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205)
제205화 그의 등장(2014.12.25.)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 좋은 일도 있는 법이다.
그 말은 반대로 평소에는 인생이라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뜻이 된다.
검버섯 노인은 그 말에 극히 동감했다.
천자후에게 납치되어 끌려가면서 검버섯 노인은 자신의 길었던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딱히 좋았던 기억은 없구먼.’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에 하나 있긴 있었다.
독인을 만들어 낸 것.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자 행복했던 기억이었다.
문헌상으로만 존재하던 것을 실제로 재현해 내었다는 데에서 오는 희열이 엄청났으니까.
“성가시게 되었다.”천자후가 자신의 충직한 수하이자 추적과 살인의 달인인 마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흔적을 정말 완벽하게 지웠느냐?”“그렇습니다.”당당하고 확고한 어투.
천자후는 이 고집스러운 노인을 신뢰했다.
자신의 분야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실력자였던 것이다.
“한데 어째서 추적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냐? 네 생각은 어떠하냐?”“이쯤 되면 의심스러운 것이 하나 있긴 합니다. 소가주님.”“그게 뭐지?”마노는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천리향입니다.”“……그렇군. 그게 있었지.”천리향(千里香).
천 리 거리에 있어도 그 독특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나 역설적이게도 보통의 사람은 그 향기를 맡을 수가 없고, 이것을 직접 만든 사람이나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저희들에게 뿌렸던 암기에 그것이 섞여 있었다면…… 이화궁의 미친개를 완전히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일이 성가시게 되었군.”천자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격전 중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없었다.
이화궁의 계집들이 던져 대는 암기를 일일이 피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몸으로 때우거나 무기로 걷어 내었다.
아무래도 그때 천리향이 몸에 묻은 모양이다.
“천리향을 제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그렇겠지. 광견이 쫓아오고 있으니까.”이화궁의 미친개.
선우초린이 멀리서 입에 거품을 물고 추적해 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 계집에게는 조력자들도 많았다.
‘아무래도 명분이 있으니까.’이화궁을 무단으로 침입한 것.
거기에 이화궁의 무인들을 죽이고 건물을 불태운 것까지 더하면 명분은 너무나도 확실히 저쪽에 있었다.
그런 반면 이쪽은 소수였고, 지닌바 능력도 다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이대로 사로잡히게 된다면 사지육신이 멀쩡하게 끝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도박을 한다.”“도박이요?”“그래. 우리들 중 누구에게 천리향이 묻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더 이상 시간을 끌기도 어려우니까.”천자후는 아까부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검버섯 노인을 등에 업으며 말했다.
“흩어진다. 나는 곧장 소교주님을 찾아가서 이 영감을 넘기고 선처를 구해 보겠다.”“……알겠습니다.”“그때까지 버텨라.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소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마노를 비롯한 추적대의 인원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천자후는 달렸다.
지금 초류향이 어디에 있는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최대한 빠르게 간다.’복면은 벗어 던졌다.
더 이상 쓰고 있어 봐야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는 초류향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 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일이 더럽게도 꼬였군.’본래는 조용하게 해결하려고 했다.
하나 이화궁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기에 어쩔 수 없이 과하게 손을 썼다.
덕분에 이제 예정에도 없었던 시간과의 싸움을 하게 생겼다.
쐐애애액-!
천자후의 신형이 쏘아진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 * *
초류향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초류향은 공손천기를 만났다.
“오랜만이구나.”“그러게 말입니다.”초류향이 공손천기를 보면서 웃음 짓자 공손천기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히죽 웃었다.
“이거 전혀 놀라지 않는데?”“실망하셨습니까?”“조금. 처음 한 번 정도는 놀랄 줄 알았거든. 여전히 인간미가 없구나.”초류향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렸다.
“스승님이야 이곳에 계셨을 때도 워낙에 특이하신 분이셨으니 세상에 안 계신 지금, 갑작스레 꿈에 나오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요.”초류향이 웃으며 이야기하자 공손천기는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던 초류향이 불쑥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그러하냐?”“예. 이제야 나타나신 것이 서운할 정돕니다. 이게 단순히 꿈이라고 해도 좋군요.”초류향의 직설적인 표현에 공손천기는 피식 웃었다.
“네 입에서 그런 낯간지러운 이야기가 술술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과연 시간이 많이 지나가긴 한 모양이다.”공손천기는 근처에 있는 탁자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어떠하냐?”“좋습니다.”“……너는 내가 뭘 물어봤는지는 알고 좋다는 거냐?”“요즘 근황을 물어보신 게 아니었습니까?”“위에서 봐도 질리게 보이는 것을 물어봐야 무엇하겠느냐?”초류향은 가만히 눈만 몇 번 깜빡이다 공손천기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 정말 이게 꿈이 아닙니까? 저는 이게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꿈이긴 꿈이지. 그렇지만 아니기도 하다.”공손천기가 묘하게 웃자 초류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꿈이 아니라는 말입니까?”“글쎄다.”아리송한 대답이었다.
초류향이 재차 물으려 입을 여는데 공손천기가 그것을 제지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떠하냐고 묻는 것이다.”초류향은 공손천기를 바라보았다.
안 본 사이에 공손천기는 굉장히 젊어져 있었다.
