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268)
제268화 냉하영의 목적(2015.08.03.)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짐작하겠지?”“대충은.”“그럼 변명을 한번 들어 볼까?”적혈명이 진지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추궁하자 구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더럽게 꼬였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불현듯 냉하영이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깨달은 구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함정이었나…….’남만야수문과 북해빙궁의 단단한 결속에 균열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냉하영의 목적이었다.
‘시기가 묘하군.’냉하영이 다녀간 게 불과 며칠 전이다.
그런데 북해빙궁에서 이렇게도 빨리 흑월회와의 밀회를 알아챘다?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나?
“그 전에 하나 물어보고 싶군.”“뭔데?”“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었지?”“왜? 꼭꼭 숨기고 있던 비밀이 어디로 새어 나갔는지가 궁금한가?”구휘는 이미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한 어조로 비꼬는 적혈명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함정이다, 이건.”“함정? 무슨 함정?”북해빙궁과 남만야수문이 사천성이라는 하나의 지역을 절반으로 나눈 특수한 상황에서도 단 한 차례의 마찰도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암묵적이긴 하지만 서로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만야수문은 지금 흑월회와의 밀회를 숨김으로써 그 신뢰를 잃었다.
“냉하영, 그 계집의 이간계다.”“이게 단순히 이간계다?”“그래. 우리의 분열을 원하는 거지.”적혈명은 어이없는 얼굴을 해 보였다.
흑월회와 남만야수문 사이에 밀담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정확히 둘 사이에 무슨 내용이 오고 갔는지는 잘 모른다.
하나 짐작은 갔다.
지금 이 시점에서 냉하영이 남만야수문을 찾아왔다가 멀쩡하게 걸어 나간 것만 봐도 거래 내용이 뭔지 충분히 짐작이 가지 않는가?
“좋아. 그럼 나도 하나만 묻자, 불곰.”“말해라.”“이게 냉하영의 계략이라고 치자. 한데 왜 우리에게 이번 일에 대해서 바로 알리지 않았던 거지? 그것도 함정이냐?”“그건…….”구휘는 말끝을 흐렸다.
냉하영은 정말로 치밀했다.
그녀가 쳐 놓은 올가미는 너무도 완벽해서 그게 함정이라고 깨닫는 순간에는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던 것이다.
구휘는 낮게 이를 갈았다.
‘이건 분명 혼자 결정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냉하영이 던진 미끼는 그만큼 중한 것이었고, 구휘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결정할 수 없어서 남만야수문의 주인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남만야수문의 주인.
야수왕 구마벽을 기다리는 동안 설마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이야.
‘내 실수다.’이건 꽤 치명적이었다.
구휘는 인정했다.
그녀의 올가미에 완전히 걸려 버렸음을.
지금의 적혈명에게 무어라 말하건 모두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 불찰이다. 너희 쪽에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내 판단 착오였다.”구휘가 씁쓸한 얼굴로 말하자 적혈명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는 흑월회와 남만야수문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거래 내용이 우리 쪽에는 대단히 거지 같은 일일 거라 거의 확신하고 있지. 내 말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다면, 우리가 단순히 오해하고 있는 거라면 변명이라도 해 봐라, 불곰.”적혈명의 말에 구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변명은 내 방식이 아니다, 백여우. 나는 너에게 흑월회의 함정이라 말했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이다.”구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적혈명은 손바닥으로 다과가 놓여 있던 대리석 탁자를 내리쳤다.
콰아아앙-!
탁자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사방으로 갈라지며 부서졌고, 소리를 듣고 남만야수문의 고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구휘는 그들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후 적혈명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편리한 사고방식을 가진 놈이다, 네놈은. 나는 너에게 분명 기회를 줬다. 이걸 걷어찬 것은 너다.”적혈명은 으스스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때까지 뻘쭘한 얼굴로 손에 든 다과를 깨작깨작 씹고 있던 주다혜를 손짓으로 일으키며 말했다.
“평화는 끝났다, 불곰. 다음에 날 만나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구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눈으로 적혈명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현재 시점에서 북해빙궁과의 관계가 이렇게 끝나 버린다는 것은 남만야수문으로서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천마신교가 움직인다면 혼자서는 감당이 되지 않으니까.
‘당했군.’분명 흑월회에서 북해빙궁 측에 정보를 흘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기가 적절하게 적혈명이 찾아왔을 터.
설마 냉하영이 이것을 노리고 방문했으리라고는 구휘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멀어져 가는 적혈명을 바라보며 구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비해야겠군.”냉하영이 이렇게 되도록 일을 꾸몄다면 조만간 천마신교가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구휘의 그런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 * *
“내 미인계가 어때?”냉하영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초류향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머리를 뒤로 모아 묶으며 말했다.
“설마 이렇게 쉽게 구휘를 속여 넘길 수 있을 줄은 몰랐다.”초류향은 이미 한 번 구휘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남자 특유의 침착성과 신중함을 알고 있었던 만큼 이런 결과가 더욱 의외였다.
“오해하지 마. 난 속인 적 없어. 그냥 저쪽이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야.”냉하영의 말에 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사실 냉하영은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그녀는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예상하고 움직였을 뿐이다.
“준비는 됐어?”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천마신교의 주력 병력들은 사천성의 경계선에 도착해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남만야수문과 북해빙궁도 눈치챘겠지.”“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으면 직접 알려 줘야 하는데 그거만큼 귀찮은 것도 없거든.”이번에 북해빙궁은 흑월회와 남만야수문의 밀회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정도로 정보력이 뒤처지는 것이다.
