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190)
제190화 선택의 순간(2014.11.03.)
운휘는 초류향과 공손아리를 바라보다 판단을 내렸다.
‘이건 내가 낄 자리가 아니다.’초류향 본인은 자신의 감정을 잘 감추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운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초류향은 공손아리를 바라볼 때마다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곤 했었으니까.
그때는 혼란스러워하거나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공손아리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초류향의 눈빛에는 온통 안도와 기쁨이 가득했던 것이다.
운휘는 이런 주군을 방해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에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주군.”초류향이 잠시 ‘왜 갑자기?’라는 의문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지만, 운휘는 미소를 지어 대답을 대신하며 천천히 걸어서 그곳을 빠져나갔다.
아직도 그의 주군은 공손아리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은가?’과거에야 어렸으니까 잘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운휘가 판단했을 때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또 없었다.
초류향은 한 번쯤 스스로의 감정과 솔직하게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초류향은 운휘가 갑자기 자리를 떠 버리자 순간 긴장했다.
공손아리와 단둘이 남게 되자마자 이상하게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침착해라.’공손아리에게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왜?’이해할 수가 없었다.
초류향이 그렇게 스스로의 상태에 의문을 가질 때.
공손아리가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어요?”초류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손아리를 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본 사이에 많이 작아졌군.”“네?”“예전에는 그쪽이 나보다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공손아리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대꾸했다.
“그때는 어렸잖아요.”“그랬지. 어릴 때였지.”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투정부리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시기가 지나간 것이다.
둘 모두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초류향은 공손아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던가?”“네.”“다행이군.”“네, 다행이죠.”그것으로 끝.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오 년이라는 시간은 확실히 짧지 않았다.
초류향이 부쩍 성장했듯이 공손아리 역시 성장했다.
소녀에서 여인이 된 것이다.
초류향은 그런 공손아리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그녀의 변한 모습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아름답군.’사실 초류향은 공손아리와 함께 지냈던 과거의 기억에 대해 어느 정도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그저 옛 기억이 머릿속에서 미화되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라는 이성적인 분석도 하고 있었다.
한데 오 년이 지난 현재.
그녀를 다시 만났는데 오히려 과거의 그때보다 더욱 아름다워지지 않았는가?
자신이 잘못 봤던 것이 아니었다.
‘조심해야겠군.’까딱 잘못하면 머릿속의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초류향은 그렇게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걱정했었다. 무사한 것을 보니 정말 다행이다.”“저를 걱정했었나요, 소교주님?”공손아리가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을 그리며 묻자 초류향은 선선히 인정했다.
“그래.”“왜요?”초류향은 순간 당황했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을 겉으로 티 내지 않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되물었다.
“걱정하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한가?”공손아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약간 서글프게 보이는 웃음을 띠며 초류향을 바라보았다.
“네, 필요해요. 저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거든요.”“…….”그랬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손천기가 살아 있을 때는 공손아리 역시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재의 공손아리는 일종의 상징성이 있는 장식품과 같았다.
‘장식품…….’사대 세가는 언제든지 그녀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선우초린이 강력하게 공손아리를 보호할 것을 주장한 탓도 있었지만, 공손아리를 살려 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매우 간단한 이유.
‘정통성을 가지고 싶었을 거야.’사대 세가 중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들 중에서 다음 대 교주가 될 사람이 곧장 공손아리와 혼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힘이 최고의 진리로 숭상받는 천마신교였지만, 어느 정도 대외적으로 보기 좋게 포장되기 위해서 공손아리는 스스로의 의사와 상관없이 팔려 나갔어야 할 운명인 것이다.
초류향은 대번에 그것을 읽어 내었다.
그리고 얼굴을 미미하게 찡그리고 있을 때.
공손아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없으니 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에요.”“그렇지 않다.”초류향은 고개를 저은 후 공손아리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가며 말했다.
“너는 내 스승님의 혈육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결코 그렇지 않아.”공손아리는 초류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빠는 이제 없어요, 소교주님.”“스승님은 안 계시지만 내가 있지. 스승님의 유일한 제자인 내가.”초류향은 공손아리의 지척까지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네 의사와 상관없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다. 내가 천마신교의 교주가 될 테니까. 이제부터 스승님을 대신해서 내가 너를 보호해 주겠다.”공손아리의 표정이 순간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초류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인가요?”“…….”“소교주님은 단지 제가 아빠의 딸이라서 보호해 주겠다는 건가요?”초류향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서, 또 표정에서 그것이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읽어 내었는지, 말로 하지도 않은 그 의미를 어떤 방법으로 알아챌 수 있었는지는 초류향도 몰랐다.
하지만 초류향은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있다.’아직 조기천 스승님의 복수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복수를 넘어서 천하를 향한 대업을 이루기로 정하지 않았던가?
여자에 빠져서 허비할 시간이 없다.
“……그래. 네가 스승님의 딸이기 때문이다.”“…….”공손아리의 반짝이던 눈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초류향은 그런 공손아리를 바라보며 순간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무언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공손아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고마워요, 소교주님. 호의에 감사합니다.”“…….”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공손아리는 해맑게 웃으며 초류향에게 예의를 갖춰서 읍을 해 보였다.
