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207)
제207화 갈문적(2015.01.01.)
보통 고수들이 사용하는 전음(傳音)이라는 것은 내공을 사용하여 원하는 사람에게만 목소리가 들리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거리가 멀면 멀수록 엄청난 내공 소모를 동반하고, 그마저도 일정 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내공을 소모하더라도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천리전음(千里傳音)이다.
천 리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도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전음술.
화경의 고수들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의 고수들만 사용할 수 있는 이것은 막대한 내공 소모도 소모지만, 거리가 멀수록 세심한 내력 조절을 해야 하기에 목소리의 크기나 전달하려는 내용 등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방금 소교주님께서 천리전음을 쓰신 건가? 그것도 나와 저 녀석을 포함한 모두에게?’천자후는 어이없는 얼굴을 해 보였다.
이렇게나 엄청나게 떨어진 거리에서, 게다가 한 사람도 아니고 다수의 사람에게 정확하게 말을 전달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소교주님의 무공은 대체 어느 정도인 거지?’화경의 고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확한 무력은 아무도 측정하지 못했다.
천자후는 조금 전에 보여 준 천리전음으로 짐작해 보건대 어쩌면 초류향은 이미 삼황의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게다가…….’천리전음보다 더 황당한 것은 그들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명령했다는 점이다.
‘이곳이 보인다는 말인가?’이렇게 많은 장애물이 막아서고 있는데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천자후가 복잡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초혜정주가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천가의 후계자님.”“흥! 제법 정중한 태도로군.”초혜정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따로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천자후는 그런 초혜정주의 옆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등에는 검버섯 노인이 업혀 있었는데, 그 노인은 불안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초혜정은 사대 가문의 사람이라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당연히 천자후 역시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잘 꾸며져 있는 정원을 지나가며 천자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대 세가에 있는 정원들보다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초혜정에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엄숙함과 고아함이 존재했다.
그것이 ‘기품’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초혜정의 가장 중심부인 인공 호수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인공 호수의 중심에는 작은 정자가 놓여 있었고, 그 정자에 초류향이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자후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초류향이 있는 정자에 다가가 검버섯 노인을 옆에 내려놓고 절했다.
“천씨 세가의 천자후가 소교주님을 뵙니다.”“어서 오십시오.”초류향은 천자후를 바라보았다.
이 사내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사리 판단이 빨랐고, 제법 운도 따라 주지 않던가?
그런 사람이 이렇게 약간 무모해 보일 정도로 초혜정에 들어오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저 노인 때문인가?’누구일까?
노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천자후가 이렇게 무리를 하려고 한 것일까?
초류향은 노인을 잠시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자입니까?”“예. 그자입니다, 소교주님.”천자후의 대답에 초류향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초류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버섯 노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혈도를 제압해 놓은 겁니까?”“예. 부득이하게 그렇게 되었습니다.”천자후의 말에 초류향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크게 안도했다.
“어찌 되었건 잘된 일입니다. 건강에 이상은 없어 보이니 이제 화령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천자후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는 소교주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는 이쪽의 부탁만 하면 되었다.
“소교주님, 사실은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이렇게 무리하게 찾아왔습니다.”“말씀해 보십시오.”초류향은 검버섯 영감의 혈도를 풀어 주며 천자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천자후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자를 찾기 위해 추적을 하다가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문제?”“예. 이화궁의 무인들과 충돌을 하게 되었는데 사상자가 조금 나왔습니다.”초류향은 천자후의 말을 거기까지만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거래다.
화령을 치료할 수 있는 이 노인을 찾아 주었으니 그것 때문에 벌어진 뒷일을 감당해 달라는 말이 아닌가?
“이화궁 쪽에 몇 명이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까?”“죽은 자가 둘. 그 외에는 다섯 정도가 중경상을 입었을 겁니다.”초류향은 잠시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았다.
현재의 이화궁의 궁주는 선우초린이다.
그녀가 궁주로 있는 이상 아마도 이번 일을 쉽게 넘어가려고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대한 해답은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나왔다.
‘그녀와도 거래를 해야겠군.’이 문제를 덮으려면 그녀가 원하는 다른 무언가를 제공해야 했다.
그것이 ‘정치’인 것이다.
현재 초류향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교주’였다면 굳이 번거롭게 이런 거래를 고민하지 않아도 무관했다.
하지만 보름 뒤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은 교주가 아니었고, 그렇다면 은밀한 거래가 필요했다.
‘무엇을 원할까.’초류향은 선우초린이 요구할 무언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것 역시 답이 금세 나왔다.
‘공손아리…….’선우초린.
그녀는 이상하게도 공손아리에게 집착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난스러울 정도였다.
그녀가 이번 일을 무마하는 데 대한 조건으로 공손아리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언뜻 보기에 천자후의 부탁은 굳이 들어줄 필요가 없는 문제 같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이것은 서로의 ‘신뢰’에 관계되는 부분이었으니까.
