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267)
제267화 밀회(2015.07.30.)
“누가 찾아왔다고?”“흑월회의 군사가 주군을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남만야수문의 후계자 구휘.
그는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목적은?”“직접 주군을 뵙고 나서 이야기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호위는 얼마나 데려왔지?”“혼자 찾아왔습니다.”“미친 모양이군.”흑월회의 군사라면 구휘도 알고 있었다.
무공 실력은 별것 아니지만 계략 하나만큼은 유명한 계집이 아닌가?
‘무슨 수작일까?’이토록 당당하게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속셈이 있다는 의미일 터.
구휘는 그게 무언지 궁금해졌다.
“어디 있지?”“후원에 데려다 놓았습니다.”“알겠다.”구휘는 일어나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으로 가는 동안 냉하영이 찾아온 목적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았지만 공교롭게도 딱히 짚이는 점은 없었다.
이윽고 그는 후원 정자에 느긋한 얼굴로 앉아 있는 냉하영과 마주했다.
“야수문의 후계자를 뵙니다. 초면이네요?”“…….”구휘는 냉하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니었군.”냉하영은 시엽의 존재를 단박에 파악한 구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 초류향에게 들었던 대로 삼황급의 고수가 아닌가?
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싸우려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세상이 너무 흉험해서요.”“흉험하다라…… 그렇긴 하지. 하나 저 녀석이 내 앞에서도 너를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라 보나?”구휘가 말하는 도중에 기운을 슬쩍 방출하자 시엽은 모습을 드러내며 냉하영의 바로 앞을 막아섰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면 그녀를 보호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청난 고수다.’시엽의 얼굴이 심각해질 때.
냉하영은 구휘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과 저는 적이 아니에요. 장난은 그만하세요.”“적이 아니다? 그건 그쪽 생각이겠지.”“당신의 생각도 곧 그렇게 바뀔 거예요.”“자신감이 상당하군.”구휘는 냉하영과 말을 하면서도 흥미롭다는 얼굴로 시엽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누군가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까지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그 기척을 잡아낼 수 없었다.
그만큼 시엽의 은신술은 독특하면서 특출했다.
시엽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구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운을 거두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북해빙궁의 그 얄미운 백여우가 흑월회의 고수와 부딪쳐서 크게 망신을 당했던 적이 있었지.”“백여우…… 적혈명을 말하는 건가요?”“그래.”솔직히 조금 더 기운을 뿜어내서 놈의 실력을 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자제하기로 했다.
냉하영이 무슨 말을 할지, 그것을 듣는 게 우선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이제 저와 이야기할 마음이 드신 거죠?”“들어 볼 용의는 있다.”저 계집의 위치상 바보 같은 헛소리는 안 할 것이다.
그딴 소리나 할 정도로 멍청이라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구휘가 성큼성큼 걸어가 냉하영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본 회가 천마신교와 손을 잡은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물론.”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렇게 화려하게 황실을 박살 내고 정도맹을 물 먹였는데.
이 정도 정보조차 자력으로 입수할 수 없는 정보 수집력이라면 애초부터 강호에 나와서는 안 되었다.
“잘 되었네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도 될까요?”“좋을 대로.”냉하영은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한 번 만지작거리며 미소 지었다.
“저희와 손을 잡는 게 어때요?”“……?”“남만야수문 역시 천하에 욕심이 있지 않나요? 우리와 함께한다면 천하 제패는 아주 손쉬울 거라 생각되는데, 어떠세요?”구휘의 무덤덤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도 뜬금없는 말인 데다가, 단번에 판단을 내리기도 어려운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혼란스러울 얼굴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냉하영은 묵묵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렸다.
‘시간은 많으니까.’그녀는 여유로웠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구휘에 대한 조사는 어느 정도 해 놓고 온 상태였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구휘는 신중하고, 감정적으로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큰 문제에 대해서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 더디다.
‘얼마나 걸리려나…….’냉하영은 주변을 둘러보며 느긋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이곳 남만야수문의 사천 거점은 북해빙궁의 사천 거점과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북해빙궁과 남만야수문은 암묵적인 동맹 관계라는 소리지.’북해빙궁과 남만야수문.
이 거대한 두 개의 단체는 정도맹에게 약속받은 사천 지역을 ‘어쩔 수 없이’ 반으로 쪼개어 각각 점령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경계선이 맞닿아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상대방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싸운다면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을 테니까.’두 단체의 수장은 다행히도 굉장히 영리했고, 그랬기에 바보 같은 짓을 경계했다.
지금 남만야수문과 북해빙궁이 싸우면 둘 모두 아무런 소득도 없이 손해만 본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았던 탓이다.
‘반대로 자기들끼리 손을 잡으면 천마신교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겠지.’외부에 천마신교라는 강대한 적이 있으니 둘의 결속은 더욱 단단하고 굳건해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완벽한 계획이긴 했다.
냉하영이 저쪽의 입장이었어도 이렇게 계획을 짜고 서로 손을 잡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이 단단하고 견고해 보이는 관계에도 분명히 틈은 있었다.
그리고 냉하영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에 빈틈을 파고들 생각으로 이렇게 구휘를 찾아온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신가요?”구휘는 고요한 시선으로 냉하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속셈인지 파악해 보기 위해서다.
하나 잠시 후 구휘는 낮게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군.’냉하영은 느슨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서 어떤 속셈이나 계책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물어보는 듯한 얼굴로 구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 그럴 리가 없지.’이렇게 매력적이고 달콤한 제안은 분명 그만한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천하 제패라는 그럴싸한 명분과 목표를 제시했지만 구휘는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어두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지금 당장은 그 속셈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괴롭군.’이게 문제였다.