그래서 냉하영은 굳이 번거롭게 그들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게 정보를 흘려야만 했다.
“일부러 알려 주는 게 제일 힘들었어.”냉하영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엄승도가 찾아와 초류향에게 말했다.
“남만야수문 측에서 변화가 있습니다.”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시작이군.”구휘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지금 천마신교랑 부딪친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을 알고 있을 터.
“문제는 북해빙궁이지.”냉하영은 자신의 붉은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남만야수문은 자신에게 당한 것을 기억하며 뒤로 물러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신중했고, 불리하다 여기면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다.
사실 냉하영은 처음부터 그 점까지 계산하고 구휘에게 접근한 것이다.
하지만 북해빙궁은 달랐다.
“적혈명이라는 자는 아마 물러서지 않을 거야.”냉하영은 그렇게 내다봤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적혈명은 대단히 호전적인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초류향이 천마신교의 정예들을 이끌고 사천성에 입성하자마자 그가 가는 길목을 막아서는 고수들.
그리고 그 사이를 유유자적 유람이라도 나온 듯이 걸어 나오는 미남자.
“오랜만이야, 교주.”초류향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적혈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천마신교를 상대로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당당하게 혼자 걸어 나와서 초류향을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 한번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 교주도 그리 생각했을 텐데?”초류향은 적혈명의 말에 웃어 버렸다.
정말 놀랍도록 자신과 비슷한 생각이 아닌가?
그 역시 언젠가 한번은 적혈명과 제대로 붙게 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둘 모두 다음 세대를 이끌고 갈 차세대 고수였으니까.
‘단지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크게 상관없었다.
부딪치면 깨부수고 나가면 그뿐.
그럴 힘이 초류향에게는 있었다.
“자신 있지?”냉하영의 질문에 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까부터 적혈명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그가 오는 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오늘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초류향은 천천히 걸어 나가 적혈명과 마주했다.
상대방이 일대일 대결을 원하는데 물러서는 것은 한 단체의 수장으로서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니까.
적혈명은 다가오는 초류향을 보며 웃었다.
그 역시 초류향의 전신에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운 때문에 기분이 무척 좋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무공 역시 자신과 엇비슷한 수준이 아닌가?
재수 없으면 정말 이곳에 목을 두고 가게 될지도 몰랐다.
‘그럴 리가 없지.’갑자기 적혈명의 전신에서 무서울 정도로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초류향을 잠시 지켜보다가 검집을 매만지며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우리 교주님에게 빚이 있었지? 다행이야. 그때는 그 일 덕분에 벽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거든.”“벽이라…….”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도저히, 그 무엇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엄청난 높이의 벽.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지만 그것은 절대적이었다.
“교주를 죽인다면 아마도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쪽 생각은 어때?”“날 죽일 수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스르릉-
적혈명의 검집에서 꺼내져 나오는 새하얀 검날이 짐승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근데 싸우기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을라나, 교주?”“……뭐지?”“사실 이제 와서 물어봐야 소용없는 거지만…… 흑월회의 망할 계집애가 남만야수문에 찾아간 거 말이야. 정말로 그쪽에서 이간계를 쓴 건가?”초류향은 잠시 멈칫했다.
이것을 사실 그대로 말해 줘도 되는지 언뜻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간계다.”“……젠장, 빌어먹을! 그럼 불곰 말이 옳았다 이건가?”적혈명은 검을 빼 들고 한참을 투덜거렸다.
초류향은 그가 혼자서 투덜거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음에도 그에게 사실을 말해 준 이유는 딱 하나.
‘오늘 적혈명은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그러니 진실을 알아도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
초류향은 잠자코 그의 짜증스러운 불만을 다 들어 넘겼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적혈명이 겸연쩍은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말했다.
“실례했군, 교주. 그럼 진지하게 상대해 볼까?”웅웅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적혈명의 검이 가늘게 진동하자 초류향은 가볍게 늘어뜨린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분명 승부는 한순간에 결정이 날 것이다.
초류향 본인도 그러했지만 상대방도 이미 초월적인 힘을 지닌 고수였다.
잠깐의 방심이나 빈틈으로 승부가 갈릴 터.
‘그걸 쓸까?’초류향은 잠시 갈등했다.
냉무기와의 승부에서 얻은 그것.
뇌력환(雷力環)이라 이름 붙인, 수라환경의 힘과 월인천강의 힘을 섞은 그 가공할 무공.
그것을 사용한다면 적혈명은 쉽게 꺾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지금 이런 곳에서 그 무공을 공개할 순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백무량의 심검을 상대하기 위해 완성시킨 비장의 한 수였으니까.
숨길 수 있다면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숨겨서 백무량을 죽일 때 사용해야 했다.
‘역시 노출이 되면 곤란하다.’초류향은 결단을 내렸다.
적혈명을 상대로 뇌력환은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다면 확실히 적혈명과의 정면 승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진법을 쓸까?’손쉬운 방법이지만 여기에도 고민의 여지가 많았다.
강호의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자리였다.
이런 자리에서는 확실하게 무공으로 상대방을 꺾는 것이 가장 좋았다.
‘내 스스로 날개를 꺾어 놓고 싸워야 하는군.’초류향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쓴웃음을 그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다 보니 그만큼 여러모로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져 버렸다.
그때.
‘온다.’초류향의 동공이 커지고, 적혈명의 가늘게 떨리고 있던 검 끝이 반월 모양으로 휘어졌다.
거의 동시에 초류향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오