‘나를 믿고, 나를 위해 일을 저질렀으니 정말로 납득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면 부탁을 들어줘야겠지.’약간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거래였지만 초류향 역시 이런 부분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교주가 되기 전까지는 이러는 것이 옳았다.
“노력해 보지요. 이화궁주 성격상 조용히 넘어가 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은 해 보겠습니다.”천자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했던 것이다.
초류향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현재 그가 가진 영향력은 상당히 컸다.
제아무리 광견이라 소문난 선우초린이라도 함부로 하긴 어려울 것이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천자후가 다시금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하며 말하자 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아가 보셔도 좋습니다.”천자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얻을 것은 다 얻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노인과 마주 앉은 초류향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검버섯 노인은 두 눈의 초점이 흐려진 채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대가 화령을 독인으로 만든 사람이 맞습니까?”“…….”작게 혼잣말을 웅얼거리던 검버섯 노인은 초류향의 입에서 독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눈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오더니 곧 몸을 일으켜서 초류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독인이 여기에 있습니까, 도련님?”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녀를 치료해 줘야겠습니다.”검버섯 노인은 미묘한 표정으로 초류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 그 아이를 보여 주시는 겁니까, 도련님?”초류향 뒤에 은신해 있던 운휘는 노인의 말투에 눈살을 찌푸렸다.
[공손한 태도로 말해라. 네 앞에 계신 분은 장차 본 교의 교주님이 될 분이시다.]낮게 으르렁거리는 말투.검버섯 노인은 움찔하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 그의 무공 수준으로 운휘의 은신을 간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초류향은 화난 얼굴의 운휘를 슬쩍 바라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가 봅시다.”자잘한 예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화령을 치료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초류향은 검버섯 노인을 데리고 화령이 머물고 있는 약제당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선우조덕이 화령을 침술로 재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 일이십니까, 소교주님?”선우조덕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자 초류향이 말했다.
“화령을 치료하기 위해 왔습니다.”“치료라면…….”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선우조덕은 초류향의 뒤편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검버섯 노인이 들어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화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놈! 네놈은 갈문적이 아니냐?”검버섯 노인.
그는 선우조덕의 물음에 움찔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약간 흥분한 기색의 선우조덕을 보며 초류향이 입을 열었다.
“아는 자입니까?”“예, 소교주님. 아주 악독한 놈입니다, 저놈은.”
항상 너그럽고 인자한 선우조덕이었다.
그가 이렇게 분노한 모습은 처음 봤기에 초류향은 신선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어떤 사람입니까?”평소에 그렇지 않던 사람이 화를 내는 데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느낌상 대단히 좋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천인공노할 놈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을 가지고 인체 실험을 했던 녀석입니다. 오래전에 죽은 줄 알았는데 설마 살아 있었을 줄이야…….”“……인체 실험이요?”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 말이 머릿속에 정확하게 입력이 되는 그 순간.
초류향의 얼굴에도 서서히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건 어떤 이유에서든, 그 누구라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뒤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던 갈문적이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급히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만졌던 사람들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대다수는 죽은 시체들이었고…….”“인체 실험을 했다는 건 사실인가 보군.”초류향이 서늘한 눈길로 입을 열자 갈문적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새, 생명의 신비를 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소교주님.”“…….”초류향은 입을 다물고 갈문적을 노려보았다.
검버섯 가득한 그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흐를 때.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초류향이 냉정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일단 따라와라. 화령을 치료한 후에 네놈의 처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갈문적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선우조덕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자가 독인을 만든 자입니까?”“그렇습니다.”“화령…… 그 아이는 정말 지독한 일을 당했겠습니다.”“…….”초류향은 선우조덕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당했을지 언뜻 짐작이 가기는 했었다.
강력한 힘이라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법이 없으니까.
항상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 후에야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화령 같은 경우는 애당초 허락되어 있던 그릇에 넘칠 정도로 힘이 담겨 있었다.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다.’그녀의 수치는 예전에 정관법으로 보았을 때 오십육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보여 주는 힘은 화경의 고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아닌가?
‘그릇이 깨어져도 이상하지가 않다.’초류향은 의학적인 지식이 거의 없었다.
하나 정관법으로 세상을 보았기에 화령의 상태가 어떤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넘치는 힘이 꾹꾹 눌러져 담겨 있는 형태.’당장에라도 힘이 폭주해서 온몸이 터져나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뿌드득-
초류향은 낮게 이를 갈며 앞장섰다.
이 지독한 노인이 화령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순간 당장에라도 그를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는 것이다.
지금 이자를 죽이게 되면 영영 화령을 치료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초류향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갈문적과 함께 화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냉정하고도 섬뜩한 표정에 뒤따르던 선우조덕조차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들이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에는 죽은 듯이 잠든 화령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전신에는 기다란 바늘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치료해라.”초류향이 입을 열자 뒤에서 힐끔힐끔 화령을 바라보던 갈문적이 앞으로 나섰다.
잠시 화령의 상태를 살펴보던 갈문적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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