아니, 젊어진 정도가 아니라 어려져 있었다.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왜 그런 모습이십니까?”“나에게는 늙은 모습이 어울린다는 거냐?”“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모습은 처음 보니 이상합니다.”초류향이 꿈속이라 생각했던 이유는 공손천기의 이런 모습 때문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초류향은 그가 공손천기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랬기에 꿈이라 여긴 것이다.
“뭐 이런 겉치레야 아무래도 좋겠지.”공손천기는 자신의 헐렁한 도포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네 녀석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동안은 도저히 짬이 나지 않았지. 이번에 특별하게 시간을 내어서 온 것은 너에게 해 줄 말이 있어서다.”“경청하겠습니다.”“그다지 중요한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만, 그저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초류향은 고요한 얼굴로 그의 스승을 바라보았다.
외관이나 형태가 어찌 되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사실 초류향은 그가 나타난 목적조차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다만 이렇게 꿈이라는 것을 빌려 스승님이 나타나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해 줄 말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냐?”“궁금합니다.”공손천기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약간 말을 돌렸다.
“그건 그런데 확실히 의외로구나.”“무엇이 말입니까?”“이것저것 나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이 있지 않았느냐? 너무 조용하니 오히려 불안할 정도다.”초류향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묘하게도 공손천기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물어본다고 쉽게 대답해 주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어허? 언제부터 그렇게 이 위대한 스승님을 불신했느냐, 제자야?”“꽤나 오래 전부터입니다만.”초류향의 대답에 공손천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원망은 많이 하지 않더구나. 기억을 되찾게 되면 욕을 쏟아 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실망했다.”“하늘 같은 스승님에게 욕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마음속에 담아둘 밖에요.”“아주 훌륭한 태도다.”둘은 그렇게 한동안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공손천기는 그의 제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자야.”“예, 스승님.”슬슬 본론이 나오나 싶어서 초류향은 공손천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가끔 네 재주가 걱정이다.”초류향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공손천기를 바라보았다.
재주가 걱정이라니?
한 번에 이해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
“제자의 재주가 뛰어나니 스승으로서 마땅히 기뻐해야 맞겠지만…… 어쩐지 말이다, 걱정이 될 때가 있다.”말을 하며 공손천기는 이미 훌쩍 자란 초류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말이 이상하더냐?”“예.”“그래, 이상할 만도 하지.”공손천기는 다시 탁자에 걸터앉아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자야.”“예, 스승님.”“강호라는 세상은 말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비루한 세상이다.”비루하다?
어째서?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지게 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수없이 많은 적들의 목숨을 빼앗고 얻은 것이 아니더냐? 사람을 죽여서 빼앗은 것이니 이 얼마나 비루한 일이더냐?”초류향은 공손천기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무예에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바꿔 생각하면 그만큼 사람을 많이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앞으로 네가 하려는 일을 막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네가 가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가도 좋다. 다만 나는 네가 걱정될 뿐이다.”초류향은 가만히 그의 스승님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이 걱정스러워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스승님께서는 제가 강호에 나가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되는 것이 염려스러우십니까?”생전에도 극도로 살생을 피하려 했던 공손천기였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초류향은 그 부분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의외였다.
“아니, 그거야 너의 선택이니 걱정하지 않는다. 몇 명을 죽이든 몇천 명을 죽이든 그것이 네가 하고자 하는 일에 필요하다면 걱정하지 않지. 다만 그것 때문에 네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인거다.”“중심이요?”“그래. 살인에 익숙해져서 그것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손에 항상 여유를 가져라. 내가 너에게 이 부분에 대해 가르침을 내렸던 것을 기억하느냐?”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히 기억한다.
“모든 일에 여유를 가지고 대처하라 했습니다.”“그래. 여유라는 것은 중요하다. 너는 근래에 그것이 너무 없었어. 쉽게 말하자면 평소에 좀 웃으라는 말이다, 이 녀석아.”초류향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 공손천기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근래에 웃을 일이 별로 없긴 했지요.”“네가 마음속에 여유라는 것을 가지면 모든 일이 흥미롭고 즐거워지는 법이다.”공손천기는 느긋한 자세로 앉으며 그의 제자에게 말했다.
“재미있게 살아라.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니까.”그 말을 끝으로 공손천기의 몸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초류향은 그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려서 공손천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지 마십시오! 스승님!”“쯧, 너무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초류향의 손길을 가볍게 피하며 공손천기가 웃었다.
아무리 초류향이 손을 뻗어 봐도 닿지 않았다.
그런 공손천기를 바라보던 초류향의 얼굴에 간절함이 떠오를 때.
공손천기가 말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림)라는 말을 항상 마음에 새겨 놓거라.”“…….”초류향은 점차 사라져 가는 공손천기를 바라보며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초류향은 한동안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잠시 동안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초류향의 입가에 문득 가벼운 미소가 그려졌다.
“한 번 가능했으니 언젠가 한 번 더 오실 수 있을 거라 믿겠습니다.”[……주군?]지붕 위에 은신하고 있던 운휘가 의아한 말투로 묻자 초류향은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그저 오랜만에 행복한 꿈을 꾸어서요.”초류향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한번 풀며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힘내 봐야겠습니다.”흐트러진 머리를 가볍게 정돈하며 초류향은 미소 지었다.
이게 진짜 꿈이었든 아니든 그에겐 딱히 상관없었다.
그저 스승님을 만나서 기분이 좋은 초류향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