“소교주님은 분명 좋은 교주님이 되실 거예요.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교주님의 무운을 빌게요.”착각일까?
초류향은 순간적으로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공손아리와의 거리가 엄청 멀다고 느꼈다.
‘뭐지?’어떻게 된 것일까?
가슴 한구석이 급격하게 허전해지더니 곧 공허한 느낌이 가득해졌다.
초류향이 이것이 어떤 감정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공손아리가 등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초류향은 천천히 멀어지는 공손아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왜?’오늘 하루 동안 초류향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항상 올바른 해답을 내려 주던 그의 똑똑한 머리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바보, 멍청이가 된 것 같았다.
그저 점점 멀어져 가는 공손아리의 신형이 초류향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을 뿐이었다.
초류향은 공손아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조금씩 비틀거리다가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괴로웠다.
문제는 어디가 괴로운지, 어디가 아픈 것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는 데에 있었다.
‘나는 지금 올바른 결정을 했다.’하지만 이 답답함은 대체 무엇인가?
잠시 동안 깊게 고민하던 초류향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지금 이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는 그 이유도, 상황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이제 다시는 그녀의 웃는 모습은 보기 힘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초류향이 그 현실을 깨닫고 공허한 얼굴로 공손아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근처에서 어떤 강렬한 기운이 흘러 나왔다.
‘이건…….’익숙한 기운이 아닌가?
초류향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을 바라보다가 몸을 날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 * *
[감히 네깟 놈이 누구 몸에 손대는 것이냐?]“역시 요물이었구나, 이놈! 감히 소교주님 곁에서 무슨 개수작질을 부리는 것이냐?”막수는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무턱대고 살수를 펼치는 우 호법을 보며 기가 막힌 얼굴을 해 보였다. [평소에도 네놈이 유달리 멍청해 보였기에 유심히 바라보고 있긴 했다만, 이 정도로 무식한 놈인지는 몰랐다. 죽고 싶으냐, 늙은이?]우 호법은 막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기운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호쾌하게 전신을 돌리며 내력을 끌어 올렸다.그러자 이글거리는 불꽃이 그의 몸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막수의 기운을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푸헐! 하찮은 축생 주제에 인간을 무시하다니 아주 간이 부었구나. 네놈 간덩이가 얼마나 큰지 한번 꺼내 봐야겠다.”우 호법이 두 손을 단전 어림에 모아서 번쩍거리는 붉은 구슬을 만들었을 때.
초류향이 도착해서 둘 사이를 막아섰다.
“그만! 둘 모두 멈추십시오.”[비켜, 애송이. 이 기회에 저 건방진 영감의 털을 다 태워 버려야겠다. 민둥머리로 만들어 주지, 늙은이.]“소교주님, 저 건방진 요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한 방에 피 떡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피 떡? 푸헤헤!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늙은이.]초류향은 일단 배꼽을 잡고 웃는 막수를 한번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곤 우 호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기운을 거두세요. 우 호법님.”“하지만 저 요물을…….”“이 녀석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기운을 거둬 주세요, 우 호법님.”“끄응…….”초류향이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데 우 호법으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잠시 갈등하던 우 호법은 결국 기운을 거두며 한 걸음 물러섰다.
공손천기가 없는 지금.
초류향의 명령은 그에게 있어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푸쉬쉬-
사방에 들끓던 열기가 가라앉으며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막수가 기운을 거둔 우 호법을 바라보며 살살 놀리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포기하는 거냐, 영감? 겨우 그거밖에 안 되는 놈이었어? 내가 네 소중한 소교주의 목을 지금 당장 비틀어 버릴 수도 있잖아? 응? 좀 더 힘을 내 보라고.]“네 이노옴!”우 호법의 눈이 다시금 뒤집어지려고 할 때.초류향이 버럭 소리쳤다.
“우 호법님!”“예엡!”“일단 진정하시지요.”초류향은 우 호법을 내리눌러 준 후, 막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많이 심심했나 보지?”[……흥.]막수는 기운을 거두지 않은 채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막수를 바라보며 초류향이 웃었다.
“심심하면 나와 놀아 볼까?”막수의 두 귀가 작게 움찔거렸다.
그리고 초류향을 향해 눈을 마주치며 히죽거렸다.
[그새 알량한 힘 좀 얻었다고 자신감이 붙었느냐, 애송이? 상대방의 힘을 파악할 줄도 모르는 동태눈깔은 아닐 거라 보았는데? 내 착각이었나?]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강한 건 나도 안다. 아마 천하에서 너를 상대할 만한 인간은 없을 거다.”막수는 두 발로 버티고 서서 팔짱을 낀 자세를 취하며 비웃었다.
[호오? 그걸 그렇게 잘 알면서도 나를 도발하다니…… 미친 거냐?]“힘으로 하게 되면 물론 너에게 상대가 되지 않겠지. 아직은 나 역시 부족한 상태니까. 지금의 무력으로는 네 심심풀이 놀이 상대나 겨우 될 수 있을까 말까겠지?”[흐음? 제법 정확하군. 그래서?]“다른 것으로 붙어 보겠는가?”[다른 것?]막수가 호기심을 보이자 초류향은 장난스럽게 웃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