지금 당장 그녀가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구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냉하영이라는 여자는 확실히 소문대로 우습게 볼 수 없는 존재였다.
‘이것만 해도 쓸 만한 수확이겠지.’소문 속의 그녀를 이렇게 직접 마주한 것만으로도 이 자리는 손해가 아닐 것이다.
구휘는 그렇게 씁쓸한 속을 달래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당장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문제 같군.”“그런가요? 의외군요. 저는 당신이 당장이라도 받아들일 것이라 여겼는데요.”냉하영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구휘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한 제안은 본 문의 미래를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제안이다. 조만간 아버지께서도 중원에 나올 테니 그때 한번 진지하게 상의해 볼까 하는데 그쪽 생각은 어떠한가?”“많은 시간을 드릴 수 없어요. 이쪽 역시 정도맹과의 싸움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되었거든요.”냉하영이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해 보이자 구휘가 무언가를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열흘. 늦어도 열흘 뒤에는 아버지께서 이곳에 도착하신다. 그때 결과가 나올 테니 곧장 말해 주도록 하지.”“열흘이라…….”냉하영은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따져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열흘 정도면 나쁘지 않네요. 대신 초과하시면 안 됩니다.”“알겠다.”냉하영과 구휘는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긍정적인 대답, 기다리고 있겠어요.”구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별말 없이 냉하영을 보냈다.
이때까지도 구휘는 냉하영이 단순히 연합을 제의하기 위해 왔다고만 생각했다.
그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사흘이 지난 뒤였다.
* * *
“누구라고?”“북해빙궁의 대제자 적혈명이 찾아왔습니다.”“그가 왜?”“……주군을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를 하고자 했습니다.”구휘는 읽고 있던 서류를 가볍게 내려놓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최근에 굳이 나를 봐야지만 용건을 이야기하겠다는 놈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죄송합니다.”수하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바닥에 엎드리자 구휘는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놈은 어디에 있지?”“후원에 있습니다.”“알겠다.”구휘가 자리를 이동해서 후원으로 향하자 정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적혈명이 보였다.
적혈명의 옆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그와 함께 다니는 여자.
주다혜가 함께였다.
“팔자 좋군, 백여우.”구휘는 오자마자 적혈명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적혈명이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너도 되게 좋아 보이는데, 불곰?”“나쁠 것은 없지.”구휘와 적혈명.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제야 구휘는 그 긴장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적혈명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간 것이다.
‘그것 때문인가?’동맹을 제안하기 위한 냉하영의 방문.
설마 북해빙궁이 그 날의 밀회를 눈치챈 건가?
그렇다면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진다.
그렇게 둘이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꼬로록-
침묵과 전혀 관계없는 소리가 그들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구휘와 적혈명의 시선이 동시에 주다혜를 향했다.
그러자 그녀가 민망한 얼굴로 조용히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헤헤, 바쁘신 중에 굉장히 죄송한데…… 여기는 다과 같은 거 안 주나요?”
구휘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북해빙궁의 제자께서 배가 출출하신 모양이군. 다과를 준비시키도록 하지.”“예. 너무 급하게 왔거든요. 헤헤…….”주다혜가 겸연쩍은 얼굴을 할 때.
옆에 있던 적혈명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헛웃음이 흘러나오더니 곧 그가 주다혜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때렸다.
“지금 이 사형이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는 분위기를 못 읽었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주다혜는 맞은 곳을 감싸 쥐더니 눈을 희번뜩하게 뜨며 적혈명에게 대들었다.
“우쒸! 배가 고픈 걸 제가 어떻게 해요? 그러게 밥이라도 좀 먹이고 데리고 나오든가!”“어쭈? 아주 막 나가자는 거지, 이건? 집안 꼴 잘 돌아간다. 지금 그게 여기서 할 소리냐? 한번 살풀이를 해?”“흥, 대사형이 먼저 물어봤잖아요. 그래서 대답한 건데요, 뭐.”주다혜가 움찔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도 지지 않고 쫑알거리자 적혈명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여기서 더 화를 내자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구휘가 부담스러웠고 그냥 넘어가자니 사매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젠장.”원래는 이쪽이 불곰같이 생긴 저놈을 닦달하고 채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만야수문은 자신들 모르게 흑월회와 은밀한 거래를 주고받지 않았던가?
한데 주다혜가 산통을 다 깨 놓는 바람에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적혈명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구휘의 수하가 다과를 챙겨왔다.
“우와!”알록달록한 화과자와 전병들을 보며 탄성을 터트린 주다혜가 정신없이 과자를 입으로 쓸어 담을 때.
적혈명은 독 따위는 전혀 걱정도 하지 않고 꾸역꾸역 먹어 대는 사매를 어이없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형도 한번 먹어 봐요. 이거 되게 달아요.”양 볼에 과자를 한 움큼이나 넣은 상태로 자신에게 월병 하나를 권하는 사매를 적혈명은 쓰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너나 많이 먹어.”주다혜는 어차피 한 번 이상 권할 생각이 없었던 듯 흔쾌히 고개를 숙여 다시 다과를 정신없이 먹어 댔다.
적혈명은 애써 그런 사매를 외면했다.
그리고 구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오늘 여기에 왜 찾아왔는지 알겠지, 불곰?”구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본론인 것이다.
적혈명과 구휘의 사이에 긴장감 가득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