 같은 얼굴에 서늘한 눈빛이 인상적인 미남자였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건안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왼쪽에 있던 류대오가 입을 열었다.
“첩혈!”“옙, 장군님!”금의위의 대장군 류대오.
그가 자신의 오른팔이자 화경의 고수 첩혈을 바라보며 짧게 명했다.
“저놈을 치워라.”“명을 받듭니다!”첩혈이라 불리는 화경의 고수는 명령을 듣자마자 곧장 말 등을 박차고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면서 건안왕은 고민했다.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말려야 할 것 같은데?’저 앞에 혼자 서 있는 놈에게서는 아무런 기세도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놈은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왜 불안한지도 모르는 채 건안왕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놈의 손에서 붉은빛이 이글거리며 뿜어져 나오자 건안왕은 눈을 부릅떴다.
“수강!”손에서 강기를 뿜어낼 수 있는 경지.
저놈은 화경의 고수였다.
‘하긴 그러니 저렇게 혼자 서 있었겠지.’건안왕은 첩혈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 검강과 마차 앞의 수상한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강기를 바라보았다.
‘뭐지?’언뜻 보기엔 둘의 힘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둘 사이가 가까워지기 직전.
수상한 놈의 입가에 떠오른 살기 짙은 미소.
그것을 본 건안왕은 자신도 모르게 말고삐를 강하게 잡아챘다.
히히힝-!
건안왕이 타고 있던 백마가 앞발을 높이 들어 올리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동시에 첩혈과 수상한 놈이 강하게 충돌했다.
콰아아앙-!
건안왕은 말을 멈춰 놓고 옆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서 나란히 따라오고 있던 류대오도 어느새 자리에서 우두커니 멈춰서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방이었지?”“……예, 왕야.”“이제 어떻게 할 건가?”류대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방금 전.
첩혈과 저 수상한 놈은 강하게 부딪쳤다.
그리고 그 반발력을 사용해 첩혈이 몸을 뒤집어 다시 한 번 일격을 날리려 할 때.
저 수상한 놈이 반 발자국 정도 빨리 움직였다.
‘주먹 한 방.’가볍게 뻗은 주먹질.
헐렁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뻗은 손.
하지만 그 가벼운 주먹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실려 있었다.
화경의 고수를 단 한 방에 빈사 상태로 만들어 바닥에 꽂아 버린 것이다.
‘저런 무공이 존재했나?’건안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거대한 힘을 뿜어내기 위해서는 준비 동작 역시 크거나, 힘을 모으기 위한 잠깐의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저놈에게는 그러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너무도 평범했고, 그러면서도 빨랐다.
그런데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보이지 않는가?
건안왕이 저 무공이 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류대오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비명처럼 입을 열었다.
“패력수라권! 네놈은 수라마군이냐!”“……!”그 말에 건안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무공이 천하에 하나 있긴 했었다.
‘수라환경의 패력수라권이면 말이 되지.’수라환경.
현재 천하제일 무공이라 불리는 그 절대의 마공.
지난 정마대전에서 천마신교의 교주인 공손천기가 세상에 보여 준 패력수라권.
태극검황 백무량이 공손천기의 단순한 주먹질 한 방에 실신해 버린 사건은 아직도 강호에서 유명하지 않던가?
‘수라마군이라…….’저놈은 분명 공손천기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공손천기와 함께 유일하게 수라환경을 익히고 있는 자.
수라마군 초류향.
천마신교의 후계자가 분명했다.
왜 낯이 익었나 했더니 과거에 만난 그 꼬맹이였던 모양이다.
‘많이 컸는데?’건안왕이 초류향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살펴보며 과거 놈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고 애쓰고 있을 때.
류대오가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라마군, 네 이놈! 감히 대역죄인 척계광을 비호하다니 네놈이 드디어 미친 게냐? 무림에서 설치더니 황실의 힘까지 우습게 보이더냐!”“…….”초류향은 대역죄인이라는 말에 일단 침묵을 지켰다.
사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일이 더럽게 꼬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너무 무턱대고 나선 건가?
초류향이 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마차의 문이 열리고 노진녕이 걸어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주군?”사방으로 뻗치는 위압감.
노진녕은 일부러 기세를 잔뜩 끌어 올린 채 초류향을 향해 다가왔다.
‘이게 무슨…….’초류향이 의아한 눈을 할 때.
그의 귓가에 전음이 들리고 초류향은 흐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초류향은 기세를 풀며 류대오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오해? 무슨 오해?”류대오는 흥분한 얼굴로 초류향을 바라보았다.
“이 마차에는 척계광이 없습니다.”“거짓말하지 마라!”“확인해 보시겠습니까?”태연하게 말하는 초류향을 바라보며 류대오는 얼굴을 찡그렸다.
저놈이 진법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 안에 무슨 개수작질을 펼쳐 놓았을까?
‘하지만…….’류대오는 비릿하게 웃었다.
이쪽에는 마테오 리치가 있지 않은가?
주호유의 진법을 단숨에 파훼한 사람.
주호유보다도 뛰어난 진법의 달인이 이쪽 편에 있는 것이다.
‘너는 오늘 크게 잘못 걸렸다.’아무리 수라마군이라지만 놈도 마테오 리치의 존재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진법으로 눈속임을 시도하려고 이런 개수작질을 부리는 것일 터.
류대오는 초류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마차 안에 척계광이 있다면 어쩌겠느냐?”초류향은 류대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침착하고 서늘한 눈.
그 심연의 어둠처럼 깊은 눈에 류대오는 등골이 오싹하는 한기를 느꼈지만 기운을 끌어 올려 초류향의 눈길에 대항했다.
“만약 마차 안에서 척계광을 찾을 수 있다면 제 목을 드리지요.”“좋다! 너는 지금 나와 약속을 한 것이다. 초류향!”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선히 몸을 옆으로 비켰다.
류대오는 낮게 이를 갈며 건안왕에게 입을 열었다.
“번거롭겠지만 왕야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건안왕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왜?”“예?”“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는 거냐?”류대오는 당황했다.
그러나 곧장 간절한 얼굴로 건안왕을 바라보았다.
“수라마군과 척계광, 둘 다 한꺼번에 처리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왕야.”“그게 나랑 관계가 있나?”시큰둥한 얼굴.
류대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건안왕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황족이다.
그것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놈으로 유명한 황족.
자신의 힘이 전혀 먹히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
그가 거절한다면 류대오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미친 새끼가 왜 갑자기 또…….’조금 전까지 적극적으로 협력할 듯하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자 류대오는 크게 당황했다.
“왕야…….”간절한 음성.
건안왕의 입가에 그려져 있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쯧, 사내자식이 고작 이 정도 일로 울상을 짓고 그러느냐. 명색이 금의위의 수장이라는 놈이.”“…….”건안왕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류대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너는 나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거래.
이것은 거래였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거래.
류대오는 건안왕의 속셈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건안왕이 그 완벽한 복종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후 건안왕은 슬쩍 류대오와 거리를 두며 입을 열었다.
“사부를 불러오면 되는 건가?”“예.”“좋아. 내 이번에 한번 크게 도와주지.”건안왕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뒤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왕족 특유의 황금색 용이 그려진 깃대가 제일 먼저 보이고, 이어서 그 깃대를 꽂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금색 마차가 금의위의 고수들을 해치며 전면에 드러났다.
건안왕은 마차 문을 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사부, 잠시 바깥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색목인.
마테오 리치가 미묘한 웃음을 그리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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